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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은 유월절 전날 밤의 일이었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그 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것으로 기록돼 있죠.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최후의 만찬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단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만 기록돼 있습니다. 어쩌면 최후의 만찬을 우상시하는 당대의 풍토를 제외시키기 위한 사도 요한의 의도였을 수 있죠.
그러나 우리는 그날 밤에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이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으로 그 흐름을 종합할 수 있죠. 더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13장에서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주님께서 16장에 이르기까지 제자 강화의 시간, 곧 제자들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강론하시는 시간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17장에 이르러 하나님을 향해 주님께서 간구하는 모습과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어 18장에 이르러 주님께서 감람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신 뒤에 체포당하시고, 날이 새서 심문을 받고, 이어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장면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제 살펴본 것처럼 당신의 사람들,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목숨 다하기까지 사랑하신 것이고, 또 그것은 제자들이 어떤 상황에 변할지라도 당신은 그들을 품으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신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는 주님을 팔려고 하는 가롯 유다까지도 사랑으로 품으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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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어제 하신 말씀이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사랑으로 품으셨지만 그 중에 누가 자신을 팔 자인지 알고 계셨죠. 그러나 그런 자라 할지라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심중에 괴로운 마음은 표현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것이었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런 욕망의 길에서 돌이키라는 것 말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서로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 오늘 본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식탁이 놓여 있고 빙 둘러 음식을 먹는 상황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란 명화에는 흰색 테이블 커버가 덮여 있는 일자형 테이블이 놓여 있죠. 거기에 예수님께서 중앙 의자에 앉아 있고, 제자들은 양 옆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죠. 지극히 서양식 식사 현장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식사하는 모습은 다릅니다. 그들은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합니다. 왼팔로는 몸을 바치고, 오른 손으로는 음식을 먹는 모습 말입니다. 그래서 높지 않는 낮은 식탁에 음식이 놓여 있는데 ㄷ자 모형의 식탁이죠. 거기에 예수님과 몇 명의 제자가 중간 쪽에 누워서 먹고 있고, 나머지 제자들은 좌우측에 누워서 함께 먹는 장면이었겠죠.
본문 23절에서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하나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밝혀줍니다. 과연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누구였을까요? 오늘 본문 이외에도 요한복음 19장 26절, 요한복음 20장 2절, 또 요한복음 21장 20절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는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네 어머니다”하고 부탁을 했던 것이죠.
그렇게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을 때, 베드로가 눈짓을 주죠. 그가 누구인지 말씀해 보도록 네가 재촉해 보라고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눈치를 채셨는지 26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하고 말이죠. 그리고서는 가롯 유다에게 그것을 주셨습니다. 그때 사탄도 가롯 유다 속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해 주고 있죠.
이 부분이 참으로 신기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확히 말해 사탄이 아니라 사탄의 하수인인 귀신이거나 악한 영이겠죠. 그 악한 영이 가롯 유다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악한 영이 사람의 몸에 들어갔다면, 그렇다면 그 악한 영은 사람의 몸 밖으로 나와야만 그가 온전해 질 수 있는 법이죠. 이것은 가롯 유다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땅에 귀신 들린 자,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를 향해 축사사역, 귀신이나 악한 영을 내쫓는 사역을 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이때 그의 의지가 발동이 돼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가롯 유다는 전혀 그럴 의지가 발동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그쪽 방향에 몰입해 있는 상태라 악한 영이 가롯 유다를 질질 끌고 다니는 입장이 돼 버린 것이죠. 그래서 그가 주님께서 주신 떡 조각을 받고 나갔을 때 밤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간 후에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본문 31-38절까지 당신의 제자 강론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 운을 떼신 게 그것이죠. 본문 33절 말씀처럼 이제 잠시 너희들과 함께 있지만 나는 떠나간다는 것이죠.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십자가 위에 당신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놓기 위해 죽으러 가시는 걸 말씀한 것이죠.
그러면서 더욱 중요한 핵심을 말씀하십니다.본문 34-35절 말씀이 그것이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말이죠. 어떻게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까?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실 정도로, 손수 모범을 보이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배반할 가롯 유다까지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2천년전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오고 오는 모든 세대를 향해 예수님은 사랑해 주셨죠. 바로 그것처럼 너희들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너희가 나를 본받아 사랑하는 그 삶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사랑하는 그 시발점이 내게 있고, 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면, 사랑의 열매를 통해 사람들이 너희들을 통해 나를 바라보게 될 것이란 말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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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그 강론을 들은 베드로는 어떤 관점을 갖고 이야기합니까? 본문 36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바로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꼴이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그 관점보다 지금 주님께서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거기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베드로죠. 왜죠? 자기 과시를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라갈 수 있다는 자기 과시 말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향한 사랑이지 않습니까?, 하는 자기 열심을 향한 자랑이죠.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38절 마지막 절을 통해 이렇게 일러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네가 네 열심과 네 능력만을 믿고 나를 좇는다는 것,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오직 주님의 사랑을 덧입고, 주님께서 사랑하신 방식을 따라 사랑하고 좇아야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방식은 3년 공생애 동안 낮고 천한자들, 병든 자들, 세리와 창녀들까지 품은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할 제자들까지 끝까지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최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에 힘입을 때에만 주님의 그 사랑으로 주님을 좇고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에 비해 베드로에게는 아직 그 사랑이 없다는 것이죠.어떻습니까? 베드로에게만 주님의 그 사랑이 없습니까? 아니죠. 오늘 우리들에게도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주님의 그 사랑 아닙니까? 그렇기에 오늘도 주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실 때, 우리가 기꺼이 주님의 제자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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