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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여행

여행은 복기다_7박9일 동유럽성지순례를 돌아보며

by 똑똑이채널 202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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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누구와 함께 하는가가 중요하다.

마음이 통하고 몸도 통하는 사람이면 더욱 좋다.

몸이 통한다는 말은 뭘까?

코를 골지 않는 사람 혹은 같이 코를 고는 사람을 뜻한다.

나와 함께 7박 9일을 지낸 김종갑 장로님은 몸도 마음도 모두 화통한 분이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효소를 먹었고 식사 전에 모닝워크도 열중이었다.

여행 중간중간에 한국에서 맡은 일을 체크하는 데도 소홀함이 없었다.

더욱이 우리 일행이 들어가고자 한 비텐베르크시교회 입장료 전액을 헌신한 분이다.

33인의 동유럽성지순례 여행길이 즐거운 이유가 바로 그런 데 있었다.

 

비텐베르크시교회의 루카스크라나흐의 제단화. 성찬식 참여자가 14명이고 루터도 루카스크라나흐의 아들도 있고 모두 비텐베르크 무명의 시민들이다.

 

여행은 또 어떤 가이드를 만나는가에 따라 행복지수가 달라 진다.

쓸 데 없는 썰을 열심히 풀어제치는 가이드도 있고 고가의 상점만 데리고 가는 가이드도 넘쳐난다.

이번 동유럽성지순례여행 가이드를 맡은 김OO씨는 너무나도 탁월한 가이드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의 3대 가이드 중 한 사람’이었다.

종교개혁은 물론이고 유럽의 역사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동서고금을 넘나들면서 자유자재로 이야기하는 그의 거침없는 썰전에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도 한국에서는 신학대학에 다녔고 삼각산 아래에서 철야기도를 한 사나이다.

그런 그였지만 지금은 독일 땅에서 독일인들이 출석하는 루터교회에 다닌다.

그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회초리 5대를 맞는 퍼포먼스를 벌였지만 독일교회는 500그루 나무를 심어 환경오염을 지키는데 솔선수범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강원도 감자도 1832년 칼 귀츨라프 루터교 선교사가 충청도 해안에 감자재배를 전수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독일 개신교인들은 종교세 4%를 자율적으로 납부하는데 목회자의 월급은 시의회에서 지급한다고 한다.

다만 독일교회는 영국이나 미국교회처럼 예배당이 술집으로 넘어가는 일은 아직 없다고 한다.

물론 독일개신교 목회자는 누구라도 정치에 참여한다고 한다.

그것이 독일개신교회가 독일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는 일이요 목회자의 정치참여를 통해 나라와 사회가 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고민하는 흔적이다.

한국개신교 목회자들이 개인주의 영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독일개신교 목회자들은 사회영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만큼 독일개신교는 역사적 실재성과 투명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건재하지 않을까 싶다.

 

 

바흐 기념동상. 게오르크교회와 루터하우스(LutherHaus) 그리고 사과나무를 지나면 마주하게 되는 곳.

우리가 인천공항에서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이었다.

입국심사대는 8개 정도 있는 것 같았지만 일하는 직원은 4명이이었다.

저녁시간이라 그런 건지 문은 좁고 사람은 많아 장사진을 치러야 했다.

입국 심사를 통과한 후에도 맨 앞장선 김종갑 장로님과 박갑성 목사는 가방을 열어 제쳐 따로 검사를 받았다.

그 후에야 모두 버스에 몸을 싣고 첫 번째 숙소인 아이제나흐 Posthotel호텔로 향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가는 길이 장날이라도 되는 양 길에서 6시간을 보내야 했다.

도로가 공사중이었고 그 와중에 사고가 난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 독일 사람들은 차분하게 시동을 끄고 기다렸다.

나는 방광이 약해 바깥에 나가 길에다 소변을 봤다.

물론 나 말고도 서너 명의 목사님들이 그 대열에 동참했다.

그런데 그토록 답답하던 그 길목이 어느 순간 사르르 풀리면서 주유소가 있는 휴게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0.5센트 유로를 내고 모두들 시원하게 방광을 비워냈다.

그로부터 20분 만에 도착한 첫 번째 호텔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감사했으랴.

자칫 도로에서 뜬 눈으로 첫날을 맞이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1391년 지어진 교회 입구 향하는 길목의 김성진 목사와 큰 아들 모습.

그 호텔 조식은 너무나도 맛깔스러웠다.

사과는 기본이고 각종 과일에다 빵과 커피와 디저트도 다양했다.

조식을 마치고 잠시 시내 한바퀴를 돌았다.

그랬던 1391년에 지어진 독일교회당에 눈에 들어왔는데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고 누군가 차를 대는 틈에 끼어들어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한쪽에 있는 안내원을 가리킨다.

그녀에게 내부를 볼 수 있냐고 물었더니 기꺼이 보여줬고 예배당 안에서 잠시 기도했다.

이후 그녀는 마켓거리를 지나면 또 다른 멋진 교회를 볼 수 있다고 알려줬고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그랬더니 그 교회는 필그림교회였고 문도 열렸고 불도 환했다.

그 교회 예배당을 나와 마켓거리에 있는 상점에 들러 볼펜 하나를 샀다.

현찰로 0.99유로였다.

 

루터와 그의 아내 폰 보라. 김용섭 목사와 나.

 

아침 식사를 모두 마친 우리 일행은 곧장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제 늦게 도착한 탓에 버스 기사를 혹사할 수 없어서 그 성은 버스안에서 멀리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후 도착한 곳은 게오르크교회와 루터하우스(LutherHaus) 그리고 바흐하우스였다.

루터 하우스는 루터가 하숙한 곳이고, 게오르그교회는 바흐가 세례를 받고 출석한 교회다.

그 길목에 스피노자와 관련된 사과나무가 있는데 루터의 사과나무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스피노자나 루터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르푸르트 대성당 앞. 저 뒤편의 계단이 70개.

 

이날 점심은 아주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음식이 짜되 기분 나쁠 정도로 너무 짰기 때문이다.

수프도 짰는데 돼지고기 요리는 염장을 지른 것처럼 너무나도 짰다.

괜한 물만 벌컥벌컥 들이켜야 했다.

그래도 음식점을 나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과 에르푸르트대성당을 향해 크래머 다리(Krämerbrücke)를 지나가는 일은 너무나도 유쾌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허름한 의복을 입고 기도와 명상과 노동과 미사와 찬양 그리고 음식을 조달하는 방법 등 규율을 감수할 것을 서약했다고 한다.

그 수도원에서 수도사 과정을 끝내고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 에르푸르트 대성당이다.

그 대성당 앞에서 가이드가 우리 일행에게 질문했다.

“에르푸르트 대성당에 오르는 계단이 몇 개나 되는 줄 아시는 분 있나요?”

그때 대략 개수를 때려맞춘 나는 “70개요”하고 답을 했더니 그가 놀랐다.

무슨 선물을 준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나 혼자만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곳 에르푸르트는 1808년 40살의 나폴레옹이 당시 60살의 괴테를 만난 곳으로 유명하다.

그 이후 나폴레옹은 괴테의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을 이집트 원정길에 가지고 다녔다.

 

아이슬레벤 루터동상. 저 뒷편으로 아이슬레벤 시청사

 

이후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아이슬레벤으로 이동했다.

이이슬레벤은 루터의 생가가 있는 곳이자 루터가 임종한 집이 있다.

우리는 루터의 생가보다 루터의 임종한 집을 먼저 방문했다.

그곳에는 루터를 알려주는 여러 장식품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특히 임종직전의 루터는 젊은 시절의 모습과는 달리 엄청나게 살이 찐 모습이었다.

그 집을 나와 루터의 동상을 볼 수 있는 마르크트 광장 앞에 섰다.

마르크트 광장 뒤편으로 예쁜 꽃들이 창틈에 걸려 있는 아이슬레벤 시청사도 눈에 띤다.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우리는 곧장 버스에 몸을 싣고 라이프치히 할레로 이동했다.

할레는 음악의 어머니 헨델의 고향이자 매월 5월말에서 6월 중순에 헨델 축제를 개최하는 도시다.

헨델과 동갑내기엔 바흐가 기악곡과 종교음악에 업적을 남겼다면 헨델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와 같은 극음악쪽에 더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헨델의 ‘메시아’에 나오는 ‘할렐루야’는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가이드는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 노래였다고 한다.

사실 영화 〈파리넬리〉에 나오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가 훨씬 더 감미롭게 들린다.

그렇게 하루를 마친 우리 일행은 할레의 4성급 H+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루터의 임종시 모습 사진

 

그 호텔 조식도 너무나 맛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곧장 1시간 10분 정도 걸려 비텐베르크시교회에 도착했다.

그곳은 루터가 30년 동안 설교한 곳이요 일한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세계 최대 종교개혁 박물관이 있는 루터 뮤지엄이 자리하고 있다.

루터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품과 자신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곳을 빠져나와 길에서 마주한 곳이 루터가 신학을 공부한 비텐베르크대학이다.

그 대학 정문에 루터가 붙였다는 ‘95개조 논제’(Die 95 Thesen)가 청동으로 우뚝 서 있다.

사실 루터는 교황청에 항거하고자 95개 논제를 붙인 게 아니라 대주교에게 공개서한으로 보낸 것이다.

더욱이 엘베강의 살얼음판을 뚫고 ‘면벌부’를 사러 가다가 죽어가는 수많은 군중을 보고서 루터는 더욱 심혈을 기울여 95개 논제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비텐베르크대학 청동문에 붙어 있는 95개조 논제 위에 그림 세 개가 눈에 띤다.

예수님 그림이 맨 위에 있고 그 아래 왼쪽에 독일어 성경을 든 루터,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들고 있는 멜랑히톤의 그림이다.

사실 독일개신교의 시작점은 가이드가 말하듯이 멜랑히톤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궤를 같이한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을 통해 개신교가 정식으로 출발했고, 그때부터 지역 제후의 인정하에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로 나뉘게 된 것이다.

 

카를로비 바리 김우영 목사 부부.

 

카를로 바리 조미정 목사

이후 우리 일행은 3시간 30분 가량 차를 타고 체코의 ‘카를로비 바리’로 이동했다.

카를로비 바리(Karlovy Vary)는 ‘카를 왕의 온천’이란 뜻으로 서부 보헤미아 온천도시다.

18세기 쇼팽과 바그너 등의 음악가와 괴테가 즐겨 찾은 온천 휴양마을이기도 하다.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에서 주인공 조지아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이곳으로 떠난 곳이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여름철만 되면 이곳은 수많은 할배와 할매가 넘쳐나 방을 구할 길이 없다고 한다.

이곳 카를로비 바리의 PUPP PARK HOTEL에서 3일차 숙박을 했다.

그곳의 조식도 역시 맛있었다.

나와 함께 잠을 잔 김종갑 장로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조로 그런 말을 한다.

“우리 권목사님은 유럽음식에 특화된 체질 같아요.”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거리를 둘러봤다.

그곳에 이상한 게 하나 걸려 있었다.

이른바 애완견을 위한 휴지통과 똥을 담을 수 있는 검은 봉지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유럽은 애완견들의 세상인가?

아니다.

기분 나쁜 것은 어디를 가나 길거리에서 담배피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 나름의 자유라고 하니 뭐라고 내가 태클을 걸겠는가?

하지만 괜한 담배냄새 때문에 내 심장과 폐가 상할까봐 무척이나 염려되는 것 뿐이다.

그것 빼고는 유럽이 다 좋다.

 

채코 바츨라프 광장. 서석희 목사 부부

얀 후스의 동상 앞에서. 장신순 목사

카를교. 김권영 목사 신혼부부사진

카를교 앞. 단체 사진. 정정문 목사 사진.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곧장 차에 몸을 싣고 2시간 가량 프라하로 갔다.

체코는 동유럽 국가 속의 서유럽 국가라는 느낌을 주는 나라였다.

우리는 프라하의 봄을 떠올리게 하는 바츨라프 광장으로 걸어갔다.

국내에서 100만 부가 팔린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다.

그 광장은 내가 바라보는 관점으로 말하면 5·18 광주항쟁 도청사 거리와 같은 곳이다.

서울로 치자면 명동거리와 같다.

그 광장거리가 1850m인데 그곳에서 프라하 시민들이 나서서 러시아와 우크라니아 전쟁을 멈추라고 가두행진을 벌였다고 한다.

이후 우리는 재래시장인 하벨시장을 거쳐 1410년에 만들었다는 천문시계탑 앞에 서서 12시 타종을 지켜봤다.

해골 바가지가 나와서 종을 울리는데 ‘너의 죽음을 염두에 두며 살라’는 뜻 같았다.

그곳에서 자유시간을 30분 줬는데 나와 몇몇 일행은 틴성모교회 내부에 들어갔다.

이후 얀 후스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얀 후스는 루터보다 100여 년 앞서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인물이다.

그는 위클리의 성경번역과 신앙서적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로 인해 라틴어가 아닌 당시의 체코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했고 모국어로 설교를 했다.

더욱이 일반 성도에게는 성찬이 금지됐는데 그는 이종성찬을 행했고 부패한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를 비판한 죄로 46살의 나이에 독일의 콘스탄츠공의회에서 화형당했다.

그래서 1520년 2월 후스의 저술을 읽은 루터는 그렇게 말했다.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이후 우리는 얀 후스가 10년에 걸쳐 3천번 설교했다는 베들레헴채플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지금 기숙사 건물로 쓰이고 있어서 대문 앞에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이후 프라하 명소로 널리 알려진 카를교에 도착해 삼삼오오 기념사진을 찍었다.

곧이어 올드카를 타고 시내를 투어했고 프라하 공원에 올라가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다.

그 뒤 차량으로 2시간 20분 거리의 부르노로 이동해 비스타 호텔에 짐을 풀었다.

 

 

카를교 앞에서. 강성주 교역자 회장부부

마차시 성당을 바라보고 한 컷. 그 옆에 어부의 요새가 있다.

브르노 호텔에서 조식을 먹은 우리는 4시간에 걸쳐 헝가리 부다페스트(Budapest)로 이동했다.

‘돼지’를 뜻하는 부다지역은 전통적으로 주거지역이고 ‘흑사병’을 뜻하는 페스트 지역은 상업과 공장지대가 혼재한 곳이다.

그 두 지역은 모두 다뉴브강을 기준으로 나뉜다.

그곳에서 우리는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 비유되는 길레르트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후 어부들의 요새와 마차시 성당 앞에서 자신을 찍었다.

그곳 성당 내부를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6유로를 달라고 했고 어부들의 요새로 향하는 관문도 4유로를 내라고 했다.

나와 장신순 목사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모자라 입장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헝가리는 1000년의 역사에 900번의 전쟁을 치르며 외세의 침입을 받은 나라다.

어부의 요새는 외세의 침입 때 헝가리 국민들이 싸울 때 어부들이 군수물자와 적들을 공격할 돌을 배로 수송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축조한 건축물이다.

이후 시치니 다리로 내려와 기념사진을 찍었고 곧장 저녁을 먹었다.

그곳 식당은 작은 연주회를 곁들인 식당이었는데 나는 그걸 감상하느라 부다페스트에서 자칫 미아가 될 뻔했다.

맨 나중에 나간 나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정정문 총무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답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는데 가이드와 또 다른 현지 가이드가 다가와 나를 반겨줬다.

이후 부다패스트 야경 관람을 위해 유람선 탑승장으로 이동했고 30분 넘게 배를 탔다.

부다패스트 야경은 유럽의 3대 야경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서울의 한강야경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물론 부다패스트 시에서는 그곳의 야경을 위해 개인 집들까지 철저히 조명을 관리단속한다고 한다.

이후 우리는 ​5일차 숙박지인 엑스포 콩그레스 호텔로 이동해 짐을 풀었다.

 

쇤부룬 궁전 뒤쪽에서 찍은 단체 사진.

성 슈테판 성당 앞 장신순 목사

 

성 슈타판 성당 앞에서

유럽의 호텔 조식들은 모두가 풍족하고 흡족했다.

그 호텔 조식을 마친 우리는 3시간 30분가량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했다.

빈(Vienna)은 국립오페라극장(좌석2,500석 연중 300여 작품 공연), 국민오페라극장, 음악회관, 콘체르하우스 등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길목에 창문 넘어로 정갈한 호수를 끼고 있는 할슈타트(Hallstatt)가 보였다.

시내에 들러서는 창문 밖으로 오페라 하우스랑 빈 국회의사당이랑 빈 대학도 관람했다.

더욱이 구스타프 클림트가 들러 커피를 마셨다는 카페 건물도 가이드가 소개했다.

이어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1713년 레오폴트 1세가 건립한 쇤부른 궁전이다.

쇤부른 궁전은 원래 방이 1,441개였는데 현재는 45개만 공개하고 있었다.

그 궁전 안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부터 1780년까지 40년 통치를 했다.

그녀는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막내딸이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시집간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한다.

이후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는 곧장 빈의 중심지인 케른트너 거리(Kerntner Strasse)를 지나 빈의 상징인 성 슈테판 성당(Stefan Cathedral)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곳에서 처음 접한 ‘DM’에 들러 초콜릿과 하리보와 선물꾸러미를 샀다.

이후 6일차 숙박지 아리온 시티호텔에 들러 몸을 풀었다.

다음에 가고 싶은 할슈타트 전경

미라벨 궁전 앞

미라벨 궁전 앞 정정문 목사 부부

호엔잘츠부르크성 위에서 뒤편으로 바라본 알프스 만년설

찰즈부르크 시내 전경.

모차르트의 생가 앞에서. 김성진 목사 가족.

호텔 조식을 마친 우리는 3시간 30분 정도 걸려 잘츠부르크(Salzburg)로 이동했다.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빈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그곳에서 맨 먼저 들린 곳은 미라벨 궁전 앞 정원이었다.

그곳이 바로〈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 장소다.

이후 조수미를 발탁했다는 카라얀의 생가를 거쳐 모차르트의 생가를 통과했다.

그 거리가 바로 잘츠부르크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게트라이드 가세’다.

이후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거쳐 푸니쿨라를 타고 호엔잘츠부르크 성(Hohensalzburg Fortress)에 올가갔다.

그 성벽 너머로 저 멀리 알프스 만년설이 보인다.

내려오는 길에 모차르트와 카라얀이 들러서 커피를 즐겨했다는 ‘토마젤리 카페’를 바라봤다.

다들 모차르트 초콜릿 상점에 들러 초콜릿을 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 김종갑 장로님은 가이드와 함께 토마젤리 카페에서 그 유서 깊은 커피를 음미하며 즐겼다고 한다.

이후 고독소로 휴게소에서 맥도널드 도넛으로 점심을 때운 우리는 4시간 소요되는 독일 슈투트가르트로 이동해 7일차 숙박을 했다.

 

보름스대성당. 그 유명한 스테인드글라스

보름스대성당 앞에서

그곳의 호텔 조식도 맛이 있었다.

그 호텔이 기억나는 것은 다른 호텔과 달리 포도 식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식초는 효소나 막걸리보다 최고로 좋은 건강식이다.

그것 때문에 슈투트가르트 그 호텔이 더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호텔 식당 입구에는 커피를 내려주는 바리스타도 친절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그 또한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커피 맛이다.

이후 우리는 루터가 제국의회장으로 들어선 독일의 보름스대성당으로 향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무료입장이었는데 올해부터 입장료를 받는 곳이었다.

그 입장료는 가이드가 섬겼다.

물론 우리 일행이 차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헌금한 돈을 가이드에게 전달했는데 그는 도리어 그걸 입장료로 섬기는데 사용한 것이다.

가이드는 그 어떤 장소보다 보름스대성당을 중요시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곳 입구 오른쪽에 놓인 스테인드글라스 때문이었다.

1992년에 제작된 그 스테인드글라스는 루터를 기념하는 문양도 있었지만 루터의 오른편 그림 문양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 문양은 1938년 보름스 시민들이 집단으로 유대인들에게 린치를 가한 그 날을 회개하고자 새겨 넣은 것이었다.

그만큼 스테인드글라스는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담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요 고해성사의 자리다.

이후 가이드는 종교개혁의 기념동판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의 동판에는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가 빠져 있다고 한다.

루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란다.

물론 그 너머에 있는 동상들은 리옹 출신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를 비롯해 루터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 목회자인 요하네스 부겐하겐, 존 위클리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을 체결한 멜랑히톤, 필립헤센, 존 칼빈, 그리고 카를 5세와 마주한 루터의 동상 등 여러 인물들이 서 있었다.

가이드는 그 인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면서 진정한 ‘프로테스티어렌’ 곧 ‘진정한 저항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있게 다뤘다.

 

프라하 틴성모교회 내부

 

프라하 틴성모교회. 편재규 목사 부부

카를교 앞에서. 조준경 목사 부부

이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우리 일행은 면세점에 들러 독일칼과 손톱깎기와 향수를 산 후에 곧장 프랑크푸르트 비행기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목감기에 걸렸는지 나는 목이 아파 드러눕고 싶었다.

한참을 비행하다보니까 맨 뒤에 두 줄이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승무원에게 그 자리를 살 수 없냐고 물었더니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많아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한 참을 비행하다 누구도 앉거나 쉬는 분이 없다는 걸 알고 그냥 드러누워버렸다.

그 후 기내식으로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누웠는데 어느 승무원도 제지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자리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을 위한 배려의 자리로 비워놓는 것이었다.

 

아이슬레벤. 김우찬 목사 부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김을자 목사

여행기를 쓰는 것은 복기다.

바둑도 장기도 체스도 복기를 잘해야 다음번을 더 잘 둘 수 있듯이 말이다.

7박 9일간의 단체여행은 임원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섬기는 모습이 좋았다.

교역자 회장 강성주 목사님과 부회장 김상오 목사님 총무 정정문 목사님과 회계 김용섭 그리고 친교부장 김성진 목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번처럼 성지순례 차원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면 앞으로는 공부를 더 많이 해서 미리 스터티를 하고 여행동선을 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번에 아쉬운 점이 비텐베르크에서 곧바로 카를로 바리로 이동할 게 아니라 드레스덴의 헤른후트로 이동하는 게 나았다는 점이다.

그곳이 바로 얀 후스의 후예들이 진젠도르프 백작를 만나 모라비안교도를 창시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부터 개신교 최초의 성경묵상집 로중이 나왔고 그곳으로부터 개신교최초의 선교사가 파송됐기 때문이다.

그곳을 둘러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도 365일 동안 300일간 우중충한 날씨가 프라하인데 60일 중의 한 점과 같은 햇빛을 마음껏 볼 수 그 기간에 들어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전쟁이 한창이고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무사하게 귀국케 된 것도 주님의 크신 은혜였다.

부다페스트 야경관람

프라하 공원에서 찍은 시내전경

다음에 가고 싶은 할슈타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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