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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27:32-36)_2024년 3월 24일 종려주일설교문 고난주간설교문

by 권또또 2024.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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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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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발췌)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에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이렇게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미식 축구 시즌이 끝나가고 이제 플레이오프가 코앞으로 다가온 날이었다.

그날은 카우보이스가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놓고 필라델피아 이글스와 한판 붙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딱 붙은 채 요동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쿼터 종료 8분밖에 남지 않은 시각, 카우보이스가 4점 뒤지고 있었다.

그때 카우보이스의 스타 쿼터백이 팀원들을 진두지휘해 골대를 향해 질주했다.

나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그대로 따라 하며 멋진 플레이 하나마다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사전 조짐도 없이, 성령님이 내게 기도를 명령하셨다.

갑작스러운 촉구하심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기도하라, 기도하라, 기도하라!”

마음 깊은 곳에서 강하고도 무거운 부담감이 느껴졌다.

당시 나는 그것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라는 성령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장 순종하지 않고 큰소리로 기도했다.

“주님, 8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경기만 끝나면 곧바로 기도할게요.”

하지만 성령의 촉구하심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러갔다.

그래도 나는 그 느낌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끝까지 반항했다.

“주님, 이 경기만 끝나면 다섯 시간 동안 기도할게요. 이제 겨우 6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카우보이스 팀이 공을 잡아 필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곧 카우보이스가 결정적인 터치다운을 성공시켜 경기를 승리로 이끌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기도하라는 촉구하심은 여전히 잦아들지를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중요한 경기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또 한 번 큰 소리로 말했다.

“주님, 이 경기만 끝나면 종일 기도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밤이라도 새울게요.”

결국 나는 경기를 끝까지 다 봤다.

카우보이스가 이겼고, 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즉시 텔레비전을 끄고 내 사무실로 올라가 문을 닫고 카펫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도하라는 촉구하심이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다.

부담은커녕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래도 이왕 무릎을 꿇었으니 억지로 기도를 짜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경기를 선택했다. 경기를 ‘핑계’로 하나님의 요청을 거절했다.

나는 카펫에 머리를 대고 탄식했다.

“주님, 남들이 하나님과 댈러스 카우보이스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하지만 방금 저의 행동에서 실제로 제게 누가 더 중요한지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주님이 저를 필요로 하시는데 저는 끝내 당신보다 미식축구 경기를 선택했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 즉시 마음 속에 대답이 들려왔다.

“아들아. 나는 다섯 시간 기도의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순종이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뭔가 요구하시는 음성이나 감동을 주실때가 있죠?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 말씀을 들을 때나 기도할 때 그리고 일상의 삶에도 그런 감동감화를 주시죠.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즉각적으로 순종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기 싫을 때는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적용)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 삶에 십자가를 짊어질 때 누가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억지라도 짊어졌을 때 그것이 부활의 십자가임을 깨닫게 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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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묵상하기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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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그날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바닦에 깔면서 주님을 향해 소리쳤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21:9)

‘호산나’란 히브리어로 ‘구원하다’(save)는 뜻의 ‘야솨’(יָשַׁע)와 ‘원하다’(please)는 ‘나’(נָא)가 결합된 단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시118:25)란 뜻입니다.

그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오병이어 기적을 베풀고 죽은 나사로도 살려낸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라면 로마에 압제당하는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줄 수 있고 굶주림과 가난에서 잘 살 수 있게 해 줄 거라 믿은 것이었죠.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대변해 줄 분으로 알고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열광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욕망을 대변하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고 입성하신 것이었죠.

 

그렇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그 일주간 어떻게 하셨습니까?

월요일날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청결케 하셨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실 때 어린 아이들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21:15)하고 소리쳤죠.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소리친 것이었죠.

하지만 성전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그들의 순수한 간구에 진노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무화과나무에 빗대서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모시는 것도 내 욕망을 위함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모시는 심령들이 돼야 하는 것이죠.

 

화요일날 예수님께서는 교권을 쥔 자들과 변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밥그릇을 건드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은지 그른지 물었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죠.

일곱 형제가 차례로 죽어 형수를 아내로 삼는 제도가 있었는데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될지 물었죠.

그때 주님은 부활 때는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가고 하늘의 천사들처럼 지낸다고 대답했죠.

모든 계명 중에 첫째되는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주님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듯 아래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죠.

그들의 변론에 종지부를 찍은 다음에 헌금함에 두렙돈 넣는 과부를 보시고 그녀가 최고라고 칭찬했죠.

이제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의 화려함에 놀란 제자들에게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걸 말씀했죠.

너희들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우상화하지 말고 너희 심령이 주님을 모신 성전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죠.

 

수요일날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었는데 사복음서 기자들도 이 날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가롯 유다와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준비하듯 예수님도 죽음을 준비하셨겠죠.

성경학자들은 이날 베다니 나사로 삼남매의 집에 계시면서 하루를 보내셨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죠.

사람의 소리는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자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때로는 내 소리는 내려놓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만 내게 부여하신 십자가를 온전히 짊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목요일날 예수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거행하셨습니다.

밤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죠.

그때 주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더 기어지는 기도를 통해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하고 내어드렸죠.

그렇게 진액을 쏟으며 기도를 마쳤을 때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의 군인들을 이끌고 와 체포했죠.

그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을 배반한 채 다들 도망가 버렸죠.

하지만 주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체포당한 채 날이 새기까지 다섯 번의 법정에 끌려갔죠.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자 실세였던 안나스 법정에 이어서 가야바의 법정에 끌려가셨습니다.

모든 의사결정엔 70명의 산헤드린 의원이 있어야 했지만 그 밤에는 23명만 있어도 결의할 수 있었죠.

하지만 아무린 죄목을 발견치 못하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보냈죠.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법정인 빌라도 총독의 법정에서 심문받을 때 예수님은 사형언도를 받았죠.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 했지만 군중들이 십자가에 죽이라고 요구할 때 거기에 굴복한 것이죠.

그 군중들은 며칠 전 ‘호산나 찬송합니다’하고 소리쳤던 이들인데 예수님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돌변한 것이었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 원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원하심을 좇아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죠.

신앙은 군중심리에 끌려 믿는 게 아니라 모두 No해도 주님이 원하시면 Yes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요일날 오전 9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신 날입니다.

그날 아침에 동터오는 그때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께 육중한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향하게 했죠.

하지만 목요일 저녁때부터 한숨도 쉬지 못한 예수님은 너무나도 힘겨워 쓰러지고 마셨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바로 그날 아침에 있던 일을 말씀해주고 있는데 32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32)

 

(원해)예수님께서 골고다로 향하는 그 길목에 그만 길에서 쓰러지고 마신 것입니다.

그때 로마 군인들은 구경꾼들 중에 ‘구레네 시몬’을 붙잡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한 것입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인데 예루살렘에서 2820km 떨어진 곳입니다.

알제리와 튀니지 옆에 붙어 있는 도시가 리비아인데 그곳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정착지가 있었죠.

그가 사업차 온 건지 유월절을 지키고자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길목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연히 죄수 하나가 십자가를 메고 가다가 길에서 쓰러진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죠.

그때 군중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그 행렬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로마 병사가 십자가를 짊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않는 십지가, 대신 지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십자가였지만, ‘억지로’ ‘명령조’로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이었죠.

 

(원해)우리말 ‘억지로’라 번역된 헬라어 ‘앙갈류오’(ἀγγαρεύω)는 페르시아의 특사를 보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말을 타고 신속하게 편지(אִגְּרָא, letter)를 전달하도록 말이죠.

그만큼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공적인 일을 하도록 압박하며 강제로 가게 하다’는 뜻입니다.

 

(원성)이 단어는 신약에 세 번 쓰였는데 본문과 마가복음 15장 21절과 마태복음 5장 41절입니다.

본문과 마가복음 15장 21절은 똑같은 내용이고 마태복음 5장 41절은 다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5:41)

 

(깨달음)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길을 갈 때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가면 즐겁겠지만 원치 않는 사람과 함께 가면 피곤하고 지겹습니다.

중요한 것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자주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 사람들이 와서 통치를 할 때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유대 지방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길을 가다가 유대인을 만나면 억지로 길을 가자고 했습니다.

로마 사람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있고 정복자들에 대해 적대 감정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었죠.

달갑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입장이니 결코 좋은 감정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오리를 가고자 하는 이에게 십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당황스럽게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요 그것이 십자가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는 사람에게 당황할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구레네 시몬도 로마의 정복자들이 강압적으로 그 십자가를 짊어지게 할때 ‘억지로’ 졌던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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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욥기서 읽고 묵상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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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본)그런데 대부분의 영문 번역본 성경을 보면 특이한 게 나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을 ‘Simon of Cyrene’가 아니라 ‘a man of Cyrene’라고 번역하고 있는 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레네의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이 시몬이란 사람이다’(a man of Cyrene, Simon by name)하는 뜻이죠.

 

(원성)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는 이 장면을 아주 명확하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깨달음)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란 부정관사 ‘a’를 쓰는 단어입니다.

정관사와 달리 특정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자신이 구레네에서 온 ‘어떤 사람’이요 ‘어떤 시몬’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실 때 우리도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짊어지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훗날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은혜임을 깨닫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적용)훗날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이렇게 문안하는 인사말을 남깁니다.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16:13)

로마서에 소개된 ‘루포’란 이름은 로마서가 기록된 시점으로부터 약 30년 전 십자가 행렬 현장에서 예수님 대신에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의 아들입니다.

로마서에 소개된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시몬의 아내였던 것이죠.

‘억지로’ 오리를 가고가 할 때 십리를 가는 마음으로, 그렇게 ‘억지로’ 십자가를 진 시몬의 아들이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존 비비어처럼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도록 감동을 주실 때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게 싫지만 ‘억지로’라도 말 벗이 될 때 주님께서 구원의 길로 초대할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내 형편도 넉넉지 않지만 두렙돈 드린 가난한 과부의 마음처럼 주님의 감동하심에 ‘억지로’라로 순종하여 드릴 때 내 자손에게 놀라운 복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저와 여러분들이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셔서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으로 삼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오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존 비비어가 텔레비전에서 미식축구를 보고 있을 때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할 때 그가 왜 불평한지 알 수 있지 않느냐?”

기도하는 것보다 미식축구가 훨씬 더 재밌기 때문이지 않더냐?”

하지만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게 나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였지 않더냐?”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을 짊어지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셨기에 고난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한 것 아니더냐?”

하지만 십자가 고난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아셨기에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진 것 아니더냐?”

그 예수님이 피곤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다 쓰러질 때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란 자는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더냐?”

그런데 그것이 훗날 그의 자녀가 참된 신앙의 본이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오리를 가고자 할 때 억지로라도오리를 가고 십리까지 가줘야 하지 않겠느냐?”

누군가 오른편 뺨을 칠 때 왼뺨까지 내미는 심정으로 억지로라도웃어줄 때 그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지 어찌 알겠느냐

주님께 너에게 감동을 주셔서 무언가를 원하실 때 억지로라도순종할 때 네 자녀에게 그 복이 임하지 않겠느냐?”

십자가는 희생이요 헌신이요 죽음인데 주님께서 네게 억지로그걸 짊어지길 원할 때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찬양)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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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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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어느 아들과 어머니가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들이 말합니다.

“어머니, 저 오늘 정말로 교회가기 싫어요. 오늘 한 번만 딱 빠지면 안 될까요?”

어머니가 말합니다.

“안된다. 가야 된다.”

 

아들이 말합니다.

“저, 오늘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가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장로님 기도가 너무나 길어요. 그 기도 중에 저는 잠들어 버립니다.”

“둘째 성가대에서 너무 듣기 싫은 불협화음이 들립니다.”:

“셋째 주일날 원 없이 늦잠 좀 자보고 싶어요.”

 

그러자 어머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네가 오늘 교회에 가야할 진짜 이유가 세 가지 있단다.”

“첫째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 사람보고 교회에 가느냐? 하나님 보고 가는 것이기에 가야 한다.”

“셋째 결정적으로 네가 그 교회 담임목사가 아니냐?”(웃음)

 

(깨달음)저도 힘이 빠지면 그럴 때가 있고 여러분도 마음껏 늦잠 자고 싶은 날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십자가를 짊어지는 심정으로 억지로라도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주님 앞에 나올 때 주님께서 구레네 시몬과 그 자손에게 베푸신 복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예화2)이웃 교회 목사님이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수요일 저녁에 평소에 헌금을 하지 않던 성도가 헌금 봉투를 강단에 올렸습니다.

별생각 없이 그 봉투를 성경책에 끼웠습니다.

물론 주일날에 헌금위원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헌금에 대해 한 달 정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성경책은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한 달 동안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가 그 헌금 생각이 나서 그 성경책을 열어 헌금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봉투는 그 성경책 속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헌금도 그대로 있나 보려고 봉투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그 순간 그 목사님은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헌금 액수가 천만 원이 되는 자기앞 수표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달 동안 방치한 것이나, 그걸 잃지 않은 것이나, 그 액수로 인해서 너무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헌금한 성도님을 불러서 그 헌금한 사유에 대해 묻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도는 평소에 그렇게 큰 액수의 헌금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적금을 들어서 일억 원을 타게 되었습니다.”

“속에서 천만 원의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음성을 자꾸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헌금을 하기 싫었습니다.”

“지난 주에 적금을 탔는데 수요일을 넘기고 주일까지 기다리면 마음이 변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요일날 억지로 그 헌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십자가를 짊어지는 것도, 헌금을 하는 것도, 순종하는 것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면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마귀의 유혹을 이길 길이 없다는 것이죠.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정말로 기분 좋아서 콧노래 부르면서 이삭을 장작더미에 올려놓았겠습니까?

육신의 인정과 애정을 억지로라도 누르면서 이삭을 바치지 않았겠습니까?

주님 앞에 시간을 드리는 것도, 물질을 드리는 것도, 그럴 때가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짊어질 때 그 가정과 후손이 복을 받은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런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일날 몸이 좋지 않고 피곤할 때면 마음껏 자고 싶을 때가 있어요.”

주님. 십일조를 드리는 데 그것이 아까워서 드리고 싶지 않을 때도 있어요.”

주님. 이삭을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할 때 콧노래를 부면서 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이 피곤해도 십일조가 아까워도 이삭을 바치는 괴로워도 억지로라도 드릴 때 후대에 복을 주신 것처럼 저에게도 동일한 복을 부어주실 줄 믿어요.”

어떤 일이든지 주님께서 감동과 감화를 주실 때 억지로라도 순종하게 하셔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주님께서 맞이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통해 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면 억지로라도 짊어질 수 있도록 붙잡아주세요.”

그것이 저와 제 후손에게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시는 부활의 영광이 되게 하실 줄 믿어요.”

 

(찬양)십자가 그 사랑 멀리 떠나서 무너진 나의 삶 속에 잊혀진 주 은혜

돌 같은 내 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의 자녀라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이전에 행한 모든 일 생각지 않으리

사막에 강물과 길을 내시는 주 내 안에 새 일 행하신 주만 바라보리라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의 자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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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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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려주일을 맞이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일주일간의 행적 가운데 금요일날 십자가를 짊어지고 길을 가다 쓰러졌습니다.

그때 로마 군인은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란 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했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불평할만한 그래서 거부할만한 십자가였지만 마지못해 짊어진 그였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짊어진 그 십자가로 인해 훗날 그의 아들 루포와 그의 아내는 참된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것도, 주님께 시간을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도, 자식을 드리는 것도, 힘들 때가 왜 없겠습니까?

누군가 오리를 가고자 할 때 십리를 가는 것도, 겉옷을 달라고 할 때 속옷을 내주는 것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짊어지듯 순종할 때 주님께서는 나와 내 자손에게 놀라운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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