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출신 위젤의 〈나이트〉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그가 열다섯 살에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 이송됐다가 가족을 잃은 아픔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그는 독일군이 자신의 고향 마을 시게트를 점령하면서 운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나 수용소,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송하는 도중에 겪은 일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가 먹던 수프에서 시체 냄새가 난다고 한 것도, 하나님은 죽어버린 하나님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런 연유였다.
이 책은 안네 프랑크의 <일기>,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와 함께 홀로코스트 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문학이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부제’를 다룬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13개월 동안의 수용소 생활 속에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님을 알게 된다. 그 감옥 속에서 그는 아버지를 보고 견디며, 아버지는 그를 보며 이를 악물고 견딘 게 그것이다.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지라도 서로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위안을 불어넣게 된 것이다. 그만큼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 때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고통의 터널에 갇혀 있다 해도 결코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어린 손길이다.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왕하7:19-20)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장관이 심판받은 모습이다. 그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은 그 위쪽 아람 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방 나라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셨다. 열왕기하 5장의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고침 받은 사건이 그것이다.
이제 열왕기하 6장에서 아람 왕이 이스라엘 곳곳을 공략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철통같은 수비대를 세워 방어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북 왕국 이스라엘 왕에게 미리 알려준 덕택이었다. 그러자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아들이도록 도단 성읍으로 군사를 보냈다. 그런데 그 무렵의 나아만 모습은 없다. 하나님을 모신다는 이유로 왕에게 경질됐든지 아니면 스스로 물러났을 것이다. 신앙심의 충돌 속에 성숙한 신앙인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도단 성읍을 둘러싼 아람 왕의 군사들 앞에 엘리사의 사환은 벌벌 떨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어주셨을때, 엘리야가 탔던 그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해 주셨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람 군사의 눈을 멀게 했고, 엘리사는 그들을 여호람 왕에게 끌고 갔다. 여호람 왕은 당장에 그들을 처단토록 했지만 엘리사는 음식물을 줘서 고국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바로 그 직후에 아람 왕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읍을 둘러싼 것이다. 그때 백성들은 먹을 게 없어 자식들까지 잡아먹는 형국이었다. 여호람 왕은 그 일이 엘리사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를 곧 물러가게 할 것이고 먹을거리도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다. 바로 그때 그 장관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것이라고 말했고, 대신에 백성들에게 밟혀 죽을 것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응답된 것이었다.
사실 그 장관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여호람 왕이 연합군을 이끌고 모압을 칠 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신 일도(왕하3장),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긍휼로 고침받은 사실도(왕하5장), 엘리사 선지자를 체포하도록 보낸 아람 왕의 군사들이 오히려 눈먼 채 돌아간 것도(왕하6장) 모두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게”(사22:22,계3:7) 하는 분이란 사실 말이다.
그런데도 왜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려 했을까? 그렇게 하는 게 왕의 신임을 받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이기심의 발로였고, 처세술의 끝판왕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고통의 터널에 함께 갇힌 동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려는 영적인 눈은 거두어 들이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보게 하려는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생명은 하나님 앞에 무가치하기에 결국 심판받아 죽게 된 것이다.1)
연일 찜통더위에 숨이 헐떡거린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천 명대를 계속 넘어서고 있다. 홀로코스트에 견줄 바는 못되지만, 모두가 고통의 터널에 갇힌 형국 같다. 아람 왕의 군대가 사마리아 성읍을 포위하는 듯한 모습이다. 출구 전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의 터널 속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하시고 새로운 길을 여시는 분이니 말이다.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순 없을지라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동참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신비로움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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