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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3년 동안, 세 번의 유월절을 맞이하셨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은 두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죠. 그 기적의 장소가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 다시 말해 ‘디베랴 바다 건너편 산’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곳에 모여든 군중들, 여자와 아이들을 뺀 남자 장정의 수가 5천명이었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년 하나의 도시락 통 곧 그 속에 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그 모든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12광주리를 거두게 하셨죠.
그렇게 주님의 기적 육적인 포만감을 얻은 군중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주님을 억지로, 즉 강제로 끌고 와서 자신들을 위한 왕으로 삼고자 했죠. 그 정도로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놀라운 기적을 베푼 분이라면 이후에도 자신들이 필요할 때면 얼마든지 그 필요를 충족시켜주도록 요청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산으로 홀로 가셨죠. 군중심리에 이끌린 그들의 요구는 자신들의 만족감을 채워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돌변한다는 사실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뭔가 육적인 필요만을 위해 주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육적인 필요가 채워지면 언제 그랬냐 싶게 주님을 저버리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 다시 말해 디베랴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다시 가셨는데, 그 군중들이 이번에는 그곳까지 따라온 것 아니었습니까? 그때 주님께서는 뭐라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셨습니까? “너희들이 지금 나를 좇아온 것은 나를 믿고자 함이 아니라 나의 표적과 기적을 보고 좇아온 것 아니더냐. 그러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해주셨죠.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마자도 너희들의 자의로 된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 속에 있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너희들은 그 옛날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만나를 먹게 된 그 일보다 더 큰 기적과 능력을 내게 요구하지만, 모세의 그 만나는 매일매일 먹어야 할 육적인 떡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할 것이다.” 하고 그들에게 진리와 생명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궁극적으로 말씀하신 게 무엇이었습니까? 어제 읽은 57-58절의 말씀처럼 ‘자신을 먹어야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산다’고 가르쳐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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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는 군중들은 그것이 이해가 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까? 아니죠.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 아닙니까? 왜냐하면 지금 그 말을 하는 예수는 자신들이 봐 왔던 요셉의 아들 예수요, 그 어머니 마리아도 자신들이 잘 아는데, 어떻게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미쳤거나, 혹은 엉뚱하거나, 둘 중 하나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그런 정도의 말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자들 아니었습니까? 그저 ‘내가 너희들의 왕이 되겠다.’ ‘내가 너희들의 부족함을 이제부터 채워주겠다’ ‘너희들의 꿈꾼 포만감과 부와 번영을 보장해 주겠다’하는 정도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엉뚱하게도, 혹은 무식하게도, 그리고 마치 미친 자처럼, ‘나의 살과 피를 먹어야 아버지와 더불어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야말로 그 군중들은 주님의 그 말씀을 끔찍하게 듣겠죠? 자신들의 기대와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때 그들이 보인 반응을 66절에서 이렇게 밝혀줍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어긋나자 그곳에 있던 수많은 군중들,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처한 이들이 모두 그 자리를 뜨는 상황이죠. 주님의 제자를 벗어나겠다는 뜻입니다.
왜죠?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많은 기적을 베푼 주님을 자신들이 만족을 채워줄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이 세상의 육신적인 만족 말입니다.
그때 제자들, 곧 주님의 부름을 받은 12명의 제자들은 어떻겠습니까? 다른 군중들과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처해서 나온 무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상황이니, 12명의 제자들도 흔들리는 상황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67절을 통해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 얼마나 제자들의 가슴을 치는 말씀이었겠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그들의 가슴을 치는 말씀으로 들려오지 않았겠습니까? 너희들도 저 군중들처럼 저들과 똑같이 육신적인 필요만을 위해 살겠느냐? 너희들도 너희들을 위해 내가 만족을 주지 않으면 곧장 나를 배반하고 돌아서겠느냐? 너희들의 원하는 바를 기어코 들어주지 않으면 언제라도 나를 등지고 떠나겠느냐?
이것은 곧 우리 자신, 나 자신을 향한 물음 아니겠습니까? ‘너도 너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으면 나를 버리겠느냐?’ ‘너도 너의 육신적인 필요를 내가 채워주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 떠나버리지 않겠느냐?’
그와 같은 주님의 물으심은 제자들을 향한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들만큼은 육신적인 필요만을 좇아 사는 자들, 그저 먹기 위해 살아가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자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 말입니다.
작고하신 가톨릭계의 구도자 시인인 구상 선생이 <그리스도 폴의 강-1>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존재를 그런 시로 표현했습니다.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을 저어 가듯 태백의 허공 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평생을 구도자로 살았지만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만나기 전, 그는 ‘밥 먹는 짐승에 불과했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먹는 삶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짐승과 같은 존재라고 말이죠.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서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했던 그 군중들처럼, 주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현실적인 필요와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그 군중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는, 그 꿈결의 꽃밭, 황무지가 장미꽃처럼 피는 곳을 보는 그 천국을 바라보는 자들은 결코 밥 먹는 짐승일 수가 없다는 것이죠. 오직 하늘 생명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본문 68절을 통해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쪽)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영생에 대한 정체성을 잃고 살아간다면, 제자인 것 같아도 스승을 팔아넘기는 가롯 유다와 같다는 것을 본문의 마지막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은 가난한 심령,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의 영생을 모실만한 그릇이 도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밥 먹는 짐승의 삶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하루도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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