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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유머)어떤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얼굴이 구겨진 채 펴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걱정이 돼서 그 원인을 곰곰이 분석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최근에 남편이 한약 한 첩을 잘못 달여 먹었는데 그 후에 얼굴이 구겨진 것이었습니다.
그 한약 이름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구기자입니다(웃음).
아내는 어떻게 하면 남편의 얼굴을 좀 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드디어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선물을 하나 줬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물을 받자마자 남편의 얼굴이 환하게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물의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피자입니다(웃음).
(유머2)믿음 좋은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395장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를 불렀죠.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심방 온 성도들이 시어머니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어머니 예수 믿으세요. 며느님이 늘 어머님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자 시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며느리는 왕내숭이에요. 무서운 아이입니다. 날 위해 기도한다기에 들어봤죠. 그랬더니 어떤 노래를 부르는 줄 아세요?”
“어떤 노래를 불렀는데요?”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그 시어머니는 귀가 좀 둔해서 며느리의 찬송가를 곡해하며 들었던 것이죠.
그때 그 시어머니를 전도하러 간 분들이 그 찬송가 노래의 오해를 풀어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부터 그 집에 평안이 찾아왔고 그 시어머니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남편이든 아내든 시어머니든 그 얼굴이 늘 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굴이 항상 구겨져 있다면 그 집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서로 오해하고 있으면 아무리 시어머니를 위해 며느리가 기도한다 한들 그것을 좋게 들을 리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내 마음이 불평과 근심과 걱정속에 살고 있다면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있어도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심령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계시면 아무리 큰 위험과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죠.
(적용)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안데스 산맥을 지나가던 여객기가 난기류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난기류가 심해 몇 십 분 동안 비행기가 100미터 200미터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승객들 모두가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아이만 비행기가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까르르 까르르 웃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가 나중에서야 안정을 찾고 나자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얘야, 너는 무섭지 않았니?”
그때 그 아이가 뭐라고 대답을 했겠습니까?
“네.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우리 아빠가 이 비행기의 조종사예요.”
비행기가 100미터 200미터 아래로 떨어질때마다 그 아이는 자기 아빠가 비행기 핸들을 잡고 재주를 부리는 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 아빠의 비행기 조종 실력을 믿었기 때문에 그 큰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 인생의 조종사 되는 분 아니겠습니까?
내 인생의 어떤 난기류를 만날지라도, 내 인생에 어떤 폭풍과 두려움에 몰아쳐 올지라도, 그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116349
(역배)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 그대로, 당신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 그대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리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음으로 양으로 후원하고 섬기던 여인들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죠.
그 까닭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 그리고 여인들이 안식후 첫날 새벽미명이 예수님이 묻힌 동굴무덤을 찾은 것이죠.
아리마대 사람의 동굴 무덤에 그 여인들이 찾아나선 것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마16:1)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로마 군사들이 지키고 있던 동굴 무덤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군사들은 초죽음이 되어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지진 때문에 그 군사들은 벌벌 떨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천사가 동굴 무덤문을 열어제쳤기 때문이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동굴 무덤을 홀로 걸어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사복음서에서 통일되게 전해주지 않고 있어서 시간배열을 통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처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문에 이르렀을 때 무덤은 열려 있었고 로마 병사는 두려움에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무덤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그 여인들을 향해 ‘왜 우느냐?’하고 물었죠.
그러나 그녀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가져간 것은 아닌지, 누군가 훔쳐간 것은 아닌지, 걱정돼서 운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마리아야’하고 안심을 시켰고 내가 다시 살아났고 지금 하나님께 올라간다고 말을 했죠.
그때 비로소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제자들에게 달려간 것이었습니다.
그 주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이죠.
동굴 무덤문이 열려 있었고 천사들이 나타났고 주님께서 시체가운데 누워있던 세마포만 있을 뿐 주님은 살아나셨다고 말이죠.
그러자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제빨리 그 동굴 무덤을 향해 뛰어갔죠.
그런데 그 여인들이 말한 그대로였는데 부활하신 주님은 보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실망감에 젖은 그들은 풀이 죽은 채 마가의 다락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낮동안에는 유대인들의 눈길을 피해 숨어 있던 제자들이 그 밤에 마가의 다락방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들이 모였을 때 유대인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방문을 꽁꽁 걸어잠근 채 그 여인들이 본 것과 베드로와 요한이 본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죠.
(본문)오늘 본문은 바로 그 상황속에 일어난 일인데 본문 19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원해)예수님이 죽고 무덤에 묻힌 후에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가득찼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을 유대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당국에 고발당하면 잡혀 들어갈 것이고 예수님처럼 죽ㄷ임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죠.
그 때문에 마가의 다락방 문을 꽁꽁 걸어잠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인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평강’으로 번역된 헬라어로 ‘에이레네’(εἰρήνη)는 국가적인 안녕의 상태, 개인 간의 평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죽은 뒤에 맞이하는 평온한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피스’(peace)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에서는 ‘샬롬’(שָׁלום)으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안전한 상태요 번영을 이루고 있는 상태요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뜻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문을 보고 온 것까지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 까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나 요한도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으니 답답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 제자들이 모여 있는 그 방에 나타나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깨달음)그런데 이 말씀을 한 번이면 족할텐데 두 번씩이나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19절에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 21절에서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죠.
왜 두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처음에는 그 방에 나타나서 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이 어안이 벙벙이 돼 놀라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평강을 말씀하신 후에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라다니 그 예수님이 진짜 부활해서 지금 우리에게 오셨구나, 하는 걸 알게 된 것이죠.
그런 그들에게 다시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절)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평범한 인사말이라면 굳이 두 번씩이나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마치 새벽에 친구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데 친구가 졸린 눈을 하고 나옵니다.
아직 잠이 덜 깬 친구에게 ‘안녕하신가? 잘 잤는가’하고 인사말을 합니다.
대부분은 ‘어’하고 그냥 넘어가겠죠.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제자들에게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신 이후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제자 말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연거푸 말씀하신 것은 의례적인 인사말 이상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죠.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의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고별설교를 하실대 나눈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 말한 평안이 본문의 ‘에이레네’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려는 평안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평안은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평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평안인 것입니다.
그 평안은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평안이 아닙니다.
그 평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절대적인 평안입니다.
그런데 왜 그 평안이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이겠습니까?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평강이 세상 가운데 사는 제자들에게 올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인이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로막힌 장벽이 있어서 하나님의 평안이 내려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역사를 이룬 이후에는 죄의 장벽이 무너져 하나님의 평강이 제자들에게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평안을 너희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한 것이었고 지금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올라갔다가 오셨으니 그 평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렇기에 주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불어넣어주고자 하시는 평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너희들은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유대인들을 발각될까봐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죽음도 깨트리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관자이시니 너희들의 생명도 내게 달려 있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활시켜 생사화복의 주관자 삼아주셨으니 너희들의 생명까지도 내가 책임져주지 않겠느냐?’하는 것이죠.
너희들은 나와 함께 할 때 갈릴리의 파도와 풍랑 때문에 두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지금의 모습이 꼭 그와 같은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도 주님은 배 안에 계셔서 그 파도와 풍랑을 잠잠케 해 주셨는데 지금도 주님은 너희들과 함께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활시켜 이 세상에 너희들이 어디에 어떤 환경에 놓여 있든지 함께 하도록 하셨으니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지 않겠느냐?’하는 것이죠.
너희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고 유대교의 핍박속에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찰 수 있지만 결코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만 왕의 왕으로 부활하신 것이요 이 세상의 걱정과 근심과 죽음까지 이기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활시켜 이 세상의 핍박과 걱정과 근심과 죽음까지도 이기게 하셨으니 내가 너희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지 않겠느냐?’하신 뜻입니다.
바로 평안이 에이레네요 구약에서 사용하는 샬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과정 속에서 당신의 샬롬 당신의 평강으로 그 백성을 지켜주셨습니다.
온갖 전갈이 득실거리고 적의 칼날이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두려움과 걱정 속에 있던 그들을 당신의 평강으로 품어주신 것입니다.
낮에는 그 사막에서 뙤약볕을 맞이 타들어갈때도 구름기둥을 만들어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해 주시는 당신의 평강으로 말입니다.
직접 전쟁을 펼쳐야 할때도 사방에 적들이 넘쳐났지만 하나님께서 천군천사를 동원해 적군들끼리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 통해 그들을 평강으로 가나안 땅에 친히 인도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온 심령에 모시고 사는 자녀들에게 지금도 친히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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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염려와 죽음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심령에 평강의 은혜를 불어넣어주실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남편이나 아내나 시어머니가 얼굴을 찡그리고 구겨진 채 살아간다면 어찌 그 집에 평강이 깃들 수 있겠느냐?”
“그 마음에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이 들어 있으면 어떤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갖고 있어도 평강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느냐?”
“지금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을 꽁꽁 걸어잠근 채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차 있는 이유가 그것이지 않더냐?”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와 평강을 말씀하신 것도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을 불어넣고자 함이지 않더냐?”
“주님께서 주시는 그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절대적인 평강이지 않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너라고 두려움이나 근심이나 걱정이 없을 수 있겠느냐?”
“인생이 풍랑과 폭풍을 만났을 때 너에게 두려움이 밀려들 수 있지 않겠느냐?”
“경제적인 어려움이 밀려들 때 어찌 걱정과 근심이 밀려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
“건강에 이상신호가 감지될 때 때 어찌 염려가 찾아오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데도 의식하지 못할 때 네게 두려움과 근심이 밀려들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과 죽음조차도 몰아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주시는 절대적인 평강을 불어넣어주신 것 아니더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와 같은 평강을 불어넣어주신 것처럼 오늘 너에게 그 평강을 불어넣어주고 계심을 네가 온전히 신뢰했으면 좋겠구나.”
(찬양)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사랑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축복을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 함이라
(예화)봄이 되니까 교회 예배당 옆 주차장에 풀들이 금방금방 자라 오릅니다.
야외 화장실을 밀고 화단으로 만든 그곳에서도 예쁜 꽃들이 피어오르기도 하지만 잡풀이 자라오릅니다.
그것들을 뽑아내지 않고 방치한다면 순식간에 그 풀들이 사방을 뒤덮겠죠?
그것들이 뒤덮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녀석들을 하나하나 뽑아주든지 아니면 좋은 꽃씨와 꽃나무를 더 많이 뿌리고 심든지 해야 되겠죠.
이것은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심령도 세상 속에 있는 죄악의 잡풀들이 기생한다면 순식간에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염려의 잡풀들을 뽑아내고 그 심령속에 평강의 씨앗들을 심어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그런 평강의 씨앗이 자라게 된다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어도 주님께서는 절대적인 평강을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적용)작년에 〈나폴레옹〉이란 영화가 상영됐는데 20대 청년인 그가 전쟁의 공적들을 많이 올리면서 황제까지 오른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과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죠.
그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당했고 52세로 그 섬에서 죽죠.
그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 사람이 찾아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폐하. 지나온 날을 회상할 때 살아온 인생에서 행복한 날이 얼마나 되십니까?”
그때 나폴레옹은 잠잠히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의 전 생애에 걸쳐 행복한 날은 단 일주일도 되지 않소.”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오대양에 넘실거리는 파도는 세상에 오고 간 사람들의 눈물이고 육대주에 부는 바람 소리는 세상을 살아간 인생들의 한숨 소리와 같소.”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나폴레옹은 한 나라의 황제가 되어 세계를 지배했지만 그에게는 참된 평안이 없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그의 심령 속에 깃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뿐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가 가장 열망하던 권력과 돈과 명예와 여자까지 얻었지만 참된 행복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고 회상한 것이죠.
그의 심령에 하나님의 평강이 자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 속에 그는 평생을 산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같은 평탄한 삶을 살 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인생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도망자로 살 때도, 적군의 부하로 들어갔을 때도, 아들이 반역을 꾀했을 때도, 결코 하나님의 평강이 그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성)그래서 다윗이 시편 34편 10절을 통해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숲속의 왕자라고 하는 사자가, 그것도 젊은 사자가 어떻게 궁핍해서 주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자가 궁핍해서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한 자신에게 하나님께서는 부족함 없게 인도해주신 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의 지난 인생 속에 겪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평강을 그렇게 고백한 것 아니겠습니까?
죄와 사망을 꿰뚫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 평강의 능력을 불어넣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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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심령 속에서 주님의 절대적인 평강의 능력을 불어넣어주시고 채워주시길 원합니다.”
“제 심령 속에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죽음의 잡풀들이 있다면 다 뽑아내주시고 샬롬의 씨앗 에이레네 평강의 씨앗을 심어주셔서 퍼져나가게 해 주세요”
“나폴레옹이 평생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좇아 살았지만 평생에 걸쳐 행복한 날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게 살아온 지난 날들이 실은 그의 눈물이고 그 인생의 한숨소리뿐이라고 탄식했는데 하나님의 평강이 그 심령에 없었기 때문이예요.”
“그러나 다윗은 푸른 초장을 거닐때도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할때도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히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신 평강으로 다윗의 심령을 동여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자는 굶주림에 주릴찌라도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그 평강의 능력으로 끝까지 채워주신다고 고백한 것이었네요.”
“주님. 오늘 저도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염려까지도 부활하신 주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 구겨진 얼굴을 필 수 있는 것은 피자를 먹어서 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이 자리잡을 때 가능한 법입니다.
죄로 인해 온갖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가득찬 우리가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평강을 불어넣어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온갖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에 벌벌 떨던 제자들이 방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주님께서 평강을 불어넣어주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지만 두려워하지 말라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심을 그들에게 보여주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렸던 나폴레옹도 평생 행복한 날이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것도 그 심령에 하나님의 평강이 없었기 때문 아닙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삶의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오히려 더 고군부터하며 살지라도,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시는 평강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도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그 평강의 씨앗이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에 가득가득 자라서 이 세상을 담대하게 이겨나갈 수 있는 그 은총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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