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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인종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습니다.
이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신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줄 빵이 없다.”
그러자 그 인디언은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몹시도 배가 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언은 마지막으로 물 한 모금이라도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미국 신사는 그렇게 대답을 하며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너처럼 개 같은 인디언에게는 물 한 모금 주는 것도 아깝다”
그러자 인디언은 슬픈 얼굴을 하며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미국 신사는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산중에서 사냥개를 놓쳐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이 산속에서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배가 고프고 갈증이 나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언이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당장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며 후히 대접을 했습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난 후 가만히 들여다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언은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이 박대했던 그 인디언이었습니다.
미국 신사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런 미국 신사에게 그 인디언이 이렇게 조용히 말했다고 하죠.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깨달음)성경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25:21-22)
원수와 같은 사람을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며 그가 힘들어할 때 베푸는 것이 하나님께 상급을 쌓는 길이란 뜻입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누군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지쳐있을 때 그를 외면치 않고 품고 베풀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인디언이 선으로 악을 갚지 않고 악으로 악을 갚았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후한 상급을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적용)그만큼 용서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다면 이 땅에 어떻게 평화가 임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가 없다면 이 땅에 어떻게 온유함이 깃들 수 있겠습니까?
용서가 있기에 이 땅에 화평과 희락과 자비가 넘쳐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있는 그 자리가 성령의 임재와 권능이 임하는 자리요 성령의 내주하신 열매를 맺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는 죽은지 사흘째 되는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습니다.
그걸 알지 못한 여인들을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고자 동굴 무덤을 찾았나섰습니다.
그 동굴 무덤 문이 열린 사이로 동굴 안을 쳐다봤는데 예수님의 시신이 없자 슬픔에 주저앉았죠.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친히 나타나 보여주셨고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죠.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곧장 그 무덤을 찾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죠.
허탈한 심정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들어갔을 때 낮 동안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숨어있던 제자들이 밤에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죠.
바로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방문을 통과하셔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셨죠.
그러자 제자들은 진짜 주님인지, 주님의 환영을 본 것인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주님은 당신과 손과 옆구를 보여주셨죠.
그때서야 제자들은 진짜로 주님인 줄 알고 기뻐했는데 주님은 다시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진리와 생명의 영이요 어둠과 죄악을 밝히고 이기게 하시는 빛의 영입니다.
그 성령님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오순절 전까지는 성령은 받는 것이요 또 성령은 떠나가는 성령님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두려움도 몰아내고 권능을 발휘하고 예언도 하는 하게 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삼손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나귀 턱뼈로 블레셋 장수 1천명을 물리친 역사가 성령의 권능이죠.
사울이 처음 왕이 됐을 때 성령의 힘을 불어넣어 적들을 대적하여 승리하게 하신 것도 성령의 능력이죠.
그런데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사울이 다윗을 죽이겠다고 사무엘 선지자의 고향 라마 나욧을 찾았을 때도 성령님이 임재하셨죠.
그때 사울도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언을 했지만 왕복을 벗는 수치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세 번의 군사를 보내 다윗을 잡아오게 했지만 그때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예언만 할 뿐 다윗을 잡아오지 못했다면 그때 자기 자아와 고집을 껐는 걸 주님은 원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렇기에 라마 나욧이 선지자 생도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처소였다면 어떻겠습니까?
사울이 그곳에 도착해 성령의 임재로 열정적으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예언의 영을 받았다면 말입니다.
그때 그는 성령의 권능과 성령의 은사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자기 고집과 시기와 질투심을 꺾는 자비와 절제의 인격으로 다듬는 게 더욱더 필요했던 것이죠.
결국 그걸 꺾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을 때 그의 왕복을 벗는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인 것이었습니다.
(깨달음)그렇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성령을 받아 은사와 권능을 받아 세상에서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이후에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는 너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감동감화를 통해 너희들의 자아와 고집과 혈기를 꺾고 온전히 복종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너희들이 머문 자리가 화평과 평강의 자리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임하는 라마 나욧의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본문 23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원해)여기에 ‘사하다’는 헬라어 ‘아피에미’(ἀφίημι)는 신약성경에 146회 사용된 단어입니다.
‘아피에미’는 ‘멀리보내다’(to send away) ‘허용하다’ ‘떠나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만 33번 사용됐는데 버리다(desert막1:20) 뒤에 남기다(leave behind,막1:18) 내버려 두다(leave alone,막 11:6), 허용하다(allow,막 7:27)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과 관련해서 사람의 지위, 결혼, 의무, 빚, 형벌로부터 면제해주거나 청산해주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에서는 ‘나샤’(נשׂא)로 쓰였습니다.
창세기 4장 13절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땅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효력을 없을 것이고 너는 땅에서 피하며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자 가인은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겁습니다”(창4:13)하고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를 올리죠.
거기에 ‘짊어지다’는 히브리어 ‘나샤’가 70인역(LXX)에서 ‘아피에미’(ἀφίημι)로 사용된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기도를 받으사 그를 만나는 이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죠.
이 ‘아피에미’는 후에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할 때도 쓰인 단어입니다.
레위기 16장에서는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도록 아사셀로 염소를 보낼때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희년의 ‘자유’(liberation)(레25:10)와 안식년을 맞아 ‘빚의 면제’(remission,신15:1)때도 사용된 단어죠.
그만큼 ‘사하다’는 단어는 사람의 죄와 책임과 의무를 완전히 면제하고 탕감해준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죄의 용서’(forgiveness of sin)차원에서 자리잡게 된 단어입니다.
(원성)마태복음 9장과 마가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동일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한 집에 들어가셨 중풍병자를 매고 온 친구들은 어떻게 들어갈 수가 없었죠.
그러자 그들은 그 집의 지붕을 뚫고 위에서 아래로 중풍병자의 상을 내리게 되죠.
그때 주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막2:5)
그러자 그곳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죄를 범했다면서 강하게 비판하죠.
구약시대에서부터 지금껏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인간도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의 권위로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한 것이요 그의 질병을 고쳐주셔서 걸어 나가게 하신 것이었죠.
그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단어가 ‘사함받다’ ‘탕감받다’는 본문의 ‘아피에미’입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진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제자들이 누군가의 죄를 사하면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 그 사람의 죄가 사함받는다는 뜻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가톨릭에서는 베드로와 사제들에게 적용하여 고해성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적용하는 이단 사이비 교주들도 자신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말을 하죠.
(적용)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말씀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분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죄와 사망을 꿰뚫고 부활하셨기에 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사하다’는 참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누군가 지은 죄를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내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그 은혜를 덧입은 자로 누군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어찌 용서할 수 없겠냐는 뜻이죠.
그래서 베드로에게는 주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무한대로 용서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죠.
원수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가지도 기꺼이 내어주며 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씀하신 것도 그런 이치죠.
그만큼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범하고 또 누군가 내게 잘못했다면 하나님께만 용서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화목제 중에 두 가지 제사도 마찬가지죠.
남의 물건에 해를 끼쳤거나 배상해야 한다면 그 당사자에게 배상토록 하는 게 속건제입니다.
화목제도 제물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바치지만 나머지는 이웃과 먹되 다투고 싸운 사람까지도 초청해서 먹는 제사가 화목제였습니다.
신약성경의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로마에 있는 바울에까지 그가 숨어서 흘러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로부터 구원의 복음, 하나님께 지은 죄를 사함받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었죠.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 사함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너의 주인인 빌레몬을 찾아가 진심어린 죄 용서를 청하도록 했고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편지를 썼죠.
그것이 빌레몬서의 핵심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다’하신 참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의 죄에 대해 용서하고 용서받는다면 나의 묶인 문제도 하나님께서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주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사람 사이의 죄나 잘못에 대해 용서하고 용서받는 관계회복의 은총이 일어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미국의 그 신사는 인디언을 개처럼 여기며 물 한모금도 주지 않았지만 원수같은 그에게 인디언은 오히려 먹을 것과 마실 거도 주지 않았더냐?”
“아무리 원수 같은 사람이라 하지라도 그에게 선으로 대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는 것 아니겠느냐?”
“지금 제자들에게 죄를 사하라는 것은 누군가의 죄와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며 살라는 것 아니겠느냐?”
“오순절 날 이후에 성령의 담대함 가운데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유대 당국자들에게 매질당하고 감옥에 갇힐때도 말이다.”
“그때도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들을 십자가 위에서 용서해주셨듯이 동일하게 원수 같은 이들을 용서하며 살라는 것 아니더냐?”
“그때 그들이 머문 자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임하는 자리요 그것이 참된 성령의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힘이 없는 관계여야 하고 사람 사이에도 막힘이 없는 화평의 관계를 주님은 원하지 않겠느냐?”
“그 길은 오직 네가 누군를 용서하고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를 빌 때 일어나는 것 아니겠느냐?”
“이 땅에 살면서 연약한 죄성을 지닌 네가 어찌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겠으며 어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과의 관계는 외면하고 덮어준 채 하나님께만 용서받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뻐받으시고 하늘문을 열어주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묶인 사람과의 관계를 풀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 하늘의 문도 질병의 문도 고통의 문도 경제적인 문도 활짝 열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더냐?”
“오늘도 그 주님께서는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네가 먼저 그에게 용서를 청할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너에게 열어주시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먼저 손매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맘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맘을 주님게 맡긴채로
(예화)김창옥 교수가 어느 군대에 간 남자 친구를 둔 여자 청년의 사연을 접했습니다.
그녀는 군대에 간 남자 친구를 기다려야 되는지 아니면 다른 남자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김창옥 교수가 이렇게 감별해 보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남자 친구가 군대를 갔다면 그게 곧 찬스라는 것이었죠.
새로운 오빠를 만날 찬스가 아니라 그 오빠를 좋아했는지 아니면 좋아보였는지 알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과연 그 오빠를 좋아했는지, 아니면 그 오빠가 좋아보였는지, 그 차이가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요?
김창옥 교수는 그렇게 말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고, 좋아 보이는 것은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대가를 지불치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오빠를 기다릴 대가를 감정으로나 의지로나 지불할 가치가 있다면 좋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오빠를 기다릴 감정도 의지도 없다면 그 오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남녀는 누군가에게 대가를 치를만한 가치를 의지로나 감정으로나 느끼는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크리스천의 모습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좋아서 믿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 보여서 믿는 것인지, 어떻게 스스로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좋아서 믿는 크리스천은 의지나 감정으로 그 대가를 지불할 가치가 있어서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예수님 때문에 비방받고 조롱당해도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이 좋아서 믿는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좋아보여서 믿는 것은 그 의지나 감정으로 어떤 대가도 지불치 않고 믿겠다는 것과 같은 격이죠.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만 내가 욕을 당하거나 비방받아도 안 되고 손해보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적용)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원수같은 사람도 용서하라고 하셨을 때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른편 뺨을 친 이에게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는데 어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 자아와 고집조차 꺾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좋아 보여서 믿는 이들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좋아 보여서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등에 업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좋아서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자녀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좋아보여서가 아니라 좋아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믿는 자들이요 내게 원수같이 힘들게 하고 비방하고 금전적인 손해까지 끼치는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조차 용서할 때 주님은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원성)“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님께서는 죄악으로 하나님과 가로막힌 담을 허물고 이 땅에 화평의 관계를 회복하여 영생을 주시고자 친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그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면 지금 내가 관계맺고 사는 사람 아이에 누군과 관계가 뒤엉켜 있다면 그 관계를 회복케 하시길 원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좋아보여서가 아니라 주님이 좋아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면 기꺼이 그런 관계도 풀고 회복케 하실 때 순종하는 자녀들을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때 사람 사이의 관계도 풀릴 뿐만 아니라 질병과 괴로움과 경제적인 문제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풀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자들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게 되면 그 죄가 용서될 뿐만 아니라 하늘의 막힌 문제도 풀어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신다고 약속해주셨네요.”
“지금 내게 육신적인 문제나 질병의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에 막힌 게 있다면 하나님을 속이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사람과의 관계도 속이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나를 돌아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보여서가 아니라 좋아서 그런 것이오니,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며 하나님을 믿는 참된 자녀로 살게 하시옵소서.”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있거나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기꺼이 용서를 청하고 또 용서를 베풀어 그 막힘이 없게 해 주시옵소서.”’
“예배가 끝난 뒤 누군가에게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해 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화평의 관계를 회복하여 참된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나의 자아와 고집을 꺾어나가고 사람 사이의 화평을 이뤄나갈 때 주님께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며 산다는 것은 그분이 좋아보여서가 아니라 좋아서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자녀들인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시고 내게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듯이 나도 주님이 바라시는 삶에 대가를 지불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죠.
나와 하나님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고자 친히 십자가에서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오늘도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내게 손해를 끼치고 비방과 조롱을 할 때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용서하고 품으라고 말씀할 때 기꺼이 순종하는 자녀들을 주님은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누군가 없는 말로 나를 공격하고 내게 모욕을 주는 이가 있을 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왼편 뺨까지도 돌려대라며 용서하길 원하실 때 순종하는 자녀들을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 대가를 지불하는 자녀들이야말로 주님이 좋아보여서가 아니라 주님이 좋아서 믿고 따르는 참된 주님의 자녀들인 줄 믿습니다.
그렇게 누군가를 용서하고 품는 화평의 삶 자비의 삶을 살 때 주님은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육신적인 문제와 질병의 문제와 재물의 문제도 풀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누군가와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친히 풀어주시는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이 좋아서 믿는 자들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순종하고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여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 때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임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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