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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발췌)2005년 1월 국내 산악계에서 촉망받던 박정헌과 최강식은 네팔 히말라야로 향합니다.
햇빛 한 점 없는 강추위와 칼날 같은 바람이 몰아칩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빙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나 사흘간의 여정 끝에 그들은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룹니다.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룬 것은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은 5m 길이의 생명줄이었습니다.
그 로프로 서로의 몸을 연결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정상에서 내려오는데 박정헌은 크레바스라고 얼음벽이 갈라진 곳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때 박정헌은 그 뒤에 오는 최강식에게 “강식아, 크레바스다 조심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최강식이 크레바스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짙은 안개 때문에 발을 헛디뎌 눈을 밟고 미끄러진 것이었죠.
그때 최강식은 줄에 동동 매달려있었습니다.
위에 있는 박정헌도 힘을 내어 끌어올리려 해도 힘에 부쳤습니다.
아래 있는 최강식은 도무지 혼자서 벽을 기어오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위에 있는 박정헌은 갈비뼈 2개나 부러졌습니다.
최강식은 몸무게가 78Kg였는데 짐까지 더하면 90kg였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그 외딴 곳에서 삶과 죽음의 사투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박정헌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 줄을 끊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차피 나는 갈비뼈가 부러졌고 강식이는 다리가 부러졌는데 올라오지도 못할 것 아냐?”
박정헌은 줄을 끊어야 한다는 유혹과 최강식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박정헌은 둘을 연결하는 끈을 끊지 않고 함께 살거나 함께 죽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3시간 사투 끝에 박정헌은 후배 최강식을 절벽에서 끌어올리게 됩니다.
둘은 올라오자마자 얼음 조각을 씹으며 갈증을 삭힌 뒤 시체처럼 널브러졌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의지하며 기다시피하며 5일 만에 어느 네팔 노인의 집에 다다랐다는 것입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왔는데 동상으로 언 손가락과 발가락을 대부분 잘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신뢰한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죠.
(깨달음)그런데 그런 줄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옥의 크레바스에서 있는 나를 건져주기 위해 예수님의 끈을 나에게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내가 죄의 유혹에 빠져 은혜의 줄을 놓으려 할때도 주님은 더욱 단단하게 붙잡아 나를 수렁에서 끌어 올려주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때론 나보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붙들어 끌어올리는 사랑의 끈으로 주님은 사용하신다는 사실이죠.
(적용)그만큼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생명의 끊으로 하나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610049
(역배)그리스도인의 대적자요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누구도 믿어주지 않자 아라비아 광야로 3년간 경건훈련을 하죠.
그때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가 자신이 만난 예수님임을 깨닫고 참된 진리를 알게 되죠.
그 후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을 전하지만 유대교의 변절자로 알고 그를 죽이려 하자 바나바의 도움으로 고향 다소로 가죠.
그곳에서 7년간 칩거하며 한없이 내려갔지만 성령을 체험하고 3층천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리죠.
7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나의 44살에 바나바의 초청으로 안디옥교회의 공동목회자가 되죠.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성령님의 이끄심 속에서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 후 2차여행을 나서는데 바나바는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나죠.
그곳에서 바울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유럽대륙을 향해 배를 타고 건너가 복음을 전하죠.
그때 세운 교회가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그후 3차 전도여행을 나서는데 바울은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죠.
이제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데 성령님은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감동을 주죠.
하지만 바울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목숨까지도 내어놓겠다며 예루살렘으로 향하죠.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당하고 가이사랴 감옥에 이송돼 2년간 갇히고, 그 후 로마 황제에게 상소해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로 2년간 갇히게 되죠.
물론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에 있을 때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은 만날 순 있었죠.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을 찾았고 전에 세운 교회 대표자들도 바울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교회의 형편을 묻고 그들에게 위로와 권면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때 쓴 편지가 옥중서신이라고 하여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빌레몬서였습니다.
바울이 가택연금에 갇힌 것은 불법적인 일이나 개인의 이득을 취하다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위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세우다가 그렇게 갇힌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편지를 받을 때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위로와 새 힘을 얻는 건 당연한 일이었죠.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주님을 위한 상처받은 치유자로 주님께 쓰임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하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상처받은 치유자로 주님은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4개의 편지를 써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오늘 읽은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church)가 돼야 함을 일깨웁니다.
물론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넘어 소아시아의 7개 교회 모두가 함께 돌려가며 읽도록 쓴 편지죠.
어떻게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보편적인 교회 통일성을 이루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주님의 사랑하심을 좇아 서로 사랑하며 교회를 세우는 것’에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게 에베소의 첫 번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려주고자 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엡1:5, 엡1:11) 가운데 있는 은혜라고 말이죠.
누구든지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자랑치 말고 그분의 은혜 안에서 서로가 성전이 되고 함께서 지어 가라고(엡2:22) 권면한 이유가 그것이죠.
그를 위해 썩어가는 옛 구습을 따르지 말고 의와 진리의 새 사람을 입으라고(엡4:24) 권면합니다.
그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런 점을 일깨우고 위로하고 권면코자 가택연금에 갇힌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갇힌 사신이 된 심정으로(엡6:20) 이 편지를 두기고 편(엡6:21)으로 써 보낸 거이죠.
(본문)오늘 읽은 본문 1-3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원해)바울은 주님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 가택연금 상태에 처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에베소교회 성도들과 소아시아 7개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할 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구원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성도답게 겸손하고 부드럽게 인내와 사랑으로 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길이니 그걸 위해 힘써 애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 안에서 평화의 끈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는데 ‘끈’은 헬라어로 ‘쉰데스모스’(σύνδεσμος)입니다.
‘함께 묶다’ ‘함께 붙이다’하는 뜻입니다.
뭔가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묶는 게 끈이고 하나로 붙이는 게 본드입니다.
실내화를 붙이는 게 본드요 고추가 비바람에 쓰러리지 않도록 지줏대에 묶는 게 밴드죠.
(깨달음) 바울이 왜 그 단어를 사용했겠습니까?
바울 자신도 율법을 마스터해서 산헤드린 의원이 되겠다고 꿈꾸던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했지만 누구 하나 자신을 교회에 붙여주고 묶어주는 이가 없었죠.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셔서 다메섹의 직가에 눈뜬장님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라고 하죠.
그때 아나니아는 사울이 얼마나 살기등등한 교회의 핍박자인지 잘 알고 있어서 거부하죠.
그러자 주님은 이스라엘과 임금들과 이방인을 위해 택함받은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해주시죠.
그때 비로소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찾아가 ‘형제여’하면서 안수했고 사울의 비늘이 벗겨지게 되죠.
(적용)처음 바울을 부르신 분은 주님이셨지만 바울이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도록 그를 묶어주고 붙여주게 한 사람은 아나니아였습니다.
물론 바울이 주님께 묶이고 붙이게 된 것은 그때 한 번의 일로 가능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 후 다메섹 사람들이 바울의 변화됨을 믿지 않자 아라비아 광야로 갔고 예루살렘에 다시 왔지만 고향 땅에서 낙향해야 했죠.
7년간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바나바를 통해 안디옥교회의 목회자로 성도들과 주님께 붙어 있도록 주님께 묶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처럼 주님께서 바울을 불러내주시고, 주님안에서 교회와 성도들과 묶이고 붙어 있도록 주님은 그때마다 사람의 끈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바울은 선교여행지마다 또 다른 동역자로 하여금 그 교회 성도들과 묶이고 붙어 있도록 믿음의 끈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쉰데스모스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원성)얼마 전에 새벽기도회 때도 살펴본 말씀도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 종종 나사로의 집에 들려 주무시기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만큼 나사로의 누이들 곧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잘 보필했던 것이죠.
그랬으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당장 예수님을 살려주도록 집안 사람을 보냈죠.
하지만 나사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이 있다면서 당장 가지 않고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가셔서 살려내주셨죠.
그 일로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이 있었죠.
그런데 그 집에 예수님께서 가셨을 때 마르다는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앉아 귀를 기울였죠.
그때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청을 넣어 동생에게 나와서 제 일을 도우라고 해 주세요, 했죠.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힘들어하지 말고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면 한 가지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지 않았느냐”(눅10:42)하고 말씀하셨죠.
(깨달음)그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마리아가 믿음이 더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받은 인물이 바로 마리아라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집에 오셨을 때 집안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을 믿음의 끈으로 연결시킨 인물은 마르다였다는 사실입니다.
마르다는 밥상과 음식을 준비한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집이나 어느 단체나 어느 교회나 음식을 준비하고 사람들의 먹을 걸 살피는 사람은 그 집의 어른이나 남을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족 구성원을 잇는 끈이자 집안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밴드자 본드임을 알기 때문이죠.
그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가족과 친척과 모임과 교회도 하나로 묶이고 붙어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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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래서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부르신 끈으로 하나가 된 것처럼 서로를 위한 주님의 끈이 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박정헌과 최강식이 히말라야 정상을 오른 후 내려오다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 그들이 3시간의 사투 끝에 살게 된 게 로프 곧 끈이지 않았더냐?”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도 수많은 영혼을 지옥의 크레바스에서 건져주기 위해 친히 생명의 밧줄로 끌어올려주시는 분 아니더냐?”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평안의 매는 띠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하는 것도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권면하는 것 아니겠느냐?”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눈뜬 장님으로 있을 때 주님께서 보내신 아나니아를 통해 눈을 뜨고 한 형제 자매가 되게 해 주지 않았더냐?”
“고향에 7년간 낙향해 있을 때 주님께서 보낸 바나바를 통해 바울이 주님과 성도들과 하나로 묶이고 붙어 있을 수 있게 된 것 아니더냐?”
“바울이 지금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서로가 서로를 향해 그런 쉰데스모스가 되라고, 서로를 붙잡고 이끌어주는 생명의 끈 사랑의 끈이 되라고 권면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지옥의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와 영생의 끈으로 하나로 묶이고 붙어 있게 된 것 아니더냐?”
“바울도 그 은혜를 덧입어 주님의 끈으로 주님의 도구로 살아온 것처럼 이제는 저도 주님의 쉰데스모스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누군가 힘들고 지쳐할 때 그를 위해 위로하며 격려하는 주님의 끈으로 말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왔을 때 마르다가 주님의 위한 끈을 잇고자 밥상과 먹을 차리듯 너도 네 가족과 형제들을 위한 사랑의 끈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네 회사 동료든지 네 전도대상자들이든지 누구든지 주님의 부르심을 위한 생명의 끈과 사랑의 끈이 될 때 주님께서 너를 더욱 귀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도 주님의 부르신 사랑에 응답하여 살아갈 때 주님께서 너를 기뻐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예화)영국에서 어느 목사님이 자기는 더 이상 기독교의 진리가 안 믿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설교 석상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는 사임을 해야겠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장로님들이 모이고 교인들도 모였습니다.
그때 장로님 중 한 분이 목사님께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때까지 너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듭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독교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는 그전처럼 이곳에 남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께서 의혹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저희에게 알려주십시오.”
“저희들은 목사님께서 그 진리가 믿어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 후 목사님은 본인이 믿지 못하는 것을 계속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성도들은 목사님이 믿지 못하는 메시지를 계속 들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서로가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교우들을 보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그 목사님은 언제부턴가 믿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들으니 교인들도 함께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목사님은 또 우는 것이었고요.
그때 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저를 기다려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허우적거릴 때 잠시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목사님의 믿음이 회복할 때까지 그 교회 성도들은 기다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성도들의 기다림이 실은 목사님을 회복시켜준 영적인 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정말로 보기 드문 교회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만약 그랬다면 여러분도 기다려주시겠습니까?(웃음)
(원성)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렇게 말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깨달음)사랑과 온유와 기다림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생명의 끈, 격려의 끈, 위로의 끈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그냥 모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하나의 끈으로 묶고 엮어서 하나 되게 하신 주님의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실수하고 잘못해도 잠잠히 기다려주는 믿음안에서 서로가 확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해)본문에 ‘힘써 지키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스푸다조’(σπουδάζω)인데 명령분사 현재형입니다.
지속과 반복이 없이는 힘써 지킬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 하나의 끈으로 묶어 붙여주신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애를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부도 남남의 모습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허니문 시절이 끝나도 평생을 애써야 하는 것이죠.
부부도 하나 되는 게 쉽지 않을진데 교회안에 한 공동체가 되어 서로 하나로 묶이고 붙어 있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를 위해 평생토록 애를 써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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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그 목사님이 믿음이 바닥이 났을 때 아니 믿어지지 않을 때 성뜰이 그 목사님을 기다려주었네요.”
“주님께서도 내가 주님을 불신할 때 주님은 제가 돌아설 때까지 기다려주셨을 것 같아요.”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고 모든 것을 견디며 기다려주는 것인 줄 믿어요.”
“성도들 속에 숨어계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그 목사님도 바르게 돌아선 줄 믿어요.”
“누군가 지쳐있고 힘들어할 때 내 믿음의 동료를 향해 묵묵히 기다려주고 격려하는 사랑의 끈으로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이 한 번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애를 써야 하는 일인 줄 믿어요”
“나의 기다림으로, 나의 섬김으로, 누군가 믿음의 길로 돌아선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주님. 부부도 함께 애써야 할진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저도 누군가의 믿음을 격려하는 일에 평생 애쓰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옥의 크레바스에 빠진 나를 생명의 끈으로 부르시고 묶어주신 분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우리가 이제 주님의 끈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서고 붙잡아 주길 원하고 계십니다.
최강식의 끈을 붙잡아준 박정헌처럼 말입니다.
바울의 손을 굳게 붙잡아 형제로 대해 준 아나니아처럼 말입니다.
누구도 믿지 않을 때 그를 공동목회자로 주님께 붙어 있고 교우들과 본드처럼 엮도록 해 준 바나바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그 목사를 향해 묵묵히 기다려준 그 교회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한 번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해야 할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생명의 끈을 붙잡게 해 주신 그 은혜에 빚진 자로 누군가를 붙잡고 세워주는 주님의 끈으로 쓰임받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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