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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른바 당신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유대인들은 종려주일에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찬송합니다. 우리 왕이시여’하고 열광했죠. 그저 눈에 보이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이룰 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해방은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죠. 그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친히 내어놓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한 알의 밀알로 말씀하신 바요, 친히 이 땅에서 “들려야” 한다고 32절에서 말씀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올 수 있고,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 뭇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는 한 알의 밀알이자, 모세의 구리뱀처럼 들려야 할 존재요, 또한 영생을 위한 빛이라고 말씀하신 뒤에, 곧바로 “숨으셨다”고 36절에서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숨으셨던 것입니까?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죠. 요한복음 6장 15절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적을 맛본 후에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삼고했던 때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피해 홀로 산으로 떠나가셨죠. 이번에도 예수님은 그 때문에 ‘숨으셨던 것’입니다. 왜죠? 그들이 이번에도 그런 뜻으로 예수님을 원했기 때문이죠.
어떻습니까? 이런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혹여 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까? 나도 내가 무언가를 이 땅에 갈망하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모셔 오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억지로라도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갈망하고 또 갈망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예수님은 숨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에 그 침묵을 깨트리고 응답하기 위해 찾아오신다는 사실이죠. 사실 이집트의 노예로 400년간 살 때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숨으셨습니다. 이른바 침묵하신 것이었죠. 또한 남 유다가 멸망하고 신약시대가 오기 전 400년의 중간기 시절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습니다. 그 역시 숨으신 것이었죠. 왜냐하면 그 백성들의 완악함을 아신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많은 뜻과 마음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트리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침묵을 깨트리고 당신의 백성에게 찾아오신다는 점이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400년간의 침묵도 하나님께서 직접 깨트리셨고, 또 중간기 400년간의 침묵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깨트리고 찾아오셨습니다. 더욱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의 침묵을 성부 하나님께서 깨트려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신 그 빈자리도 성령 하나님이 채워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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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침묵하심 속에서 묵묵히 그 분의 뜻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믿음의 삶을 깊이 돌아보는 것이죠. 그렇게 그 분을 갈망하고, 그 분을 바라며 간절히 기다릴 때,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침묵을 깨트리고 찾아오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람들은 침묵과 기다림의 순환과정을 통해 믿음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이죠.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찾아오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38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아하고 장엄하고 화려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부족한 모습의 왕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인류를 위해 친히 낮아지고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고귀한 사랑을 지닌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그 분을 예고하면서 “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하고 이사야서 53장 2절에서 선포했던 것이죠. 그때 선포된 말씀의 주인공이 우리 예수님 아니십니까? 그만큼 예수님의 언약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당신의 말씀으로 친히 찾오셔서, 우리의 침묵을 깨트리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죠. 요한복음 1장 11-13절을 통해 이미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유대인들에게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을 맞이해 수많은 사람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는 그토록 열광하던 그들이, 불과 닷새 뒤에 힘없이 체포당하여 대제사장의 법정에 끌려가시는 모습을 보고서는 어떻게 합니까? 다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난동을 피우지 않았습니까? 왜죠? 자신들의 본성을 만족시켜 줄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자신들의 기대감을 채워줄 분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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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본문 42-43절을 보면 유대 관리 중에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꽤나 있었음을 증언해 줍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유대 관리 중에도 주님을 믿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출교를 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때문에 당당하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른바 지금 당장의 현실세계에 대한 전통과 세상 시류의 관점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만큼 육신을 지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비단 그와 같은 유대 관리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죠.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얼마든지 그런 연약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 안에 살고 싶고, 철저히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영광을 돌리고 싶지만,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하며 살고 있고 세상을 등지고 산다는 게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 자신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나를 책망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를 내치셔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본문 45절을 통해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이게 주님의 본심이고, 본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고, 깨닫는 자와 깨닫지 않는 자를 분리시키고,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를 나누는 기준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신 참된 복음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죠. 우리 주님은 유대 관리들의 유약한 믿음을 비난한 게 아니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기준 제시를 통해 비난 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구원을 목적으로 하시기 때문이죠. 그 분의 구원은 오직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죠. 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자기 생명을 내 놓으신 것이죠. 그래서 구원과는 거리가 먼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던 것이고요. 그만큼 복음은 때를 기다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는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는 때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데에는 그만큼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시고 우리 각자에게 찾아오실 때에도 당신의 뜻이 있다는 것이죠. 그처럼 복음은 때를 기다리는 것이요, 그 기준과 때는 하나님만이 정하신다는 것을 온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로운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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