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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태생적인 환경의 목마름, 또 현재의 환경속에서의 목마름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염된 환경 속에서의 죄를 이겨내고픈 그런 목마름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저마다의 목마름을 누가 과연 해소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에게 만나주시길 원하시는 예수님밖에 진정으로 나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분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은 빛이 아니요 빛의 증언자일 뿐이라고 스스로 소개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요, 광야의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고 말이죠. 그런 정체성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안도 열어주셨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올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한 것, 또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그것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나는 그 분의 신발끈 푸는 것조차도 감당치 못할 자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자기 제자들이 있는 앞에서 선포할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제자 중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스승의 품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신 기적을 비롯해, 본래 고향인 나사렛에서도 수많은 귀신을 내쫓아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을 알던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는 세례 요한을 추종했지만 그때부터는 예수님에게로 나아가 세례를 받고자 했죠. 심지어 유대 관원이자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중생할 수 있는지 한 밤 중에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고, 밝히 말씀해주셨죠.
그처럼 모든 초점이 세례 요한에게서 이제는 예수님께로 옮겨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아무리 강력하게 죄를 선포하고 회개하라고 외쳤어도 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죠. 지극히 도덕적인 뉘우침 정도의 한계 말이죠. 하지만 우리 주님은 도덕적인 영향력을 넘어 영적인 대전환을 가져오시는 분이었죠. 죄와 사망의 늪에 빠진 영혼들을 구원하실 참된 구원의 주님 말입니다.
그 까닭에 더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어 세례를 받고자 했던 것이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1-2절 말씀입니다. 유대 광야에 계시는 동안 그렇게 세례 요한처럼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당신의 세례를 베풀게 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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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4절입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이제 유대 광야에서 갈릴리로 가셨고, 그곳 갈릴리에서 이제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사마리아로 가시고자 하신 것입니까? 본문 7절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사는 한 여인을 만나고자 함입니다. 그녀의 목마른 갈증을 해결해주고자 함이요, 더 궁극적으로는 예배의 진실함을 일깨워주고자 함이요,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구원자이심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본래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있을 때, 그리고 그 아들 솔로몬이 통치할 때는 남유다 사람들이나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과 북이 갈라지고,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 제국에게 패망한 뒤에 혼혈족이 되었을 때에는 남유다 사람들이 개나 돼지처럼 짐승으로 여기면서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모두가 태생적인 갈증을 안고 태어날 수 박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도 아니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괜히 조상적부터 내려온 미움과 반복과 괄시를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유다 사람들로부터 받아왔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조차 남쪽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1주일씩 걸릴 때 사마리아를 거쳐가면 곧장 당도할 수 있는데도, 유대 광야 쪽인 데가볼리 지역과 요단강을 끼고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원하시던 사마리아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제 6시, 곧 정오 12시에 말입니다. 정오 12시에 왜 사마리아의 우물터에 가셨을까? 보통 사람들은. 물을 마시고자 그곳에 가신 것으로 생각을 하겠죠. 그런데 바둑의 고수들은 의미 없는 돌은 놓지 않듯이, 주님께서는 12시에 그곳에 가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본문 7절에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주님께서 그 시각에 우물터로 나간 것은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을 만나고자 함이었습니다. 왜죠? 그녀 역시 북이스라엘 출신으로서 태생적인 목마름을 안고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본문 18절의 말씀처럼 “남편 다섯을 두고 있는 여인”으로서, 육적인 목마름까지 안고 산 여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아침 일찍 혹은 저녁 무렵에 시원할 때가 아닌, 누구도 나오지 않는 그 뙈약볕이 내리쬐는 정오 12시에 홀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태생적인 목마름과 육적인 목마름, 사회적인 지탄의 두려움을 안고 산 여인을 위해 예수님께서 그 우물터로 나간 것이었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죠. 그래서 그녀에게 14절을 통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하고 말씀하신 것이었죠.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녀의 구원만을 위해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배의 본질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환히 알고 있는 예수님을 그녀는 선지자로 인식하죠. 그러면서 예배에 관해 묻습니다. 20절에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기에서 ‘이 산이란’ 신명기 27장 12-14절에 나오는 ‘그리심산’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면 축복을 받을 것이라면서 그리심산에 서게 했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면서 에발산에 서게 했습니다. 실물교육 차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분열왕국 후에 북이스라엘 사람들 그리심산에서 유월절 제사를 드렸고, 그 전통이 본문의 수가성 여인의 때까지 진행돼 왔던 것이죠.
그렇게 그녀는 우리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1-26절에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보다도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는 그 본질을 알려주십니다. 또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구원을 일깨워주는 구약성경이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신이 참된 메시아이심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이와 같은 대화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저마다 목마름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된 해갈의 기쁨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 그 분을 통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다는 것이죠. 오늘도 그런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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