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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묵상LifeBible

승효상 씨처럼, 르 코르뷔지처럼.

by 똑똑이채널 202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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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 묵상 〉

 

"거대 상업 건물의 번잡스러움에 대항하는 힘은 무엇일까. 바로 영성이었다. 그렇다. 자본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해도 작은 영성 하나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연히 나로 하여금 건축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한 마산 성당, 무려 40년 가까이 된 일이었으나 그 건축을 만든 애초의 생각을 끄집어내며 그렸다. 그랬더니 어떤 부분은 놀랍게도 라 투레트 수도원까지 연상시키게 되었다."

 

건축가 승효상의 묵상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탈리아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프랑스 파리의 추방당한 순교자 기념관까지 2,400km 길목에 있는 수도원들을 차례로 순례한 여행기다. 그 중 라 투레트 수도원에 들렀을 때 오래전 김수근의 문하생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직접 설계한 마산성당을 떠올리며 한 이야기다.

 

사실 그는 김수근 문화상, 한국건축문화대상, 미국 건축가협회 명예상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1년에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총감독으로 활약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총괄건축가로 선임되기도 했다. 2010년에는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억만 남는 비움의 묘역'을 설계 조성했고, 현재는 문재인 정부의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토록 화려한 건축능력을 자랑하지만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가 유홍준의 자택 수졸당을 지었을 때 빈자의 미학을 구현한 첫 작품으로 손꼽힌다. 2019년에는 성도가 30명뿐인 경북 경산시 하양읍에 하양 무학로 교회당을 무료로 설계해줬다. 높은 첨탑이나 네온사인도 없는 단층벽돌건물이다. 목사의 강대상과 성도의 의자를 수평으로 했다. 화려한 조명도 없다. 얇고 길게 뚫린 천창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십자가 벽면을 비추는 공간이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성찰하고 대화할 수 있는 본질적인 공간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영성이지 않을까? 거대한 상업의 번잡스러움을 이겨내는 비움의 영성 말이다. 그런 영성을 회복하고자 유럽의 수도원들을 찾았던 것이리라. 더욱이 그 길목에서 유럽 최고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를 마주한 것도 행복이었다. 그는 마지막 생을 네 평의 통나무집 카바농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왜일까? 그가 20대 시절에 방문한 '갈루초 수도원'의 수도승이 세상 밖에 자신을 유폐시킨 수도승방을 보고, 자신의 남은 인생도 그렇게 마무리하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httpswww.churchofjesuschrist.orgstudymanualold-testament-student-manual-kings-malachichapter-5lang=eng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왕하4:1)

 

열왕기하 초반부의 내용 중 하나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7번째 왕 아합의 22년 통치와 연관된 말씀이기도 하다. 그 아합이 죽고 아들 아하시야가 아버지의 길을 좇아 2년간 바알을 숭배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그의 죽음을 선포하게 했다(왕하1).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고자 했다. 그때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길갈벧엘벧엘여리고요단강으로 따라갔다. 마침내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하늘로부터 성령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했다. 그 능력으로 엘리사는 요단강을 갈랐고 여리고 성읍 물도 마실 수 있게 했다. 그 후 엘리사가 벧엘에 오는데 그곳의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왕하2:23)하고 연거푸 조롱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했고 암곰 두 마리가 나와 42명을 죽였다.

 

왜 그랬을까? ‘어린 아이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아르’(נַעַר)는 철부지 아이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십대 후반의 젊은이’(14:24,21:19,왕상3:7)에 해당된다.1) 미드라쉬에서는 엘리사가 여리고의 썩은 물을 고쳐버린 까닭에 그들이 생수사업권을 잃게 되었다면서 엘리사에게 떠나라고 조롱했다고 해석을 한다. 그 일로, 레위기 2621-22절의 말씀처럼, 그들은 심판받은 것이었다.

 

물론 엘리사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열왕기하 3장에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8대 왕 아하시야가 죽고 9대왕 여호람이 등장한다. 그는 아합의 두 번째 아들이자 아하시야의 동생이다. 그가 남왕국 유다의 4대왕 여호사밧과 한 형제국인 에돔과 연합하여 모압을 치고자 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열왕기하 4장이다. 그런데 이전의 엘리야나 엘리사의 능력과는 달리 너무나 빈약한 선지자의 모습을 비춰준다. 그 선지자는 많은 빚을 남긴 채 갑자기 죽어버렸고, 채권자들이 그의 아내에게 찾아와 빚독촉을 하며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미드라쉬와 유대랍비 라쉬의 주석서에서는 이름없는 그 선지자를 오바댜로 해석을 한다.3) 오바댜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절에 궁중대신(בַּיִת, steward)이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한 까닭에 이세벨에게 박해받던 선지자 100명을 두 동굴에 숨겨 돌봤다(왕상18:3-4). 그만큼 그는 매우 부유했지만 자기 재산을 털어 가난한 선지자들을 먹이는 데 사용했고, 계속 그들을 부양코자 아합의 아들 여호람에게까지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린 것이었다.4) 그러다 급작스레 죽고 만 것이다.

 

어떤가? 많은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세상 업적에 치중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인들도 거기에 넋을 잃을 때가 많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엘리야나 엘리사의 위대한 능력, 갑절의 영감에 포커스를 맞추곤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 천명의 선지자도 있었다. 더욱이 오뱌다는 그 중 100명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것을 내놓았다. 그러다 빚을 졌고, 졸지에 죽어버려, 그 자식들까지 빼앗길 처지가 된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한 그 가정 위에 크신 은혜를 베풀어서 모든 채무를 갚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저마다의 성품과 특색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 사명이 거창할 수도 있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사명일 수도 있다. 엘리야는 엘리야대로 엘리사는 엘리사대로, 오바댜는 오바댜대로, 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명은 7천명대로, 어쩔 수 없이 동굴에 숨어든 100명의 선지자는 또 그들대로. 각자의 영역과 특성대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응답하며 살면 된다. 다만 화려한 조명보다도 언제나 낮고 천한 곳에 빛을 비추시는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게 중요하다. 승효상 씨처럼, 르 코르뷔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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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까

culture-developer.tistory.com

 

 

 

1)https://www.studylight.org/lexicons/eng/hebrew/05288.html

2)https://www.sefaria.org/II_Kings.2.23?lang=bi&with=Ein%20Yaakov%20(Glick%20Edition)&lang2=en

3)https://www.chabad.org/library/bible_cdo/aid/15910/showrashi/true

4)https://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11641-obad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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