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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여행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 여행코스

by 똑똑이채널 202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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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루카스 크라나흐, 마르틴 루터 초상화, 1523

우) 루카스 크라나흐, 마르틴 루터 초상화, 1539

 

마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농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마가레타 루터(Margaretta Luther)의 아들로 태어난다.

루터의 부모는 아이슬레벤(Eisleben)의 농부 생활에서 만스펠드(Mansfield)의 광부 생활로 일하다가 7년 뒤 구리 광산업을 경영하여 중세 말 한창 득세한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 된다.

그의 부모는 엄격한 카톨릭 신앙의 소유자였다.

어린 시절 루터는 만스펠드에 있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루터를 법률가로 키우고자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에 보냈다.

아버지는 루터의 남동생에겐 광산업을 물려주고 루터를 변호사로 키우려 한 것이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루터는 인문과학 학사과정을 밟았다.

그 대학에서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을 공부했다.

그곳의 가브리엘 비엘 선생을 통해 어거스틴과 신비주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인문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505년 루터는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률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1505년 7월 2일 스토테른하임 인근에서 도보여행 중 벼락을 맞는데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통해 그해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회(Augustinian Monastery)에 들어간다.

그의 나이 21살때의 일이다.

1507년 4월 3일, 드디어 에르푸르트 주교좌가 있는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5월 2일 첫 미사를 집례한다.

그즈음 루터는 다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시작한다.

그 당시 사제 서품을 받고 신학을 공부하는 사제들이 많았다.

그 후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긴 뒤 1509년 3월 성경학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1512년 10월 18∼19일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때가 28살의 나이였다.

1513년 그는 시편을 강의했고, 1515년 가을엔 로마서를, 1516년∼1517년엔 갈라디아서를 강의했다.

그렇게 교수 사역을 하면서 성경주해하는 일에 집중했다.

1513년부터 2년간 시편을 강해했고, 1515년부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1517∼1518년까지는 히브리서를 주해했다.

그러던 중 루터는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자세를 위한 사창가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로마 교황청에는 ‘빌라도의 계단’이라 불리는 28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전통이 있었다.

루터도 무릎으로 그곳을 기어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던 중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로마서 주해가 떠올랐고 이신칭의 사상이 빛처럼 다가왔다.

 

 

그 당시 부패한 로마 교황청이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 기금을 마련코자 면벌부를 판매했다.

면벌부 판매 설교자로 활약한 요하네스 테첼은 “헌금이 상자 속에서 찰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지옥 불 속에서 뛰어나온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루터 앞에서도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루터는 그것이 가난한 민중을 등치는 사기라고 여겼다.

1517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Schlosskirche 슐로스 교회) 출입구에 95개 논제(Die 95 Thesen)를 붙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루터는 라틴어로 쓴 95개 논제를 동료 성직자 및 학자들과 토의하고자 한 마음으로 면벌부 판매를 주관한 마인츠 주교에게 보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행위를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로마로 소환하라고 명령을 했다.

당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보호했다.

1518년 4월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회의에 참석하여 ‘십자가 신학’을 전개하며 40개 논제를 설명했다.

1520년 종교개혁에 관한 가장 위대한 책 세 권 곧 〈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출간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의 젊은 황제 카를 5세(1500∼1558)는 보름스 의회에 루터를 소환했다.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700km가 넘는다.

당시 루터의 주변 동료들은 100년 전 체코의 얀 후스처럼 루터도 화형당할지도 모른다며 말렸다.

하지만 루터는 극구 나갔는데 교황의 교권보다 성서의 진리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함이었고, 당대에 그를 지지한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해 칼 슈타트와 멜란히톤 교수 그리고 전투용 도끼를 들고 루터의 뒤를 따른 200여 명의 학생이 동행한 까닭이었다.

14일만에 도착한 루터는 보름스 의회에 출석한 첫날 기가 눌려 처음엔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루터는 깊은 고뇌에 빠져 몸부림하듯 진액을 쏟는 기도를 했다.

누구보다도 고독했고, 그 어떤 일보다도 두려웠고,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며 흔들리는 듯 신음하며 기도했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그때 문득 그의 뇌리에 스치는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그 말씀이 루터의 뇌리와 심령에 떠오를 때 그때까지 가득찼던 고독과 두려움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 말씀이 루터의 심령에 계시처럼 다가와 큰 위로와 확신으로 자리잡았다.

그 자리에서 영감을 얻어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 만든 찬송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이다.

다음날 루터는 로마 교황청의 어긋난 논조와 그릇된 행보를 당당하게 반박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한다.

“폐하! 제 대답은 이것입니다.

저는 수없이 오류를 범한 교황과 공의회를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제 양심과 성경에서 직접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저는 철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제가 여기 있나이다.”

1521년 5월 25일 보름스 의회는 칙령을 통해 루터를 정죄하고 이단자로 선언했다.

그때 교황과 황제의 최측근들은 루터를 제거하려 했다.

이후 루터가 고향을 돌아오던 귀향 8일째 되는 날 복면의 괴한에게 덮쳐 피습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일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빼돌려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에 피신시킨 일이었다.

그 성의 독방에서 루터는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했고 11주 만에 과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패기만큼은 루터 못지않은 비텐베르크의 인쇄공 멜히오르 로터가 2교대로 인쇄를 진행했다.

1522년 9월 말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서가 라이프치히 도서박람회에 출품됐고 독일 전역으로 배포돼 매진됐다.

1년이 지나지 않아 추가 12판이 정식 출간됐고 해적판도 50개가 넘었다.

그러자 루터는 구약성서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비텐베르크에서 결혼했고 1527년 7월 아버지가 됐다.

루터의 나이 43살의 나이였다.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8년 동안 6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루터가 목회하는 동안 그의 아내 폰 보라는 전염병 걸린 사람도 집에 데려와 치료하고 돌봐주었다.

 

 

1534년 루터가 번역한 신구약 성서 전체가 독일어로 번역 출간됐다.

그 성경은 가톨릭의 외경을 뺀 최초의 성경이다.

물론 그 전에도 덴마크어 신약번역이 1524년에 있었고 1526년에는 화란어로 전체가 번역되어 있었고 프랑스어 번역은 1530년에 있었다.

루터의 신구약 번역 성경은 1455년 마인츠의 혁명적인 인쇄술을 개발로 찍은 구텐베르크의 성경이 나온 지 70여 년이 지난 뒤였다.

그 일에 대해 루터는 1530년에 출간한 〈번역에 관한 공개서한〉에서 솔직하게 털어놨다.

라틴어나 그리스어 단어 하나하나를 번역하려고 하지 않고 살아 있는 독일어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이다.

당시 독일 북부의 방언은 저지독일어였고 독일 남부 방언은 고지독일어였는데 루터는 두 방언을 절충하여 누구라도 뜻이 통하게 번역했다.

그만큼 거창한 단어는 피하고 지역의 관용구와 일상의 통속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성의 독방에서 신약성서를 번역한 도시 아이제나흐에는 고딕 양식의 성 게오르크 교회(St George's Church)가 있다.

200년 뒤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는 어린 시절 그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성가를 불렀다.

그는 루터의 저작 전집 두 질을 구입했는데 루터가 없었다면 그의 유명한 ‘마태 수난곡’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터가 만든 독일어, 동화, 자연 풍경에 대한 기억 외에 말과 지역이 다른 독일인을 하나로 묶은 이가 있었다.

바로 괴테다.

미국인이 신 아래 한 민족이라면 독일인은 괴테 아래 한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74년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유럽을 뒤흔든 베스트셀러가 됐고, 1808년 세상을 탐구하고 이해할 능력을 얻고자 악마와 계약을 맺은 한 남자를 그린 희곡 〈파우스트〉는 독일인다움을 과시한 작품이다.

루터가 현대 독일어를 완성했다면 괴테는 현대 독일어를 꽃피운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종교개혁에 불을 붙인 루터를 두고 가톨릭에서도 비난했지만 독일 농민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루터의 개혁성향 때문에 농민들도 처음엔 루터를 정신적 지도자로 추종했다.

성서를 민중의 언어로 번역했고 신 앞에 만인이 동등하다고 외쳤기 때문이다.

토마스 뮌처(1489∼1525)도 1518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다닐 때 루터의 글을 접하며 열렬한 추종자가 됐다.

그러나 뮌처는 광신적 신비주의에 빠져들었고 혁명을 위해 신학적 기초를 쌓았다.

그가 꿈꾼 천년왕국은 성직자 귀족 평민 농부 등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를 위해 악한 세력과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1524년 독일 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초기 무렵엔 루터도 농민들의 입장에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농민봉기가 점차 폭도로 변하자 그들의 혁명이 그릇된 방법이라고 경고하며 권세자에게 복종할 것을 설교했다.

더욱이 루터는 과격한 뮌처를 향해 이단과 분열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런데 농민 폭도들이 루터의 눈앞에서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도륙하는 장면을 목격하자 루터는 농민들을 미친개로 여기며 위정자들에게 찌르고 치고 목을 비틀어 진압토록 주문했다.

1525년 5월 농민전쟁은 통치자들에 의해 프랑켄하우젠에서 완전히 진압됐다.

그때 10만∼15만의 농민이 학살됐다.

 

 

1546년 1월 17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했다.

그전부터 여러 건강상의 문제와 몇몇 상황들이 루터를 괴롭혔다.

멜랑히톤과 관계를 파괴시킬 정도의 성만찬 논쟁, 일부 회중교회들이 교역자의 사례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는 문제, 동료개혁자들과 토론할 때 그를 거칠게 대하는 정서적 문제, 젊은이들이 부모와 보호자 동의 없이 비밀 결혼서약을 하는데 가톨릭교회가 승인할 뿐만 아니라 비텐베르크의 판사들이 그 서약을 무효화하지 않는 문제, 젊은 여성들이 가슴이 패인 옷을 입고 대학에 들어오는 문제 등등.

그런 상황에서도 트렌트 회의와 관련하여 루터는 교황제에 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루터가 태어난 고향 마을 아이슬레벤에는 만스펠드 백작과 그의 형제들과 광산 이권에 관심이 많던 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깊었는데 그들 모두가 루터의 판단과 결정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루터는 만스펠드 백작의 간청을 받아들여, 당시 건강상의 문제로 아내를 홀로 남겨둔 채, 두 아들 마틴과 파울을 데리고 아이슬레벤으로 출발했다.

여행은 심한 폭풍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강물이 둑에 흘러넘쳤고 다리가 떠내려가는 위험에서도 할레에 도착해 성 마리아 교회에서 설교했고, 1월 28일엔 아이슬레벤에 도착했다.

루터는 아이슬레벤의 성 안드레아스 교회(St. Andreaskirche)에서 1월 31일과 2월 2일, 2월 7일, 2월 14일 4편의 설교과 함께 두 차례의 성만찬을 집례했다.

루터의 마지막 설교는 그것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2월 14일에는 안드레아스 크라우제와 에사이아스 발라를 목회자로 임명했다.

2월 17일 저녁 식사 후 새벽 1시쯤 심장 발작을 일으킨 루터는 죽음을 직감했다.

할레에서부터 동행한 유스투스 요나스(Justus Jonas)는 루터의 임종이 가까운 걸 알고 임종 전 증인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중세 시대 임종을 앞둔 사람의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한 의식 중 하나였다.

요나스는 루터에게 “존경하는 목사님,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주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을 고백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루터는 짧게 “예”로 대답했다.

그런 질문들을 몇 개 더했고 루터는 그때마다 예로 대답했다.

얼마 후 루터는 의식을 잃었다.

1546년 2월 18일 새벽 2시 45분, 루터는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루카스 크라나흐 <최후의 만찬>, 비텐베르크 제단화, 패널에 유채, 1547.

 

루터의 인물화는 누가 그린 것인가?

그의 친구이자 루터의 성경삽화를 그린 루카스 크라나흐다.

그런데 루카스 크라나흐는 <최후의 만찬> 작품을 그린 인물로 널리 알려 있다.

<최후의 만찬>하면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을 떠올리기가 십상이다.

그런데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보다 40년 뒤에 그린 작품으로 비텐베르크 교회 제단화로 그린 작품이다.

다빈치의 작품은 직사각형 식탁에 예수님이 정중앙에 있고 다른 제자들이 빙 둘러 예수님을 바라보는 구조다.

하지만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은 원형식탁에 둘러 앉은 구조요 14명의 제자를 그려놓고 있다.

그 속에 검은 복장을 한 채 뒤를 돌아보며 포도주 성찬을 건네주는 인물이 루터다.

루터의 포도주 성찬을 받은 제자는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들인데 그도 화가였다.

루터 옆에 있는 검은 복장을 한 인물은 루터의 독일어성서를 최초로 인쇄한 인쇄업자 ‘한스 루프트’(Hans Lufft)다.

루터를 연구한 최주훈 목사는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모두 익명의 비텐베르크의 주민이자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루터(1483∼1546)에 대해 한 가지 고민할 게 있다.

1520~30년 개혁 침체기 당시 루터는 사망하기 3년 전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Von den Juden und ihren Lügen)을 집필했다.

그 책을 통해 루터는 유대인을 향한 일곱 가지 실천 사항을 제시했다.

첫째, 유대인들의 회당을 불태워라.

둘째, 유대인들의 집을 부수고 파괴하라.

셋째, 유대인들의 종교서적, 기도서나 탈무드를 빼앗으라.

넷째, 유대인들의 랍비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라.

다섯째, 유대인들의 통행 보호를 폐지하라.

여섯째,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금지시키고 그들의 모든 돈과 은이나 금과 같은 보석을 뺏으라.

일곱째, 젋고 강한 남녀 유대인들에게 손에 도리깨, 도끼, 곡괭이, 삽, 실패, 물레를 쥐게 하고, 코가 땀에 젖을 때에야 비로소 빵을 얻게 하라.

이런 루터의 ‘반 유대주의’ 사상은 400년이 지난 후 전 세계적인 유대인 핍박 사건으로 이어진다.

세계 2차 대전 중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던 히틀러와 나치당 소속의 독일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며 ‘유대인을 탄압하는 것에는 종교적 이유가 있고 긍정적인 성경 교리와 함께 한다’고 합리화했다.

나치는 자신들의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는데 루터를 이용한 것이다.

나치들은 1933년 루터 탄생 450주년을 루터 교회에서 기념하며 축하하기도 했다.

 

 

[참고도서]

장수한,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한울, 2016.

제임스 레스틴, 〈루터의 밧모섬〉, 서미석 옮김, 이른비, 2016.

롤런드 베인턴, 〈마르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생명의말씀사, 1996.

볼프강 비퍼만, 〈루터의 두 얼굴〉, 최용찬 역, 평사리, 2017.

로드니 스타크,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손현선 역, 헤르몬, 2018.

존 딜렌버거 엮음, 〈루터 선집 - 종교개혁자 루터의 에센스〉, 이형기 옮김, CH북스, 2017.

정기문,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 푸른역사, 2019.

 

 

 

루터의 생애를 따라가는 독일 여행코스

프랑크푸르트 공항→하이델베르크→보름스: 129km, 1시간 34분

아이슬레벤→아이슬레벤 안드레아스교회St. Andreaskirche→만스펠드→에르푸르트대학→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Augustinian Monastery:104km, 1시간 40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비텐베르크대학→비텐베르크 슐로스교회Schlosskirche:200km, 2시간 20분

비텐베르크 슐로스교회→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St George's Church):270km, 3시간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교회→프랑크푸르트 공항: 198km, 2시간

루터에 관해 더 생각해야 할 점들

1.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교회 문에 붙이지 않았다?

루터는 당초 가톨릭 교회를 뒤엎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 생각을 조금도 품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의 95개 논제를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썼을 뿐만 아니라 비텐베르크 교회의 대문에 95개 논제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동료 성직자 및 학자들과 토의하기를 원했기에 95개 논제를 면벌부 판매를 주관하는 마인츠 주교에게 보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루터가 비텐베르크교회에 95개 논제를 붙인 게 됐을까?

2. 95개조에서 제기한 문제는 결코 새로운 게 아니었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주창하기 이전에 보다 열성적으로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영국의 위클리프나 보헤미아의 후스가 그들이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부조리를 공격하면서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전거라고 주장하고 그들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인생을 걸고 싸웠다.

루터의 면벌부 공격도 결코 새로운 게 아니었다.

루터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16세기 유럽 최고의 지성인으로 인문주의의 왕으로 불렸던 에라스무스는 1511년에 발표한 〈우신예찬〉에서 면벌부 문제를 진지하게 다뤘다.

그의 문장에서 95개 테제의 핵심적인 내용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또한 1513년 이전에 나온 에라스무스의 〈추방당한 율리우스〉라는 작품은 교황이 많은 죄를 짓고 또한 독단을 행하고 있음으로 그 죄악이 너무나 커서 천국 문 앞에서 베드로에게 쫓겨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우신예찬〉이나 〈추방당한 율리우스〉를 살펴보면 분명 에라스무스는 교황과 성직자들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를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3. 루터는 어떻게 루터가 될 수 있었나?

누군가 루터의 95개 논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세상에 전파됐고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가톨릭의 주요 지도자들은 루터라는 반항아가 성가신 문제를 제기했다는 걸 알았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제시할 때 가톨릭교회를 전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추론이 맞는 것은 루터 자신의 목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죽기 1년 전인 1545년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의 주장을 시작할 당시 나는 수도사였고 가장 열성적인 교황주의자였다.

내가 그러한 소요에 빠져들게 된 것은 내 의지나 의도가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루터가 문제 제기자에서 개혁가로 변모하게 된 것은 언제일까?

1517년 이후 가톨릭 지도자들의 박해를 받으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바로 몇 년 전에 에라스무스가 면벌부 판매를 비판했을 대 별로 반발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라틴어로 쓰였고,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지식인들 뿐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경우는 달랐다.

루터가 95개 논제를 게시한 후에 누군가가 95개 논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대학밖에 알리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많은 대중들이 면벌부 판매의 부당성에 동감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발표와 달리, 루터의 95개 논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발표하게 된 그때의 일은 교황과 고위성직자들이 엄청난 돈을 벌고 있을 때에, 그들의 행위를 정면으로 비난한 꼴이 됐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일들로 인해 루터는 역사 속에 루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기문의 〈14가지 테마로 즐기는 서양사〉(푸른역사·209)

 

루터와 종교개혁 역사를 둘러싼 루터에 대한 최종 결론

1.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자가 되고자 한 건 아니었다.

2. 루터는 법률가에서 수도사와 신학자가 되고자 할 뿐이었다.

3. 그 후 사제 서품을 받고 신학공부를 하며 성경의 진리를 깨달았다.

4. 그때부터 교황의 권위나 면벌부 판매가 그릇됨을 알게 된 것이다.

5. 다만 루터는 교황권에 도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료 성직자 및 학자들과 논의하고자 95개 논제를 쓴 것이다.

6. 물론 95개 논제도 루터가 독창적으로 주창한 게 아니라 위클리프나 얀 후스의 사상 그리고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과 '추방당한 율리우스'를 통해서 나온 것을 토대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7. 이런 과정 속에서 루터가 개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로마 가톨릭의 탄압 때문이다.

8.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그 주변 지도자들이 루터를 보름스로 부르지 않았다면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신학자요 설교자로 묻혔을 것이다.

9. 그리고 또 하나 루터를 개혁자로 만든 것은 라틴어로 쓴 95개 논제를 누군가 독일어로 번역하여 인쇄하여 배포한데서 촉발된 것이다.

10. 더욱이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인쇄한 덕분에 명실상부한 종교개혁자의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11. 물론 유대인들을 혐오한 그의 글로 인해 나치가 유대인 탄압과 학살을 하는데 정당성을 가져오게 된 역사적인 오점도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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