1주일 전 새벽기도회가 끝나자 장터로 달려갔죠. 고추 모종 몇 그루를 사 오려고요. 그곳의 상점 주인은 청양고추나 꽈리고추를 추천했어요. 하지만 나는 아삭고추 모종만 사왔죠. 청양고추는 너무 매웠고, 꽈리고추는 너무 작은 까닭에요. 아삭고추 모종만 10그루를 산 게 그 이유였어요.
그날 아침 일찍 시장에서 사 온 녀석들을 하나둘 심기 시작했어요. 비도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더욱 좋았죠. 물론 새로운 땅을 파지는 않았죠. 양파가 자라다 죽은 그 자리에 녀석들을 대신 심었어요. 전에는 땅을 갈아엎고 비늘을 씌워 심었지만 무경운(無耕耘) 방법이 산소를 더 많이 저장할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심었던 거죠.
그 중에 한 그루 모종이 너무 작고 연약해 보였어요. 녀석의 허리가 굽어 있었죠. 이대로 며칠 더 지나면 허리가 꺾여 드러누울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그 순간 가게 주인을 욕하기도 했죠. 왜 이런 걸 팔았을까, 하고요. 하지만 손님들이 많아 바빠서 그랬겠지, 하고 생각을 했죠. 씨든 모종이든 좋은 종자를 고르는 안목도 중요할 것 같아요.
그날부터 1주일간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었어요. 물뿌리개로 물을 주는 내 눈과 마음은 아픈 그 녀석에게 쏠렸죠. 녀석이 뿌리를 잘 내렸으면, 하고요. 아니면 며칠 더 기다렸다가 다른 데 옮겨 심을까, 하는 생각도 했죠.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녀석의 허리가 반듯하게 펴진 느낌이었어요. 간밤에 비가 와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전부터 뿌리를 조금씩 내려온 것이었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뿌리도 그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요? 믿음의 씨앗과 모종이 좋다면 더 바랄 것도 없겠죠. 하지만 씨앗과 모종이 빈약하다 해도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게 중요하겠죠. 뭔가를 재촉한다고 빨리 뿌리 내리는 것도 아니고, 토양을 바꾼다고 잘 자라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처럼, 바꿀 수 없는 환경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의 은혜를 베푸시도록 주님께 맡기는 신앙이 최고겠죠.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삼상27:1)
10대 후반의 다윗, 곧 15살의 그가 골리앗을 죽인 후에 32살의 사울에게 쫓겨다녔죠.1) 최초 4년은 유대광야(삼상21-26장)를 돌고돌았죠. 놉→아둘람 동굴→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증조할머니 롯의 고향 모압 미스베→유대광야 헤렛수풀→그일라→십광야→마온광야→사해바다 해변가 엔게디 동굴→유대 최남단 바란광야→십광야 황무지.
그 뒤 3년 4개월은 유대광야를 벗어난 지역으로 숨어들었죠. 사울 왕이 도저히 쫓아 올 수 없다고 생각한 곳이었죠. 이스라엘의 치외법권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의 통제권역인 시글락(Ziklag, 삼상27-31장)이었죠.2) 72세의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벌이다 길보아 산에서 죽을 그 무렵까지, 근 4년 가까이 산 것이었죠.
왜 하필 다윗은 유대광야를 벗어나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나아갔을까요? 사실 그 전에도 아기스 왕에게 들어가려 했다가 미친 체하고 목숨을 건진 일(삼상21:13)이 있었죠. 물론 그때의 아기스와 지금의 아기스가 같지는 않을 수 있죠. 아기스(Achish)란 애굽의 ‘파라오’(Pharaoh)처럼 왕명일 뿐이니까요.
만일 같은 왕이라고 한다면, 왜 그는 이전과 달리 다윗을 받아들인 걸까요? 그때는 다윗이 사울의 신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죠. 지금은 그런 사울과 완전히 연을 끊은 상태요 600명의 군사까지 거느리고 왔으니, 그들을 전쟁 용병으로 사용코자 받아들인 거였죠.3)
그런데 그런 아기스 밑에 들어간 다윗의 선택은 패착이었죠. 안전지대라 생각한 그 토양이 오히려 진흙탕이었으니까요. 시글락에서 다윗은 약탈당한 유대 동족의 전리품을 되찾아주는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 일도 아기스 왕에게 거짓말로 보고했죠. 더욱이 아기스가 이스라엘과 싸우려 할 때 다윗도 출전해야만 했죠(삼상28:1-2). 그러니 다윗은 아기스가 친 거미줄 속으로 스스로 파리 목숨처럼 들이민 꼴이었죠.
과연 그렇게 된 원인이 뭘까요? 이전에 유대광야로 도피행각을 벌일 때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죠. 더욱이 유대광야는 척박한 환경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였죠. 하지만 블레셋의 아기스 통제권을 택한 다윗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죠. 육신적인 안전지대만을 찾다가 그렇게 영적인 거미줄에 칭칭 감긴 꼴이었으니까요.
"서울 톨게이트에서 일하는 노애영 씨는 정산의 달인으로 통한다. 한 평 반 공간에서 매일 2,000명을 상대로 하는 정산 업무. 어찌 보면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라 지루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노애영 씨에게 일은 재미있는 놀이터였다."(32쪽)
최윤희의 〈모든 것은 태도에서 결정된다〉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노애영 씨가 일하는 비좁은 톨게이트 현장이 얼마나 답답하고 따분할까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환경이겠죠?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터를 즐거운 놀이터처럼 대하며 뿌리를 내린 것이죠.
이 책을 쓴 저자는 현재 (주)비상교육 HR 부문 총괄책임자로 재직 중이에요. 20년 넘게 직원교육과 인사업무를 수행해왔어요. 그 속에서 ‘일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한 것이죠. ‘일잘러’의 특징은 특출난 ‘능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래도록 길러진 ‘태도’에 달려 있었다는 거예요. 이 책에서도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를 소개하기도 해요.
어떤가요? 부모의 좋은 텃밭을 물려받는다면 너무나도 좋겠죠. 신앙의 씨앗과 모종도 다르지는 않겠죠. 하지만 허리가 빈약한 고추 모종을 다른 곳에 옮겨 심었다면 어땠을까요? 한 자리에서 좋은 뿌리를 내리긴 힘들었겠죠. 배다른 여덟번째 아들로 태어난 다윗이 하나님께서 훈련시킨 유대광야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훨씬 견고한 믿음의 뿌리를 일찍 내렸겠죠. 노애영 씨도 부모의 좋은 운동장을 물려받지 못했어도 바꿀 수 없는 환경을 놀이터로 삼고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존중받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겠죠. 부모의 좋은 텃밭이나 운동장만 바라거나 기댈 수는 없는 일이죠. 더욱이 바꿀 수 없는 환경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믿음의 뿌리를 굳게 내리는 게 중요하겠죠. 그를 위해 부활하신 주님께 우리 인생을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고요. 그것이, 연약한 고추 모종을 통해, 다윗의 도피행각을 통해, 노애영 씨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아닐까 싶어요. 사랑하고 축복해요.
1)https://www.bible.ca/archeology/bible-archeology-exodus-route-date-1200-1004bc.jpg
2)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0328
3)https://enduringword.com/bible-commentary/1-samuel-27/
Like Reinhold Niebuhr's prayer, the faith that entrusts the Lord to the grace of tranquility acceptable to an irreplaceable environment would be best.
David was like the life of a fly in the web of Achish.
It was because I was looking for only a physical safe zone, and I felt like I was wrapped up in a spiritual web.
Rather than trying to change an irreplaceable environment, it is more important to firmly root your faith in a given place.
'라이프묵상LifeBib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은 빅데이터의 한 점이나 부속물이 아니다 (0) | 2021.06.12 |
---|---|
아버지의 자리 (0) | 2021.05.29 |
중년기 위기극복, 인생 목표에 선한 열정 쏟아부어야 (2) | 2021.05.22 |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순리를 따라야 (0) | 2021.05.15 |
헤브론의 다윗, 어머니의 모판을 삼다 (0) | 2021.05.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