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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세 번의 유월절이 있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유월절은 요한복음 2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성전정화사건이었죠. 성전의 바깥뜰 곧 이방인들을 위한 공간으로서, 그곳에 판을 벌여놓고 장사하는 장사치들, 그리고 돈을 바꾸는 환전상의 그 상들을 엎으신 사건이 그것이죠.
이제 남은 것은 두 번째 유월절과 세 번째 유월절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 유월절은 언제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공생애 3년의 마지막 유월절로서 당신이 체포당하여 십자가에 재물되어 죽던 그때가 마지막 유월절이었죠.
그렇다면 두 번째 유월절은 언제 맞이했습니까? 어제 읽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사건이었죠. 그때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죠. 그곳에서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일이 바로 유월절이 임박한 때 행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이른바 요한복음에 나오는 네 번째 기적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제 살펴 본 것처럼 그곳 디베랴 바다는 본래 갈릴리 바다인데, 왜 사도 요한이 굳이 디베랴 바다 곧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굳이 거론한 것이었는지, 오늘 본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더욱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신 것이었죠.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떡을 먹일 수 있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이 어디에 있는 상황입니까? 어제 읽은 3절에 보면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다시 말해 디베랴 바다 건너편의 산에 오르신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제자들과 함께 있는데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었죠. 왜냐하면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는 주님을 보고자 다들 몰려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계산기를 두드려 봅니다. 7절에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백 데나리온’이란 대략 한 사람의 7개월치 월급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한 사람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떡값이 많이 들겠다는 빌립의 계산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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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몬 베드로를 주님께 데리고 나온 안드레는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본문 8절에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발빠르게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혹시 먹을 것이 있는 가 찾아봤던 것이죠. 그런데 그 군중 속의 한 아이가 먹을 도시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도시락에 보리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토막이 있었던 것이죠. 그 당시에 가난한 사람은 대부분 보리떡을 먹었고, 조금 부유한 집안의 사람들은 보리가 아닌 밀로 만든 빵을 선호했다고 하죠.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는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두 토막’입니다. 그러니 안드레가 보기에도 그 많은 군중들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보였던 것이죠. 그 까닭에 주님께 ‘그것을 누구 입에 풀칠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던 것이죠.
이상의 관점으로 볼 때 문제의 해결 앞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알 게 합니다. 빌립과 같은 관점으로 큰 밑그림을 그리고 큰 계산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또 안드레처럼 발 빠르게 그 대처방안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두 사람 중의 하나는 해당되겠죠.
그렇지만 본문 속에 나오는 군중들의 수를 5천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봐서, 그것은 계산기만 두드린다고 해서, 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을 찾아가지고 왔다 해도, 결코 해결할 길이 없는 셈입니다. 지금 당장 이백 데나리온을 준비할 길도 없거니와 설령 있다고 해서 아랫동네에 내려가 그 떡과 물고기를 만들어온다고 해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본문 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우리 주님께서는 안드레가 어린 아이로부터 가지고 나온 것을 기반으로 오천 명의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어떻게 그것이 그렇게나 많이 불어났는지, 어떤 능력을 펼쳐주셨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만의 신비한 방법으로 그들 모두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열두 광주리를 더 거두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게 중요하죠.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때 자기 먹을 도시락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면서 안드레에게 건넨 그 어린 아이에게 어떤 생각이 밀려들었겠습니까? 그 당시의 관점에서 비춰볼 때 여자와 어린 아이는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도시락 통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이 그렇게 위대한 역사를 위해 쓰이게 될지, 그 얼마나 놀라겠냐는 것입니다. 비록 그 아이가 지닌 것은 초라하고 자기 먹을 것 밖에 되지 않지만, 그것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내어드릴 때, 그토록 위대한 역사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의 마음과 자세를 통로 삼아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본문 14-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무엇을 일깨워주는 모습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오천명의 군중을 먹이신 능력과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 그것을 직접 먹고 체험한 그 무리들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억지로”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강제로”라고 번역해 놓고 있는데, 그만큼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강압적으로 붙들어서 자신들을 위한 ‘임금’으로 삼고자 한 거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정도의 능력이란 충분히 우리의 굶주린 배만 채울 뿐만 아니라 우리를 압제하고 있는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능력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 치우친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그 자리를 피해 산으로 가신 것이었죠.
이상과 같은 역사가 바로 갈릴리 바다 건너편,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 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왜 굳이 사도 요한이 그걸 강조한 것일까요? 이 부분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경종을 울리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아니 성령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너희도 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되고자 하느냐?’하고 묻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너희들도 나를 억지로 끌어다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려고 하느냐?’하는 음성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제한당하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제한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훨씬 더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시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기쁠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힘들 때나,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 주님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통제를 받고, 주님의 이끄심을 받고 살아가는 신앙인, 주님을 참된 구주로 모시고 사는 은혜가 임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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