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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큰 명절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곤 했습니다. 그 명절을 지키기 위함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들이 지키는 3대 명절 중에 하나인 초막절 곧 장막절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이라는 3대 절기의 순서죠. 이 초막절은 보통 9-10월경에 지켰습니다. 유월절로부터 6개월 뒤에 그 절기가 뒤따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형제들, 곧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 네 명의 형제(마13:55)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권합니까? 예수님께서 그 명절에 맞춰 유대로 갈 것을 청합니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명절을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대로 가라고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에 대해 갈릴리 사람들이 냉대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요2장)을 일으셨고, 갈릴리 가버나움의 죽을 병에 걸린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요4장 후반부)주셨고,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요5장 초반부)주셨고, 그리고 디베랴 바다 건너편 산 위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를 거두셨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그 모습을 예수님의 동생들이 생생하게 목격하거나 전해듣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의 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만일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갈릴리에서와 같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게 된다면, 더 많은 명성도 얻고 더 큰 세력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수님의 형제들이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명성과 세력을 얻게 되면 자신들에게도 상당한 이득이 생길 것이라고 머릿 속에 계산을 했겠죠.
그만큼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기적만을 이용하려던 군중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던 것이죠. 본문 5절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생활해 온 예수님의 동생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 먹고 사는 것과 명성과 세력을 얻게 해 줄 그런 메시아만을 그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요청하는 바를 예수님이 따라준다면, 그곳 예루살렘은 그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을 것으로 그들이 생각했던 것이죠. 지극히 불신앙적인 동기요,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한 뜻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 6절 초반부에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가도록 해라. 하지만 아직 내 때는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나는 이 명절에는 아직 올라가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냥 갈릴리에 머물러 있겠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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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 때’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때’가 예수님 자신을 위한 때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때’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정해 놓으신 그 때, 곧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 죽음의 내딛어야 할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과 뜻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구속사역을 이루셨던 것이고요.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며 채우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내 뜻만을 성취하기 위한 시간으로 채우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연약한 저도 그렇지만, 우리들은 저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하나님의 시간과 뜻에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시간표를 보지를 못하죠. 왜냐하면 나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고집할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주님 앞에 연약한 자들인지 우리 스스로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한 나를 주님은 당신의 은혜로 품어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인생 속에서 때때로 하나님께서 만지시고, 이끄시는 그런 주님의 손길을 깨닫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을 위한 삶의 시간표들을 다시금 정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마치 사도 바울이 자기만의 인생 시간표대로 살고자 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 찾아와 그의 인생 시간표를 주님께 내어드리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초막절은 유대인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명절이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 생활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죠. 그 명절에 행한 중요한 행사 중 하나는 그것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제사장은 매일같이 금으로 만든 물단지로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와 제단에 붓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의식은 광야생활 중에 물이 없을 때 반석에서 생수를 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식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환호하고 열광했습니다. 그리고 초막절 마지막 날을 구원의 날로 지켰습니다. 그 날에 대해 지난해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마지막 사죄의 날로 믿었고, 그래서 마지막 날 제단에 물을 부으며 사죄의 은총에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초막절은 다시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는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내시고, 구원의 길을 내실 메시야를 그 초막절과 더불어 간절히 고대하며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초막절의 주인공이시고,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인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그들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뿐만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말씀하시는 예수님, 곧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요, 나는 자의로 말하지 않고 내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자라고 말하는 그 진리와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그들이 미워하고 죽이려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초막절의 의식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은 그 초막절에 메시야를 열렬히 고대하면서 의식을 거행하는 것 같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주인공이신 메시아보다도 자기 자신들을 주인공으로 세워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행했던 그들의 의식 속에는 진정한 주인공이 빠진 채, 그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의식으로 변질돼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오늘 나의 삶은 그들과 다른지, 오늘 내가 드리는 예배는 그들의 의식과 다른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의 삶과 예배에 주님께서 진정한 주인공으로 좌정하길 원한다고 하면서도, 혹시라도 내가 그 주인공의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를 드리는 나 자신이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가난한 심령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내 삶의 중심과 내 삶의 시간표 속에서 순간순간 영원을 내다보며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혹은 유대 군중들과는 달리, 깨어 있는 은혜의 자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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