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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굶어본 자가 풍성한 식탁과 빈약한 식탁 사이에 놓인 그 간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맞아본 자가 때릴 수 있는 위치와 맞는 위치 사이에 놓인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죠.
빚을 져 본 자가 빚 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자와 빚을 갚아나가는 그 사이의 간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죽을 뻔한 자가 삶과 죽음을 갈라놓은 그 차이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바로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사제였지만 개신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개신교의 영성을 위해 개신교 출판사에서 그가 쓴 책들을 많이 번역해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나우웬은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감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장애인들이 살고 있는 남미의 ‘라르쉬’로 떠났습니다.
가진 능력도 지위도 모든 신분도 다 내려놓고 장애인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 함께 삶을 나눴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64세의 일기로 천국으로 떠난 사람이죠.
(깨달음)그가 쓴 〈상처받은 치유자〉란 책이 있습니다.
어떻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 치유자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굶어본 사람, 맞아본 사람, 빚을 져 본 사람, 죽을 뻔한 사람, 그런 사람들은 모두가 누군가의 치유자가 될 수 있는 법이죠.
자신이 고통을 당한 만큼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보듬어 안아줄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굳이 끌어들일 필요는 없지만 상처를 겪는 것 자체로는 결코 나쁘지만은 않는 일이 되는 것이죠.
대부분은 실용주의적 세계관을 갖고 기도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헨리 나우웬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침묵, 고독, 상처, 환대, 안식, 그리고 하향성 등을 내세우며 연약하고 부족해도 주님과의 친밀감 속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뭔가를 가지기 위해, 뭔가를 채우기 위해, 뭔가를 높이 올라서기 위해,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었던 것이죠.
오히려 뭔가 빠져나가고 손해보고 상처를 받아도 자리에서 내몰려 더 내려간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도 주님과의 친밀함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말이죠.
종국에는 그 길 속에서 누군가의 위로자요 공감자요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용)바울도 실은 상처받은 치유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대적자요 교회의 박해자였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으로 변신하죠.
하지만 누구 하나 그가 그리스도인 됨을 믿어주지 않을 때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경건훈련을 거치면서 구약의 메시아가 주님임을 다시금 깨닫고 참된 진리를 알게 되죠.
그 이후에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을 전하지만 그가 유대교의 변절자임을 알게 된 이들이 죽이려하자 고향 다소로 내려갔죠.
그곳에서 7년간 칩거하며 밑바닥 삶을 살면서 한 없이 내려갔지만 그 속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끽하죠.
청춘의 꿈을 안고 예루살렘에 유학갔던 그가 졸지에 고향에 낙향했으니 다들 실패자 인생이라고 손가락했겠지만 주님은 그 밑바닥 자리에서 그 심령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급기야 44살의 나이에 안디옥교회의 목회자였던 바나바의 초청으로 바울은 그때부터 공동목회자가 된 것이죠.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성령님의 이끄심 속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선교여행을 떠났죠.
이후에 2차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바나바는 조카 마가를 데리고 떠났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났는데 그곳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유럽대륙을 향해 배를 타고 건너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게 되었죠.
그때 세우게 된 교회들이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고린도교회 등이었죠.
이후 3차 전도여행을 나서는데 바울은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죠.
그 모든 선교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성령님은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죠.
그렇지만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다며 예루살렘으로 향했죠.
그러자 바울은 그곳에서 체포당했고 가이사랴 감옥에 2년간 갇혔고 이후 로마로 이송돼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로 2년간 갇히게 되었죠.
그때 바울이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에 처해 있을 때 비록 몸은 매여 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은 만날 수 있도록 자유를 줬죠.
로마의 성도들도 바울을 찾아와고 그 전에 만났던 동역자들도 각 교회를 함께 세웠던 사람들도 또 교회의 문제를 안고 해결책을 받고자 바울을 찾아온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각 교회의 문제를 해결토록 했고 더욱더 믿음으로 굳게 서도록 편지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그 모습 역시 바울은 상처받은 치유자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로 모든 신분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한 없이 낮아진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스스로 그렇게 내려간 자리였으니 말입니다.
그 속에서 얽매이게 되었지만 자신을 찾는 교회 대표자들에게 교회의 문제를 안고 오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소망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하나님나라 때문에 교회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것이 상처받은 치유자로 주님께서 세워주시는 과정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역배)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로마의 가택연금상태에 있을 때 교회 문제로 자신을 찾아온 대표자들에게 몇 몇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그것이었습니다.
그중에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에베소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church)가 돼야 함을 일깨우고자 쓴 편지입니다.
물론 이 에베소서는 에베소 교회만 읽도록 쓴 게 아니라 에베소를 넘어 소아시아의 7교회 모두가 함께 회람하도록 쓴 편지입니다.
그만큼 소아시아의 7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는 하나님의교회가 되라는 뜻으로 쓴 것이었죠.
그렇다면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하심을 좇아 서로 사랑하며 교회를 세우는 것’이죠.
바로 그 사랑을 일깨워주기 위해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물론 또 다른 목적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의 경륜을 알려주고자 쓴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엡1:5, 엡1:11) 가운데 있는 은혜라고 말이죠.
그러니 누구든지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자랑치 말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서로가 성전이 되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져 가라고(엡2:22) 말이죠.
그래서 썩어가는 옛 구습을 따르지 말고 의와 진리의 새 사람을 입으라고(엡4:24) 권면합니다.
그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적인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과 영적인 싸움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런 점들을 일깨우고 위로하고 권면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를 위해 바울은 쇠사슬에 갇힌 사신이 된 심정으로(엡6:20) 이 편지를 두기고 편(엡6:21)으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낸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만큼 바울이 이 편지를 써 보내는데 그들이 귀담에 듣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는지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에베소의 데메드리오 구리세공업자가 일으킨 난동 때문에 쫓겨난 일도 있다는 것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 하나 하나가 성령님의 음성으로 다가왔고 그들에게 위로와 권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주의 깊게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원해)여기에 바울이 ‘갇혔다’는 단어를 썼는데 헬라어로는 ‘데스모이스’(δέσμιος)입니다.
‘묶이다’(bound) ‘포로자’(a captive) ‘죄수’(마2:15막15:6) ‘수감자’(a prisoner히13:3)를 뜻합니다.
(깨달음)죄를 짓고 수감된다면 응당 그 벌을 받는 게 마땅한 일이죠.
공금을 횡령했다면, 남의 돈을 사기쳐서 빼앗았다면, 중대 교통법규를 어겼다면, 그에 따른 형사처벌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지금 바울은 ‘주 안에서 갇힌 나’라고 다시 말해 주님을 위해 주님 때문에 주님에 의해 갇힌 자임을 밝힌 것입니다.
(원성)바울이 감옥에 얽매이고 갇히게 된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것임을 여러번 성경에 밝힙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엡3:1)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몬1:9)
바울은 자신이 법을 어기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갈취해서, 일반 법정의 판결을 위해 갇힌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갇힌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깨달음)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님을 위해 갇힌 바울이었지만 바울은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상태 속에서도 교회를 위해 복음의 편지를 써 내려가며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바울도 상처받은 치유자 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복음을 위해 굶어본 자로서 풍성한 식탁과 빈약한 식탁 사이에 놓인 그 간격을 이해하고 격려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매를 많이 맞아 본 자처럼 때리는 자의 위치와 맞는 자의 위치 사이에 놓인 그 아픔을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바울이 복음에 빚진 자로서 오네시모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채주되는 빌레몬에게 그의 빚짐을 이해달라고 충분히 말 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기에 누군가 복음 때문에 돌팔매질로 죽음 당할 때 충분히 위로하고 격려해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적용)그것이 바로 복음 때문에 갇힌 바울이 편지를 써 보낼 때 이 편지를 읽은 에베소교회 성도들과 소아시아 7교회 성도들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위로와 힘이 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내가 그런 아픔을 겪고 그 아픔을 통과한 상태라면 지금 누군가 나와 똑같은 아픔을 지나는 중이라면 얼마든지 위로자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예전에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 어느 권사님에게 돈을 빌릴려고 했는데 담임목사님이 그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절대로 성도에게 돈을 빌려서는 안된다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영적인 권위를 잃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려왔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제게 그런 말도 해 줬습니다.
자신의 성도 중에 빚을 진 자가 있었는데 그 빚을 해결하고자 친한 권사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빚을 빌려준 이후에 도무지 갚지 않아 늘 그 분 얼굴만 보면 권사님의 인상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님은 누군가 빚을 빌려달라고 할 때 자신에게 없으면 주지 않지만 여유가 있을 땐 못 받을 걸 생각하고 빌려준다는 것이죠.
그러면 있는 없든, 돌려 받든 못 받든, 그 당사자를 대하는 태도가 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서울에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렇게 말씀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교인 간에 빚을 내서 빚을 갚을 때의 심정도, 그리고 빚을 빌려줄 수 없을때의 그 마음도, 그리고 다 갚았을 때의 그 시원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적용)세상의 돈에 대한 빚도 다 탕감받아 본 사람만이 지금 빚진 자의 심정을 어느 정도 공감하며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빚을 다 청산하고 자유인이 되었을 때 그도 상처받은 치유자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지금 바울은 복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때문에 복음의 빚진 자로서 갇힌 신세속에서 복음의 편지를 써 보내고 있으니, 주님께서 그를 상처받은 치유자로 기꺼이 위로하고 권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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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복음의 빚진 자로 살 때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치유자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헨리 나우웬도 모든 직위 모든 권위를 다 내려놓고 장애자들의 공동체로 들어가 남은 생을 살면서 상처받은 치유자로 살지 않았더냐?”
“그가 주님을 위해 스스로 고통의 자리로 내려갔기에 지금도 그의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주님 안에서 위로받고 소망을 받는 것 아니겠느냐?”
“바울이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매맞고 굶주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일이 있기에 그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편지를 써 보낼 때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위로와 새 힘을 주는 것 아니겠느냐?”
“너도 네 삶에 겪는 아픔과 고통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너를 상처받은 치유자로 사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예수님 대문에 세상에서 상처받고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누군가 그런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굶주림에 처했다가 그 터널을 지나 동일한 굶주림에 처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마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힘든 가운데서도 주님께 작정한 것을 드렸을 때 주님게서 너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그 은혜를 누군가에게 나눴을 때 힘든 가운데 있는 주님의 자녀를 주님께서 위로하고 소망을 주지 않겠느냐?”
“네가 복음 때문에 갇힌 바울처럼 복음 때문에 외톨이가 되고 따돌림을 받았다면 누군가 그런 처지에 있는 크리스천에게 얼마든지 상처받은 위로자요 격려자로 주님께서 너를 사용하지 않겠느냐?”
“주님은 지금도 너의 고난과 고통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자요 격려자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너는 부유해도 가난해도 너를 사랑하여 구원했으니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네가 현명해도 미련해도 너의 지혜되어 사용하리니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너는 잘났으나 못났으나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네가 강하여도 약하여도 너의 힘이되어 일으키리니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네가 의로워도 악하여도 너를 나의 피로 바꾸었으니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예화)안인모가 쓴 〈루브르에서 쇼팽을 듣다〉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하루 한 장의 그림과 그에 어울리는 음악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 중에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라는 그림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보시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죠.
여러분은 이 그림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한 여성이 소풍을 나와 앉아서 저 뒤편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림처럼 보입니까?
사실 이 그림은 퇴행성 근육 장애를 갖고 있는 크리스티나 올슨이라는 여성의 뒷모습을 보여주죠.
물론 실제 인물입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드넓은 풀밭 뒤편의 자기 집이죠.
하반신 장애를 겪고 있었으니 보행과 이동에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그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력으로 자기 의지를 다해 자기 집으로 기어가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 집을 바라보면서 기어가려고 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 살고 있던 앤드루 와이어스라는 화가가 그림으로 그린 것이죠.
이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앤드루 와이어스는 무명의 작가에 불과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누군가에게 그림을 배운 적도 없이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였죠.
그런데 이 그림을 뉴옥 현대 미술관에서 구입하자 일약 스타 화가로 급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다른 유명한 화가들은 이 그림을 그린 앤드루 와이어스를 혹평하고 무시했습니다.
하지만 왜 뉴옥 현대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구입해 평생 보관하며 전시회 작품으로 내놓으려 했는지 알 수 있죠.
하반신 마비를 겪고 있는 실제 인물이 휠체어나 보조기구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을 기어서 집에 가려는 그 모습이 감동을 주고 희망을 주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깨달음)바울이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히지 않고 그냥 밋밋한 편지를 썼다면 어찌 그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위로하시는 신약성서가 되게 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헨리 나우웬이 예일대와 하버드 교수직을 내려놓고 남미 장애자 공동체로 내려가 그 속에서 살면서 편지를 써서 보냈기에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도록 성령님이 역사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퇴행성 근육장애를 안고서도 온 의지를 다해 자기 집으로 기어가는 그 모습을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앤드루 와이어스가 그림으로 남겼기에 절망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명작으로 삼게 된 것이었죠.
(적용)자식이 없어 말반 동동구르다가 10년 만에 자식이 생기면 그 자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누군가 그런 처지 속에 있는 부부들에게 위로와 격려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죠.
수년간 남편의 외도로 고통의 세월을 보낸 아내가 그 위기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내고 그 과정을 통과했을 때 누군가 그런 위기 속에 있는 가정에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도록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겠습니까?
남편의 실직으로 먹을 끼니가 없을 때 현숙한 아내가 나서서 생계를 유지하고 그 어려운 과정을 통과할 때 누군가 실직한 남편을 둔 그 아내에게 그 역시 상처받은 치유자로 주님께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로스쿨 재학 김동현 청년이 10분의 시력교정수술을 받다가 시력을 잃었다가 10년만에 시각장애인 판사가 됐을 때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무엇인지 주님께서 실감나게 역사하시고 위로를 주지 않겠습니까?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말씀 앞에서 내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퇴행성 근육 장애를 갖고 있는 그 여성이 자기 집을 향해 기어가려는 것 자체만 봐도 누군가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 같아요.”
“10분이면 된다는 시력교정수술을 받다가 졸지에 시력을 잃는 김동현 청년이 10년만에 시각장애인 판사가 됐을 때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주님은 위로와 소망을 불어넣어주실 줄 믿어요.”
“결혼했지만 10년간 자식이 없다가 처음으로 자식을 낳았을 때 그 부모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불임부부의 삶을 겪고 있는 부부들에게 주님은 소망과 위로를 불어넣어주실 줄 믿어요.”
“바울도 주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다가 감옥에 갇히게 됐지만 그를 통해 그 교회 성도들에게 상처받은 치유자로 주님께서 위로하고 소망을 불어넣어주실 줄 믿어요.”
“주님. 내가 그런 어둠과 힘든 터널 속에 있다면 그것은 나만을 살리시려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어려움 속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치유자로 나를 사용하실 줄 믿어요”
(찬양)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세상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 은혜로 나를 돌보시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하늘 보좌의 기득권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사셨기에 오늘 우리의 아픔도 공감하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실 수 있는 것이죠.
헨리 나우웬이 그런 고난의 자리로 내려갔기에 누군가 그런 고난 속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상처받은 치유자로 주님이 사용하신 것이었죠.
바울이 복음 때문에 교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당한 핍박으로 감옥에 갇혔기에 누군가 고난의 자리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상처받은 치유자로 주님이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선천성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를 안고 있지만 그 의지를 다해 자기 집으로 기어가는 크리스티나 올슨의 모습을 통해 절망 중에 있는 누군가의 위로자가 될 수 있도록 상처받은 치유자로 주님은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 남이 알지 못하는 절망과 고통의 터널을 내가 지나고 있다면 그 역시 주님의 위로자요 격려자로 주님의 상처받은 치유자로 우리를 친히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런 은총의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절망 중에도 주님을 바라보는 은혜를 더해주시도록 주님께 다짐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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