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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두 번의 큰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2장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었죠. 그 표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서 질적인 변화를 초월케 하시는 능력을 지닌 분임을 천명한 사건이었죠. 하지만 보다 더 궁극적인 뜻은 그것이었습니다. 공생애 사역의 마지막 부분에서 십자가의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그것이었죠. 온 인류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밖에 없다는 것 말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미리서 예표해 주는 게 갈릴리 가나의 첫 번째 표적이었던 것이죠.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보여주신 표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어제 읽은 요한복음 4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장면이었죠. 왕의 신하 곧 헤롯 안디바를 모시고 있는 그 신하의 아들이 열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살려주신 사건이 그것이었습니다. 그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하룻길을 걸려 갈릴리 가나까지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가지 않고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하시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씀을 믿고 하룻길 걸려 갔는데, 날이 새서 그 중간에 자기 집 하인들을 만났는데, 아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죠. 그 아들이 나은 시각이 바로 예수님께서 어제 말씀하시던 그 시각이었던 것이죠. 예수님께 왜 그 신하의 아들을 살려주신 것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된 분으로서, 죽어가는 자를 살려내시는 분임을 천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더욱이 직접 가지 않고 원격으로도 고칠 수 있다는 것, 이른바 예수님께서는 공간을 초월하시는 능력을 지닌 분임을 만방에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왕의 하인을 통해 우리가 본받고자 한 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룻길 걸려서 찾아 나온 그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는 듯한 말씀을 하셨죠. 네가 나를 찾아 온 것도 표적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 표적을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나를 믿지 못하는 형국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은 그가 어떤 자세를 보입니까?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는 사실 왕의 신하로서 큰 권세와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그야말로 유대인이요 힘없는 천민 중 하나였습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말입니다. 그런데 왕을 모시고 있는 그가 예수님을 향해 ‘퀴리오스’ 곧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을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고쳐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절박한 상황의 마음이자, 믿음의 자세였던 것이죠.
바로 그 마음과 자세가 엊그제 주일날 살펴본 말씀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당할 때에 긍휼히 여기시는 아바 아버지라고 말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고통가운데 내 모시는 것은 그의 자아를 깨트리기 위해서, 그의 믿음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내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이끄시는 그 고통 가운데 더욱 납작 엎드리고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대로 내어 맡기는 자들을 더욱더 긍휼히 품고 사랑으로 세워 가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어제 그 왕의 신하가 보여준 믿음의 자세도 바로 그런 관점이요,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의 자세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5장에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 중에 세 번째 표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된 앉은뱅이를 고쳐주신 사건이 그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 갈릴리 가버나움의 그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후가 되는 것이죠. 그 후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날이 지난 뒤였겠죠. 그런데 그때가 유대인의 명절이 되었고, 예수님은 그에 맞춰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명절이 어떤 명절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1년에 세 번 곧 유월절, 오순절(맥추절, 칠칠절), 그리고 수장절(장막절) 그렇게 세 번의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이 아닌 에스더 이후에 부림절을 추가하여 그렇게 절기로 지키기도 했죠. 어떤 학자들은 이때가 바로 부림절, 다시 말해 아말렉 족속의 후예인 하만이 페르시아의 왕 아헤수에로의 등을 업고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고 했던 그때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비롯한 전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했을 때, 그때 자신들의 민족을 살려주신 그 날을 기념하여 지킨 날이 부림절이었습니다. 바로 그 부림절의 명절을 지키고자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것으로 추정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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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단순히 절기를 지키는데 있었겠습니까? 단지 절기를 지키는 차원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면 굳이 본문의 사건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절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것이죠. 그게 무슨 일입니까? 본문 2-5절을 보면 그곳 예루살렘에 양문 곧 ‘양의 문’(Sheep Gate)이 있었는데, 그 곁에 ‘베데스다’ 우리말로 ‘자비의 집’이라는 연못이 있었고, 거기에 행각 우리 식으로 말하면 누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행각 다섯이 있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있었는데, 거기에는 38년 된 병자도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병자들이 그곳 베데스다 연못에 몰려들어 있었던 것입니까? 본문 4절을 보면 그 당시 그 연못에는 갑작스러운 ‘물의 동함’ 즉 물이 움직이는 현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천사가 동요를 일으키는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즉시 연못에 뛰어들면 ‘낫는다’는 전승을 믿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천사가 일으키는 게 아니었습니다. 실은 연못 아래에 흐르고 있던 지하수가 연못으로 유입되면서 거품이 나면서 물의 이동 현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절 후반부에 있는 각주 2)를 보면 “어떤 사본에는 이 괄호 내 구절이 없고”라고 돼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3절 하반부에서 4절까지의 그 이야기는 성경의 진짜 말씀이 아니라 미신과도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를 믿을 만큼, 그 병자들의 상황이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 한 사람에게 다가가십니다. 본문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자 그는 본문 7절을 통해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분으로 보는 관점이 아니죠. 그저 물이 동하면 자신을 맨 먼저 업고 데려다 주기를 바라는 그런 동정심 정도 말이죠. 그러나 그런 그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본문 8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러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고 성경은 증언해 줍니다. 기적 같은 치유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기적적인 사건이자,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일곱 가지 기적 중에 세 번째 기적이란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된 신적인 권세를 지닌 분으로서, 38년 된 병자도 기꺼이 고치시는 분, 다시 말해 시간을 초월케 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만방에 알리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그런 병에 걸렸는지 본문 14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금 만났을 때 그때 말씀해 주셨죠.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오랜 세월동안 그가 병으로 고생하게 된 근본원인은 바로 ‘자기 자신’ 곧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 아니라 ‘자기 보기에 좋은 삶’을 추구했던 죄이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그는 그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고자 했습니다. 누군가 나를 엎어서 베데스다에 데려다주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도 미신적인 전설에 불과한 일이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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