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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요한복음

와서 보라(요1:35-51)

by 똑똑이채널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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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이 땅에 빛으로 온 예수 그리스도 곧 구원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빛을 증언하러 온 자요, 이른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양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세례를 받을 때, 그때 ‘네가 그리스도냐?’하고 물었을 때에도 그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나는 ‘소리일 뿐이다’고,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 분이라고, 나는 그 분의 신발끈 묶는 것조차 감당치 못할 그 분의 작은 자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튿날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는 그렇게 외쳤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보배로운 눈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셨는데, 그 뿐만이 아니었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그의 영적이 눈을 열어주셔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도 볼 수 있게 되었죠. 그만큼 세례 요한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을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 안내자로서 주님을 위한 청지기 삶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와 같은 은혜로운 눈을 베풀어주셨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와 같은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모시며 따르고 있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 나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또 그 제자 중 하나가 자기 형제를 데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5-36절입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전날 세례를 베풀 때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이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하고 공개적으로 고백을 했었죠. 그런데 그 다음날 또 다시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공개적으로 고백을 하는 상황입니다.

왜 그렇게 두 번씩이나 공개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고 고백을 한 것일까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메시아로 추종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두 번씩이라도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아 곧 구원자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고백을 해야 자신이 메시아가 아님을 알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외친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37절에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드디어 세례 요한이 공개적으로 한 말이 이제 먹혀 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이죠. 이전까지만 해도 세례 요한의 주변에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제자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요한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 곧 구원자로 고백을 하니까, 그것도 두 번씩이나 공개적으로 고백을 하니까, 그때서야 그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세례 요한의 품을 벗어나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습이죠.

과연 그 두 제자가 누구였습니까? 본문 40절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그 안드레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 전에,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토막을 한 어린 아이에게서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도시락과 같은 그 한 끼 식사용으로 그 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턱도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런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품을 벗어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따고 따라나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묵상하기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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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또 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로 세대배의 아들 요한, 곧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으로 추정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님의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이유를 말입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에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그 전부터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따르던 제자들에게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들에게도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주님의기도’를 알려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을 따르고 추종하던 그 중심축이 이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옮겨가고 있다는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제자 둘이 예수님을 ‘따랐다’하는 37절과 38절의 “따르다”는 헬라어 동사 ‘아콜뤼데오’(ἀκολουθέω)는 한 번의 충동적 행동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시중을 드는 지속적인 모습(join him as his attendant)이죠. 이전의 생활로부터 새로운 여행자의 모습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을 향한 발걸음이요, 죽음에서 생명을 향한 여정길을 말하는 것이죠. 그것을 한 번의 외침처럼 따르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동행하며 따르는 것을 말하죠.

그런데 그 중에 두 제자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따르겠다고 했는데,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니죠. 본문 41절을 보면 그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하고 하면서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이른바 안드레가 시몬을 전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그런데 전도란 게 특별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 내가 겪은 예수, 내가 동행하고 있는 예수를 소개하고 알려주는 것, 그 삶을 이야기해 줄 때, 그가 동요를 받아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이죠. 안드레에게 있는 그 마음과 자세가 우리에게도 실은 필요하다는 것이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런 은혜를 부어주셔야 하는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합니까? 그의 이름, 시몬이라는 이름을 ‘게바’로 바꿔주시죠. 왜죠?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200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한 남성 이름이 시몬이었다고 합니다. 그 ‘시몬’이란 이름은 ‘듣다’는 히브리어 ‘쉐마’와 비슷하죠. 그런데 시몬이라는 이름의 더 구체적인 뜻은 ‘귀가 가볍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게바’ 곧 ‘반석’이라고 바꿔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만 바꿔주신 게 아닙니다. 시몬이라는 보통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형상으로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이름, 그 존재 자체를 바꿔서 불러주신 것이었습니다. 매일 흔들리는 물 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에서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견고한 반석처럼 받드는 인생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욥기서 읽고 묵상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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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3-51절까지는 두 명의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른 ‘빌립’이었습니다. 그를 향해 ‘나를 따르라’했을 때 빌립이 즉시 주님을 따라나서 동행을 하죠. 이른바 그를 부르실 때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그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을 부르신 그 은혜와 동일한 것이죠. 그런데 그 빌립이 예수님을 따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뭔가 깊은 것을 깨달았는지, 그가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가자고 하죠. 그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냐고, 비판했죠. 그러자 빌립은 ‘와서 보라’, 네가 딱 한 번만 봐보면 달라질 것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본문 47절에서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오히려 칭찬해 주고 있고, 그리고 48절에서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메시아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종종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의논을 하고 토론을 한 경우가 많았는데, 바로 그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 나다나엘은 49절을 통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주님의 위대한 부르심입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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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흐름들은 주님과 두 제자들 사이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또 그들이 겪고 체험한 주님을 또 다른 이들에게 ‘와서 보라’하는 간증형식으로 이야기를 전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주님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은혜의 통로로 주님께서 사용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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