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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발췌)한비야가 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녀는 사십대 중반의 케냐 안과 의사를 소개합니다.
그 의사를 만나려면 케냐 대통령도 며칠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한 의사라고 말하죠.
그런데도 그는 깡촌에서 전염성 풍토병 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궁금한 한비야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주 유명한 의사인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험한 곳에서 일을 하고 있나요?”
그러자 그 의사는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면 너무 아깝잖아요.
무엇보다도 이 일이 제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를 돈 버는 데만 쓴다면 인생이 무의미하지 않겠냐는 것이죠.
의술을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명성을 누릴 수 있지만 그는 보이는 세계를 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시고 기뻐하실 그 모습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의사도 찾지 않는 그 깡촌에서 가슴 뛰는 일에 뛰어들며 자기 생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지금도 낮은 자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그 지역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죠.
(적용)주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이 바로 그런 일꾼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지닌 재능으로 얼마든지 세상의 명성과 부를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슴 뛰는 일에 묵묵히 헌신하는 이들 말입니다.
세상의 크고 화려한 교회가 많지만 우리 같이 작은 교회를 세우고자 자기 손해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을 감내하는 분들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꾼 아니겠습니까?
엿새 동안 세상의 분주함 속에 지내고 주일날도 사업과 일을 위해 세상속에서 뛰어들어야 함에도 주님 앞에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쏟아붓는 예배자가 있다면 진정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 나라의 일꾼인 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그런 일꾼 그런 헌신자들을 기뻐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05319
(역배)골로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로 이송된 후에 가택연금에 처했을 때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A.D.60-62년경의 일이었죠.
골로새교회는 고린도교회나 에베소교회처럼 바울이 직접 그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세운 교회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란 도시(The city of Colosse)는 에베소에서 동쪽 내륙으로 160km 지점에 위치한 곳이라고 했죠.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사후 휘하 장수 안티오쿠스 3세가 통치할 때 그 주변에 ‘리쿠스강’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건설되었죠.
그때 골로새 지역 사람들은 검붉은 모직천과 올리브와 무화과를 생산해서 돈을 벌어들였고 그리스인과 유대인과 해외 상인들까지 몰려들었죠.
그만큼 골로새 지역은 다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유대교와 헬라신들과 황제숭배사상이 판을 치는 복합적인 도시가 된 것이죠.
B.C.100년경부터는 골로새 인근에 또 다른 새로운 상업도시가 세워졌는데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가 그곳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요한계시록의 7개 교회 중 하나이고 ‘히에라볼리’는 ‘파묵칼레’로 유명한 온천 지역이죠.
그 골로새 도시가 무역으로 번성할 무렵 에바브라는 상인(골1:7)이 에베소 지역에 갔다가 바울을 만납니다.
그때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의 두란노 상가를 빌려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사역을 하고 있었고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코자 편지도 쓰고 사람도 직접 보냈죠.
그때 에바브라는 바울이 전하는 주님의 복음을 영접했고 그 길로 자기 고향 골로새에 가서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었죠.
그러자 빌레몬도 주님을 영접하고 그 집 사람들 모두가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 집에서부터 교회가 태동됐으니 그것이 골로새교회의 태동된 과정이었죠.
그 이후에 에바브라는 그 인근 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까지 가서 교회를 세우는 주님의 일꾼이 된 것이죠(행19:9-10).
문제가 골로새 지역의 다문화 사람들로 인해 골로새교회에도 여러 문제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헬라의 이원론 사상은 물론이고 유대인들의 할례와 의식과 절기와 같은 율법주의, 그리고 황제숭배사상까지 파고든 것이었죠.
그때 골로새교회의 창립맴버인 에바브라는 로마의 셋집에 가택연금상태로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와 골로새교회 형편을 알린 것이었죠.
그때 바울은 펜을 들어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혼합주의와 유대 율법주의와 황제숭배를 경계하도록 편지를 쓴 것이죠.
골로새서 1장 1-14절까지 인사말과 감사와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들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너희가 하늘의 소망을 두면서 지금껏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고 말이죠.
1장 15-29절까지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죠.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그리스도(골1:17),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골1:18)의 터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라고(골1:23) 말이죠.
2장 1-23절까지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거짓된 철학과 속임수를 잘 분별하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영은 깨끗하고 육은 더럽다는 이원론 사상이나 유대율법주의와 금욕주의가 고상한 것 같지만 오직 말씀에 뿌리박고 흔들리지 말라고 말이죠.
3장1-4장 6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면 땅의 것을 좇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골3:1-2) 살라고 말이죠.
4장 7절-17절까지는 이 편지의 전달자와 바울의 지인들과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한 인사말이 나와 있습니다.
마지막 4장 18절에는 바울의 개인적인 인사말로 골로새서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깨달음)지난 시간에 우리가 본문을 통해 살펴본 부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을 때 십자가 죽음의 대속이 불완전하다는 뜻인가, 하고 오해할 수 있다고 했죠.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셨는데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고난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복음을 전하고 지금 로마의 가택연금에 처했는데 그 삶의 모든 과정에서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으로 여겼습니다(갈6:17).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 모든 초점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면서 겪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겪은 고난은 주님께서 이미 본을 보여주신 일이었죠.
우리 주님께서 겪은 고난의 파토스와 패션은 십자가 수난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여 사시면서 겪은 모든 아픔과 괴로움과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마굿간에 태어나셔서 비천에 처한 자들을 공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 밑에서 목수 일을 배웠고 일찍 돌아가신 일로 인해 어머니와 형제들을 책임지며 괴로움과 고통을 겪으셨죠.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 죄인이 아니었기에 세례받을 이유가 없었지만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친히 세례를 받으셨죠.
공생애 시작 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40일간 굶주리면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셨는데 그 또한 고통과 괴로움의 고난이었죠.
그 후에갈릴리 주변에서 귀신들린 자와 각색 병든 자를 일일이 만져주시면서 고쳐주고 치료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 문둥병자를 만지면서 고쳐주셨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도 주님은 품어주시면서 그 아픔을 공감해주셨습니다.
당시에 세관원은 모두가 죄인취급하던 사람이었는데 세리 레위도와 세리장 삭개오도 품어주시고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셨죠.
특별히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는데 나사로의 죽음 앞에 괴로워하고 비통해 우셨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지상에서 선포하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신 모든 사역이 고난이셨는데 그것을 헬라어로 ‘파토스’ 영어로 ‘패션’이라고 부릅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 제목도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뜻이죠.
주님의 그런 고난의 삶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모습이 십자가 사건 아니겠습니까?
그 사건이 있기 전부터 주님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고난받고 죽임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죠(마16:21).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체포당할 때 제자들이 배신하고 도망칠지라도 묵묵히 끌려간 것이었죠.
그날 밤부터 주님은 날이 밝아오는 아침까지 다섯 번의 법정에 끌려다니면서 조롱과 침뱉음과 수모와 수치의 고난을 겪으셨죠.
그리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실 때까지 너무나도 괴로워하셨고 그런 소리까지 질렀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그리고 마지막에 죄악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면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실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그로서 이 땅에 성육신하시면서 겪은 모든 수고와 슬픔과 괴로움의 고난을 완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을 친히 담당하셨기에 부활하신 이후 지금까지도 주님의 자녀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돌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면서 겪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면서 사는 것도 주님께서 그 본을 보여주셨기에 따라가는 것이죠.
그것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골로새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와 빌레몬도 그리고 그 인근 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교회를 세원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적용)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을 겪고 있다면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며 사는 삶인 줄 믿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처한 산모의 아이가 태어날 때 미역국이라도 끓여서 먹여 준다면 그또한 주님의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것이죠.
건강하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가업을 책임지고 엄마와 형제들을 돌보는 자식이 있다면 그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사는 것이죠.
이미 세례를 받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지만 누군가 세례받을 때 그와 동행하고 격려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자죠.
자식들이 장성하고 결혼해 걱정거리가 없지만 예수님처럼 금식하면서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있다면 그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새기는 자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는 사람이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고 그에게 뭔가를 베푸는 이가 있다면 그 역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짊어지는 모습이겠죠.
나사로의 죽음 앞에 아픔과 눈물을 흘린 주님처럼 누군가 상을 당했을 때 장례식장에 찾아가 아픔을 나눈다면 그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새기는 일이겠죠.
공동체에 해로운 일이 생길 때 자기 불리함을 생각하며 떠나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처럼 끝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남는 이가 있다면 그 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새기며 사는 분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처럼 자기 일한 품삯으로 예배당을 임대하고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편지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면서 자기 재물을 헌신하는 이가 있다면 그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새기는 분이겠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헐벗고 굶주리고 매질을 당하고 수모와 수치를 겪는 분이 있다면 그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짊어지는 분이겠죠.
에바브라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사업적인 손해까지 감수하며 헌신하는 분이 있다면 그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새기는 자이겠죠.
빌레몬처럼 자기 집과 물질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하는 분이 있다면 그또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새기는 그리스도인이겠죠.
오늘도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바울과 에바브라와 빌레몬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지금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새기며 사는 그리스도인인 줄 믿습니다.
그런 고난의 삶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사는 자들의 이마에 어찌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고난의 삶을 자기 몸에 새기며 사는 자들에게 어찌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주님의 상급을 베풀어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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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살펴 볼 말씀은 본문 25절인데 다시 한 번 다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원해)바울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운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맡긴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는 ‘종’ ‘시중 드는 자’ ‘웨이터’로 해석하는 단어입니다.
철저하게 낮아져서 섬기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 쫓고 신약성경의 3분의 2를 쓴 위대한 사도 중의 사도 아닙니까?
그렇다면 가는 곳마다 대접받고 환영받아야만 했지만 오히려 가는 곳마다 수고와 슬픔과 고통의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전혀 게으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자 일꾼이 된 그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꾼’으로 번역된 ‘디아코노스’라는 단어는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 ‘디아’(δια)와 ‘먼지’를 뜻하는 “코니아”(κονια)의 합성어입니다.
옛날 일꾼들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청소하고 추수하고 쟁기질하고 거름더미의 거름을 짊어지고 나르면서도 불평 하나 하지 않았죠.
그렇게 주님을 위해 먼지를 뒤집어쓰면서까지 분주하게 일하면서도 불평 하나 없던 일꾼이란 단어가 ‘디아코노스’입니다.
바울이 그런 주님의 일꾼으로 에바브라가 빌레몬이 그런 주님의 일꾼으로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충성했다는 사실입니다.
(원성)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씀 가운데도 디아코노스라는 단어가 사용된 게 있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마20:26)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어야 하리라”(막9:3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막10:45)
(깨달음)모름지기 주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은 주님의 일꾼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살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렇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도 불평이나 원망없이 주님의 고난을 짊어지고 사는 주님의 일꾼이 되라는 것입니다.
(적용)신약성경에 과연 그런 일꾼으로 산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겐그레아 교회의 디아코노스였던 뵈뵈란 사람이 그런 일꾼으로 살았습니다.
‘뵈뵈’(Φοίβη)라는 이름은 ‘빛나는’(radiant)이란 뜻입니다.
얼굴이 예쁘거나 몸매가 아름다워서 빛이 난다는 게 아니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헌신하고 있기에 그녀의 모습에 빛이 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6장 1-2절을 통해 그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왜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디아코노스 뵈뵈를 추천한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녀는 여러 사람과 바울에게 보호자가 될 정도로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충성한 일꾼이었다는 거죠.
여기에 ‘보호자’라는 ‘프로스타티스’(προστάτις)는 ‘곁에 서다’는 뜻인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뜻하는 단어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광야 길을 걸을 때나 어려움을 겪을 때 지켜주시는 모습(신32:9-10,시37:28-31)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외롭고 서러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는 모습(시146:9,잠2:8,사49:8)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육신하셔서 지상에서 겪은 모든 고난 때문에 우리가 겪는 고난을 위로할 수 있죠.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 곁에서 친히 돌보시고 도우시고 모든 고난에 위로하시는 ‘파라클레토스’이십니다.
고린도교회 옆의 외항에 있는 겐그레아교회의 디아코노스 뵈뵈가 그런 일꾼이요 위로자로 성도들의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그 곁에서 함께 했기 바울이 쓴 로마서를 로마교회에 전달토록 한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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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며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아주 유명한 의사인데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먼지를 뒤집어 쓰며 일하는 그를 주님께선 참된 일꾼으로 기뻐하지 않겠느냐?”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겪은 힘겨움과 괴로움과 고통과 슬픔과 십자가 죽음이 고난의 연속이요 하나님의 일꾼된 모습이지 않겠느냐?”
“바울이 주님 때문에 굶주리고 수모를 당한 것도 지금 가택연금에 처한 것도 주님의 일꾼으로 사는 모습이지 않았더냐?”
“에바브라가 상인으로 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한 것도, 빌레몬이 주님의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자기 집과 재물을 헌신한 것도 충성스런 일꾼의 모습이지 않았더냐?”
“고린도교회 옆에 있던 겐그레아교회의 뵈뵈도 누군가 아프거나 외롭거나 힘들 때 그 곁에서 함께 위로하던 주님의 일꾼이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누군가에게 미역국을 끓여주고 장례식장에서 위로하고 형제들을 돌아보고 왕따당한 이의 곁에 함께 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는 일꾼이지 않겠느냐?”
“네가 바울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너의 물질과 재능을 헌신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꾼이지 않겠느냐?”
“네가 에바브라와 빌레몬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충성을 다하고 낙심한 자를 위로한다면 어찌 너를 기뻐하지 않겠느냐?”
“네가 겐그레아교회의 뵈뵈처럼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듯 궂은 일도 다하고 고통과 괴로움과 눈물짓는 이들 곁에서 위로하며 산다면 어찌 너를 귀히 여기지 않겠느냐?”
“오늘도 이름없이 빛도 없이 그런 주님의 일꾼이요 보호자로 누군가에게 보모가 되고 다리가 되고 위로자로 살 때 주님께서 어찌 너의 이름을 그분의 이마에 새겨주지 않겠느냐?”
(찬양)내 구주 예수님 주 같은 분은 없네 내 평생에 찬양하리 놀라운 주의 사랑을
위로자 되시며 피난처 되신 주님 나의 영혼 온 맘 다해 주를 경배합니다
온 땅이여 주님께 외쳐라 능력과 위엄의 왕 되신 주
산과 바다 소리쳐 주의 이름을 높이리 주 행한 일 기뻐 노래하며
영원히 주님을 사랑하리라 신실하신 주의 약속 나 받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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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예수전도단에서 파송한 이용주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본래 그분은 큰 배를 타는 마도로스였고 1등 항해사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찾아와 당신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아프리카 선교현장으로 가라”하는 부르심과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죠.
그곳에서 그는 우물 파는 NGO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물을 한 번 파고 나면 체중이 6kg 정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죠.
한번은 다른 지역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우물을 팠습니다.
가뭄이 심해서 땅은 그대로 굳어 있고 사람들은 목마름으로 힘들어하던 곳이었죠.
그런데 이용주 선교사님과 동역자들이 온 힘을 기울여 수고한 결과 그 우물에서 물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나오자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춤을 췄습니다.
이용주 선교사님과 동역자들도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 틈 속으로 주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용주야, 고맙다. 나는 네가 너무 고맙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마음이 다 녹아내리고 감격과 기쁨이 솟아올랐다는 것이죠.
바로 그와 같은 주님의 기쁨, 주님의 격려하심 때문에, 지금도 그는 분쟁지역을 돌면서 주님의 디아코노스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뻐하심, 주님의 격려하심, 주님의 외로하심도 같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자랑할 것 없고 내세울 게 없다 해도 주님의 기뻐하신 일에 주님의 일꾼으로 섬길 때 우리를 향해도 동일한 격려의 음성을 들려주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너무 고맙다. 나는 네가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내기도)그렇기에 주님 앞에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주님의 기쁨이 되는 일꾼으로 살고 싶어요.”
“제 이로움만 좇아 사는 자가 아니라 힘들고 괴로워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먼지를 뒤집어쓰는 주님의 일꾼으로 살기를 원해요.”
“이용주 선교사님처럼 아프리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해외로 나가지는 못해도 제 주변에서 누군가의 보모가 되고 울타리가 되는 삶을 살게 해 주세요.”
“바울처럼 에바브라처럼 빌레몬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제 물질과 재능도 헌신하는 일꾼으로 삼아주시길 원해요.”
“뵈뵈처럼 제 주변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곁에서 다리가 되고 버팀목이 되는 주님의 일꾼이요 위로자가 되게 해주세요.”
“제게는 그런 힘도 능력도 없으니 주님께서 그런 힘과 능력과 은혜를 부어주시길 원해요.”
“그때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너무 고맙다’ ‘나는 네가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격려해 주실 줄 믿어요.”
(찬양)위로하여라 네가 아플 때 내가 너를 위로했듯이
눈물 닦아 주어라 네가 울 때 내가 네 눈물 닦아 줬듯이
사랑은 나로 말미암는 은총 사랑은 나로 말미암는 선물
사랑은 나로 말미암는 긍휼 사랑하라 사랑하라
위로하여라 네가 아플 때 내가 너를 위로했듯이
눈물 닦아 주어라 네가 울 때 내가 네 눈물 닦아 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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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성육신 하신 이후부터 공생애 사역을 거쳐 십자가에 죽을때까지 고난의 연속이셨습니다.
바울도 에바브라도 빌레몬도 그리고 뵈뵈도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자들이요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살았습니다.
다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달란트와 재능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먼지를 뒤집어쓰고 헌신한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사십대 중반의 케냐의 안과 의사도 낮은 자들을 돌보는 보모요 다리요 위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살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우물파는 이용주 선교사도 고통당하는 이들의 친구요 보호자인 주님의 일꾼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나라를 위해 그런 보모로 다리로 보호자로 위로자로 살 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기뻐하시고 자랑스럽게 여겨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 속에 사는 자들이 사순절의 십자가를 자기 몸에 채우는 자들이요 주님의 충성스런 일꾼으로 사는 은혜 안에 거하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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