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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요한복음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요6:1-4)

by 똑똑이채널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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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일은 그에게 그리고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큰 기쁨이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예수님을 핍박하고 박해하려는 자들이 등장했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신지 상세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세례 요한이 에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증언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이죠. 더욱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고 말씀하신 일이요, 홀로 하는 일들은 하나도 없으니, 곧 나를 보내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고, 그렇기에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자요, 그런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자라고 천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6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병이의 기적, 곧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남자 장정만 5천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족히 2만 명 이상은 먹이신 그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그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여기에서 말하는 ‘그 후’란 정확하게 어느 시점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때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후반부 때라고 추정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문 4절에 보면 “유월절 명절이 가까운지라”하고 기록해주고 있는데, 이때의 유월절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두 번째 유월절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첫 번째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정화시킨 요한복음 2장 13절의 때이고, 세 번째 유월절은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3년의 때,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때가 바로 그 유월절의 때였죠.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죠 그렇기에 본문 4절의 유월절이란 두 번째 유월절이고, 이때가 공생애 사역의 2년 때, 즉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의 유월절로서 갈릴리의 후반부 사역 때 맞이한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가신 곳을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해 놓고 있는 개역개정판은 아리송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새번역은 원문에 가깝고 보다 분명합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니”(After these things Jesus went over the sea of Galilee, which is the sea of Tiberias.-KJV) 예수님께서 가신 곳이 ‘갈리리 바다’ 즉 ‘디베랴 바다 건너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갈릴리 바다나 디베랴 바다는 같은 곳입니다.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읽게 될 청중들이 갈릴리 바다도 알고 있지만 디베랴 바다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기한 것이죠.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디베랴란 이름은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입니다. 길이 21km에 폭 11.3km인 갈릴리 바다 인근에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는 A.D. 20 년에 로마의 황제를 기념하기 위한 도시를 세웠고 그 이름을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붙인 티베랴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곳 갈릴리 바다가 실은 황제를 기념하기 위한 바다였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 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들이 갈릴리 바다에 나가 그물질을 하는 것은 황제의 법칙, 곧 돈과 욕망의 법칙을 따르고자 함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주님의 제자로서 그곳 갈릴리 바다가 갈릴리 바다인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티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요한복음을 읽게 될 독자들은 적어도 이 세상 황제의 법칙 돈과 명예와 권력의 세상법칙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오병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만을 영원한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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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도 요한이 또 한 번 그곳 가릴리 바다를 티베랴 바다로 칭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이 그렇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이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미 밤 중에 찾아오셨지만, 그래서 새벽녘까지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지만,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통 욕망의 바다, 그 티베랴 바다, 그 황제의 법칙 곧 돈과 명예와 권력과 욕망이 넘실거리는 그 바다에 허우적거리며 주님의 사명도 잊은 채 온통 고기잡이의 돈벌이에만 빠져 있었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 바다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그 끝장에서 다시금 제자들의 본질, 주님을 생명과 진리로 모시는 자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고자 말입니다. 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만을 좇는 티베랴 바다의 사람들은 그런 황제의 법칙만을 좇는 삶은 머잖아 그물이 찢어져 다 빠져나갈 것들이라는 점 말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과 진리이신 주님을 좇는 자들은 결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아 영원토록 건져올리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 말이죠.

 

그런데 있잖습니까? 그런 관점은 마태도 그리고 마가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마가복음 8장 27절이 이렇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나 마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한 곳이 모두 빌립보 가이사랴였다고 증언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슨 질문을 던졌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는 질문이었죠. 그때 제자들은 답하죠.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른바 예수님을 세례요한처럼 도덕교사 정도로, 또 엘리야처럼 구약의 능력있는 선지자 정도로, 그리고 예레미야처럼 유대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그런 선지자로 생각한다고 말이죠. 그때 주님께서는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죠. 그러자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대답하죠.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은 저희들의 그리스도 곧 메시아 다시 말해 구원자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는데, 바로 그곳이 ‘빌립보 가이사랴’였다는 점을 마태와 마가가 동시에 조명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빌립보란 도시는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인 헬몬산 기슭에 있는 성읍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그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 대왕에게 하사했고, 그 로마 황제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이 그곳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했죠. 뿐만 아니라 그곳에 로마의 황제를 위한 신전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도시의 이름을 자기 이름과 함께 로마의 황제의 이름 곧 ‘빌립보 가이샤라’ 다시 말해 헤롯 빌립이란 이름과 율리우스 카이사르란 이름을 붙여서 ‘빌립보 가이샤라’로 칭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와 마가가 빌립보라고만 불러도 될 그 도시를 굳이 황제의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 곳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곳의 수많은 사람들도 황제의 법칙, 돈과 명예와 권력과 욕망의 법칙만을 좇아 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자녀들만큼은 오직 주님의 생명과 진리를 좇는 영생의 법칙을 따르는 자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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