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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첫 번째 표적이 있었죠. 갈릴리 가나라는 산동네의 혼인잔치 석상에서 물로 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이 그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단순히 질을 초월케 하시는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새창조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만방에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머잖아 십자가 위에서 흘리실 그 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유월절을 맞이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신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12절 말씀은 그 전에 있었던 일을 보여줍니다. 이른바 갈릴리 가나에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일 말이죠.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갈릴리 가나와 가버나움은 26km 떨어진 거리로 하룻길 사이의 거리입니다. 다만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다”하는 표현을 통해 볼 때 갈릴리 가나는 산간지대 마을이었고,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해변가였습니다. 세례 요한 사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갈릴리 가버나움을 공생애 중심장소로 옮기셨죠. 그래서 그곳으로 다시금 돌아가시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죠. 본문 13절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유월절을 맞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유대의 모든 남자들은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는데, 예수님께서도 그때를 맞춰 성전에 올라가신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때 표현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던 예수님이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죠. 왜일까요? 가버나움은 해변가로해발고도가 200미터 낮은 곳이지만, 예루살렘은 해발고도 780미터에 위치한 높은 곳이라 그렇죠. 앞서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는 26km로 하룻길이었다면,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65km거리로 약 1주일 정도는 걸리는 거리입니다. 지금 그 거리를 1주일동안 걸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것입니다.
문제는 14절 말씀처럼 그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성전이라 함은 예루살렘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살펴봤었죠. 첫번째는 열왕기상 6장에 나오는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고, 두 번째는 바벨론의 침략과 함께 무너진 그 솔로몬 성전을 포로생활 70년을 마치고 다시금 고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재건에 나섰던 스룹바벨 성전이 두 번째 성전이었죠. 그것은 에스라서와 학개서를 통해 읽은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존재한 예루살렘 성전은 에돔 출신의 후예인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고자 46년간 증개축한 세 번째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장사치들과 돈바꾸는 환전상들을 보신 곳은 어디일까요? 그곳은 성전 전체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뜰’로 불리는 곳입니다. 그곳은 누구든지 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뜰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쪽 미문을 통과하면 ‘여인의 뜰’이 있고, 그 여인의 뜰에서 니카노르(Nicanore)문을 통과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뜰’ 곧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뜰을 밟을 수 있는 것이죠. 바로 그 이스라엘 뜰에서 비로소 유월절 제사를 드리는 그 모습을 이스라엘 남자들이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바친 그 제물을 번제물로 드려지는 그 모습을 말이죠.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뜰 앞에 있는 경계선을 넘으면 ‘제사장들의 뜰’이 나오고, 바로 그곳이 제물을 바치는 번제단이 있는 곳이죠. 그 번제단을 앞에 있는 게 성소와 지성소가 되는 것이죠. 그 지성소는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인 7월 10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요.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의 장사치들과 환전상을 보신 것은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그곳에 그들의 상을 엎으시고, 내쫓으면서 소리를 치셨던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본문 16절 하반절에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흔히 말하는 성전청결사건, 성전정화사건입니다. 성전을 둘러싸고 많은 성전 관계자들과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이 한 통속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익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릴리 가나나 가버나움이나 다른 지역에서 직접 소나 양이나 염소를 끌고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왔는데, 그것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끌고 왔을 때 병이 들었다면 새 짐승을 사서 번제물로 드리게 했죠. 그래서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도록 성전관계자들이 파는 번제물을 사야 했고, 또 그만큼의 이문을 남기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것이죠. 그렇게 다들 한 통속이 되어 성전의 순수성을 오염시키고 있었기에, 주님께서 청결케 하신 것이었죠. 그렇다면 오늘 우리 자신들도 예배당에 나올 때 정말로 순수한 마음과 자세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나오는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예배당을 둘러싸고 나의 이로움이나 나의 유익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오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나의 만족을 위해 주님의 전 곧 예배당을 찾는다면 우리도 그 속에 내 욕심을 주님의 보혈로 정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성전의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꾸짖고 소리치고 상을 엎으시니까, 자신들을 죽이고 위협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런 행위는 거룩한 분노요, 그들의 생명을 살리고 바로 세우시려는 사랑의 분노였던 것입니다.
주일날에도 우리가 살펴봤지만, 모세가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포한 말씀이 신명기였죠. 신명기의 신(申)자가 ‘잣나비 신’자이기도 하지만 ‘되풀이할 신’자라고도 했죠. 광야 40년의 삶을 회고한 내용이 신명기의 초반부 내용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시내산에서 주셨던 그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도록 청사진을 그려준 게 신명기의 후반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지 않으면 징계를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 갇힌 신세속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멸망당하고 파멸당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말한 게 아니었죠. 그들이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는 바람이었고, 만약 그런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을 때에라도 다시금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었죠.
지금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고 환전하는 이들을 정화시킨 것도 바로 그런 차원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참 뜻을 모르는 유대인들이 뭐라고 시비를 겁니까? 본문 18절에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19절을 통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하고 대답을 해 주셨죠. 예수님의 그 말씀은 21절 말씀처럼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죠.
하지만 그 속내를 모르는 이들은 뭐라고 합니까? 헤롯 대왕이 그토록 46년 동안 증개축한 성전을 어떻게 사흘 만에 지을 수 있겠다는 것인지, 되묻죠. 사실 그 성전은 46년간 지어왔지만,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에도 완성되지 못했고, 이후 30년이 지난 A.D.60년에서야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쳐들어와서 A.D.70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허물어져버렸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이 무너지도록 내버려두신 것이었을까요? 건물로서의 성전을 하나님처럼 여기지 말도록, 그 성전으로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지 말도록 하는 것이죠. 오직 건물로서의 성전보다도 인간의 심령 자체가 하나님을 모시는 진정한 성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는 것이죠.“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참되게 모시는 성전, 하나님의 빛과 생명의 말씀을 참되게 모시는 성전의 심령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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