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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던 그 첫 번째 유월절을 통해 성전 정화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성전의 관계자들이 장사치들과 환전상과 결탁하여 많은 이득을 챙기고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짐승과 상들을 엎으면서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하셨죠. 그것은 그들이 보기에 얄미운 것 같지만, 주님의 그 모습이야말로 그들의 어긋난 심령, 탐욕으로 물든 심령,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차 있는 그들의 심령을 바르게 세워주시고자 하신 성전정화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참된 성전은 건물 자체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그 성전 안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그 심령의 성전이 중요한 것이죠.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참되게 모시고,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만남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유대인 중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승리’(victory)를 뜻하는 ‘니코스’(νῖκος)와 ‘군중’(the mass of people assembled)을 뜻하는 ‘데모스’(δῆμος)의 합성어입니다. 군중들의 승리라는 뜻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만큼 그 부모님은 수많은 유대 군중들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욕망을 그에게 반영시키고자 했었던 것이죠. 그가 바리새인이 된 것도, 율법학자가 된 것도, 그리고 유대인들의 지도자가 된 것도 모두 그런 바람 때문이었던 것이었겠죠.
그런 그가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왜죠? 왜 대낮에 주님을 찾아오지 못하고 한 밤 중에 주님을 찾아온 것이었을까요?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니고데모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렸웠던 것이겠죠. 만약 자신이 주님을 찾은 게 드러나면 유대 사회에서 혹시라도 낙인이 찍히지 않을까 염려했던 까닭에 한 밤 중에 주님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왜 그렇게라도 해서 주님을 찾아뵙고자 했던 것일까요? 니고데모의 심령 속에 뭔지 모를 갈증, 뭔지 모를 답답함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도 유대인이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적과 능력들을 들었을 것이고, 그런 일들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성을 지닌 분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 밤중에 주님을 찾은 것이었죠. 도대체 예수란 인물이 누군지 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니고데모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게 있겠죠. 하나님의 구원은 극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로 극적이고 초자연적인 방법이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한다면 그토록 무력하고 참혹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방법을 택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았겠죠. 그냥 한꺼번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못 베겨나도록 완전히 한 방에 끝내버리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조명을 받고, 보다 기사거리와 같은 그런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코자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과정은 보다 내면적인 질문과 영적인 고뇌와 번민을 통한 과정이었다는 점이죠. 그것이 곧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의 고민과 갈등이요, 또 십자가 위에서 울부짖던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의 모습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에 이르러 숨을 거두기끼지 그 시간 시간들 속에 온갖 질문과 고민과 번뇌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과정들을 통해 구읜 빛을 볼 수 있게 해준 게 하나님의 구원이셨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도 그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게 하는 구원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회심도, 구원이후의 내면적인 갈등도, 그리고 넘어짐의 과정들도, 한 번으로 끝나는 구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수많은 내적인 질문과 갈등과 때로는 회의의 터널을 지나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중생의 은혜를 덧입게 된다는 것이죠. 니고데모가 중생의 은혜를 덧입는 과정도 바로 그와 같다는 점입니다.
본문 3-8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의 고백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생에 관한 말씀이었죠.
옛날의 많은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말을 잘 안 들으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려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그건 말장난이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실은 모든 사람이 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격이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은 다 아래로부터 났기 때문에 말이죠. 세상 어떤 사람도 위로부터 난 이가 없습니다. 오직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아래에서 난 사람에게 또 한 번의 출생이 있죠.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 영적으로 다시 나는 것, 그 영혼이 성령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성령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두 번째 출생이라 부르죠. ‘중생’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성령으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볼 수 있고, 그 삶에 기쁨과 평강이 쏟아나게 되는 것이죠.
그만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은총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죠. 왜냐하면 그 중생은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중생은 바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굴을 스치고, 땀을 식혀주고, 나뭇가지를 흔들게 되죠. 중생한 사람은 자신도 알고 타인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관점이 바뀌고,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바뀌고, 관계가 바뀌고, 소망과 소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도 중생한 이후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형식에 길들여져 있거나, 학습화된 종교인일 뿐입니다. 진정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자는 주님과 인격적으로 깊어지고, 그 마음과 생각이 항상 선한 방향이 되고, 말씀에 대한 순종과 인내가 있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화평의 덕을 세우고, 경건을 향한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그 삶의 초점은 영생으로 나아가게 되죠.
본문 15-17절에서 그걸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21절에서도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성령님으로 다시 태어난 중생한 사람은 진리의 빛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조차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중생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내 삶의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도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기쁨과 소망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소명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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