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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한 낮에, 누구도 나오지 않는 그 시각에 그녀가 그때 그 우물가를 찾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녀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다섯을 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사회적인 냉대와 차별을 겪고 있었고, 그것을 자기수치로 여기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고, 그것이 곧 그녀와의 대화의 장을 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남쪽 유다 사람으로서 어찌 내게 물을 달라하는 것인지, 의아해했는데,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녀가 겪고 있는 삶의 상황, 곧 남편 다섯을 두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드러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녀를 비판하거나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의 욕망이라는 감정을 드러내주기 위함이요, 그를 통해 궁극적인 구원의 주님을 모셔들일 수 있는 그런 간절함을 불어넣어주고자 함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예배의 본질적인 차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마리아의 땅의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장소보다도 혹은 그 건물들보다도 그 심령에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심령이 온전한 예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수가 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에는 이미 제자들이 성읍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이제 돌아왔는데, 주님께서 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제자들은 묻지를 않았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제자들도 그녀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른바 주님의 구원이 그것이죠.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합니까? 본문 28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녀는 자신이 만난 주님을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동네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나보라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만난 주님이 진짜 메시아였기 때문이죠. 이것은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건강에 좋다는 식품이나 제품도 내가 먹어보고 좋아야 다른 사람에게 좋다고 소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게 해 주신 것, 또 내가 영적으로 혼미함 가운데 있을 때 내 영혼을 새롭게 해 주신 것, 그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오늘도 내가 아는 누군가에게 주님을 메시아로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수가성 여인이 바로 그런 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동네에서 돌아온 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본문 31절에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 사이에 제자들은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른바 음식을 가지고 왔으니 잡수시라고 청을 넣죠.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가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른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당신이 먹을 양식이라는 뜻이죠.
그러면서 35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이 사마리아 지역은 한 마디로 추수밭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하신 이유입니다. 천하 보다 귀한 영혼을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바로 그런 관점으로 볼 때 그곳 사마리아 땅도 잃은 영혼을 추수할 들판처럼 주님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그곳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이틀을 더 머무르면서 영혼을 수확하십니다. 이른바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신 것이죠.
본문 40-42절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며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라 하였더라.” 우물가에서 만난 그 여인은 이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동네 사람들에게 전한 상황이었습니다. 한 번 만 와서, 내가 만난 그 메시아를 만나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이 나와서 주님을 만나보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이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아셔서 이틀을 더 머무르면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이었죠. 그야말로 주님께서 바라본 관점, 추수할 영혼이 많다는 그 관점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눈에는 보이는 그 추수밭이 왜 제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제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울타리가 쳐져 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을 둘러 싼 인습과 과거의 경험들, 문화와 배경에서 오는 편견이라는 울타리 말입니다. 그 까닭에 제자들의 울타리 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지 못한 것 말입니다. 그 들판에 많은 영혼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관습과 문화적인 편견 때문에 추수할 그 영혼들을 볼 수 없었던 것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에베소의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파는 은세공업자와 똑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도 자기 부와 번영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지금 제자들도 수가 성의 그 여인에 대한 편견들도 가득 차 있었고, 그 동네 사람들에 대한 인식조차도 결코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관점과 그들 제자들의 관점이 달랐던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자들이 주님의 관점처럼 바르게 볼 수 있겠습니까? 본문 35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은 ‘너희 눈을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으로 부터 넉 달은 지나야 추수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제자들, 다시 말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직 예수를 알기 원치 않는다고 치부해버리는 그 제자들에게, 눈을 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눈을 들라'는 헬라어 ‘에파이로’(ἐπαίρω)는 ‘들어올리다'(lift up), ‘위로 올리다'(exalt)는 뜻입니다. 어떻게 눈을 들어올릴 수 있습니까? 발꿈치를 들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눈높이가 한 뼘만 올라가도 그동안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식도 한 뼘만 올라가면, 우리의 영적인 관점도 한 뼘만 올라서면 보이지 않던 면들이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관점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희어져 추수해야 할 들판을 보고 계신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언제 그곳 사마리아를 지나갈 것인지 하소연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과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보길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고, 주님의 눈높이의 관점을 지닐 수 있는 은혜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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