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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를 마치고 예배당 옆 텃밭에 심은 고추랑 작두콩이랑 비파에다 물을 주러 나갔다. 예배당 입구 아래에 하얀 비늘 봉지가 눈에 뜨였다. 안을 들여다보니 더덕 뿌리가 몇 개 들어 있었다. 그때서야 알게 됐다. 동네 할머니가 놔두고 갔다는 걸. 어제 상추 모종 반 판을 그분에게 드렸더니 내게 더덕을 놓고 간 것이었다.
자식은 부모의 숨소리만 들어도 포근한 잠을 잔다. 부모의 익숙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루는 자식도 있다. 익숙한 소리와 환경은 자식이 커가는 텃밭과 같다. 사랑은 숨소리와 코코는 소리로 또 눈빛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리를 절며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그 할머니의 발걸음도 사랑이다. 논밭의 벼들도 농부의 발걸음 소리에 자란다고 하지 않던가.
박선희의 〈매일 아침 여섯 시, 일기를 씁니다〉는 사소한 것도 십 년을 하다 보면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걸 일깨운다. 대학생 때 사귄 남자 친구와 혼인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 일본에서 살고, 남편이 죽고 난 뒤 딸을 데리고 친정에 들어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때 그녀를 가장 안심시킨 것은 잠든 가족들이 내는 고른 숨소리였다고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 만에 숨을 거두셨다. 유대 관원인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간청했다’(προσέρχομαι, 눅23:52).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무덤에 모셨다. 한 밤에 예수님을 찾았던 니고데모도 그때는 몰약과 침향을 준비했다. 그들은 대놓고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숨결을 잠잠히 따라다닌 자들 아니었을까? 그 또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당신의 육신을 맡긴 것이다.
작년에 수확한 작두콩을 예배때 차로 끓여 마시고 있다. 올해는 그 할머니가 준 더덕도 잘 키워볼 생각이다. 더덕 뿌리는 독특한 향과 사포닌이 많아 인삼과 비슷한 맛을 낸다고 한다. 물론 인삼이든 더덕이든 3년은 키워봐야 하지 않을까. 토양은 좋지 않지만 녀석들이 내 발걸음 소리에 맞춰서 잘 커줬으면 좋겠다. 그 또한 사랑일 테니 말이다.
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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