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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유다 사람들이 경원시하고 멸시하는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유인 즉 그곳의 한 여인, 곧 남편 다섯을 두며 살았던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 주시고자 하심이요, 궁극적으로 그녀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더욱이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도 참되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통해 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죠. 그녀가 만난 주님, 그녀의 모든 속사정까지 꿰뚫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 그녀가 동네 사람들에게 한 번만 만나보라, 그 분은 진정 구원의 주님이요 메시아다, 하고 소개를 했기 때문이요, 그때 동네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는데, 그녀가 소개한 그 모든 말들이 참말이요, 그들 모든 사람들도 주님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제자들의 관점은 주님의 관점과는 한 참이나 멀었습니다. 주님은 그곳 사마리아 땅에 추수할 영혼들을 보셨지만 제자들은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 때문에 추수할 영혼들을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 제자들에게 ‘눈을 들어 보라’고 희어져 추수할 영혼들이 많다고 말씀하셨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임을 밝혀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주님의 관점을 품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그곳에서 이틀 동안이나 더 머무셨는데, 오늘 본문은 이제 그곳에서 갈릴리 가나로 이동하시는 모습 속에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43절입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이제 예수님께서 이방 땅인 사마리아 성에서 다시금 갈릴리로 가시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에는 나사렛에서 사셨지만, 공생애 사역을 위해서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셨죠. 그래서 그곳 갈릴리로 가신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 갈릴리에 가셔도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또 유년 시절에 어떤 성품 속에서 자라왔는지, 그 동네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마태복음 13장 53절 이하를 보면 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하면서 그 신분이 천한 출신임을 알기 때문에, 또 그 집안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다들 무시한다는 것쯤은 예수님도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 까닭에 마가복음 6장 5절 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고 고칠 뿐이었음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께서 그곳 고향과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환영받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5절은 다릅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당도했는데, 그 갈릴리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상황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밝힙니까? 그렇죠. 예수님께서 명절 곧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우리가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를 통해 읽어봤지만 그 유월절 명절에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 들어가셔서 장사치들을 돈바꾸는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면서 내 쫓으신 모습을 보여주셨죠. 자신들이 그런 처지라면 결코 벌일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갈릴리 출신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에 나가 과감하게 그 일들을 벌이신 예수님을 참된 선지자로 여기면서 그들이 존중하고 환영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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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6절은 그곳 갈릴리에서 다시금 가나로 나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갈릴리 가나는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서는 최소한 79km이고, 갈릴리 가버나움에서는 32㎞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도보로 치자면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서 갈릴리 가나까지는 이틀 혹은 삼일 정도 걸리고,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는 하루나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곳 갈릴리 가나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요한복음 2장 서두에 보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갈릴리에서 첫 번째 기적을 일으켰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혼인잔치에 한창 흥겹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포도주가 떨어졌고, 예수님께서는 그 집안의 하인들에게 물 두 세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개에 가득 물을 가득 채우게 한 다음에 손님들에게 갖다 주게 했죠. 그때 바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때 왜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셨는지 생각해 본 바가 있었습니다. 물은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은 단순히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주님의 기적자체보다도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머잖아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구원하실 구원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우리도 그렇지만 유대인들도, 아니 갈릴리 가나 사람들조차도 눈에 보이는 그 기적자체만 보려고 하는 성미가 있죠. 주님께서 지금 가나에 오셨다는 소식을 왕의 신하, 곧 헤롯 안디바를 모시는 이방인 백부장인데, 그 아들이 지금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있다면서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하는 요청을 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죠. 본문 4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루 정도까지 걸려서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 예수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지금 찾아 나온 왕의 신하 곧 헤롯 안디바를 섬기고 있던 이방인 백부장이 자기 아들의 문제로 예수님을 향해 나왔는데, 그가 주님을 찾아나온 본심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신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곳 갈릴리 가나에서 보여주신 표적과 기적 때문에 자신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 왕의 신하, 곧 이방인 백부장이 보인 태도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49절입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여기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단어가 ‘주여’하는 단어입니다. ‘주여’라는 헬라어 단어 ‘퀴리오스’(κύριος)는 ‘My Lord’입니다. 바꿔 말하면 지금 자신이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헤롯 안디바 보다도 더 절박하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들고 있는 표현입니다. 왜죠? 자기 아들을 살려낼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방법을 왜 그가 백방으로 다 써보지 않았겠습니까? 좋다는 의원들을 왜 그가 찾아다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수소문해 본 결과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급기야 하루 걸려서 예수님께 나와 엎드리는 자세로 간청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문 50절을 통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정말로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주님의 그 말씀 한 마디에 즉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 상황이죠. 그래서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는데 하루가 지난 것이었죠. 그리고 도중에 자기 하인들을 만났는데, 아들이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 시각이 어제 주님께서 말씀하시던 그 시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4절 말씀은 이와 같은 표적이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적만 보고 주님을 믿을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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