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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진시황은 기원전 259년-210년까지 생존한 진나라 31대 왕이자 중국 최초로 황제로 호칭한 인물입니다.
만리장성을 쌓은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세상의 모든 권력과 부를 쥐고 엄청난 궁녀까지 거느린 사람이죠.
세상의 모든 걸 가졌지만 만족하지 못한 채 그는 더 오래도록 권력과 부를 누리고자 불로불사(不老不死)하는 불로초를 찾고자 했죠.
그때 신하 중 하나인 서복이 3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거느리고 ‘바다 건너 삼신산으로 가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하죠.
그가 도착한 곳은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 중 하나인 영주산 곧 지금의 한라산이었습니다.
한라산에 오른 서복은 영지버섯과 당귀를 캔 후에 산에서 내려와 곧장 진시황에게 가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서쪽 포구인 서귀포해안의 절경에 감탄해 즐겼고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 영영 눌러 산 것이었죠.
그 사이 진시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토록 갈망하던 불로초는 맛도 보지 못한 채 수은 중독과 열사병으로 50세의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권력과 재물만 있으면 모든 걸 할 수 있고 불로초만 구하면 늙지 않고 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그도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었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이 세상에 늙지 않고 죽지 않게 하는 신비한 약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나무 등지에서 자라는 영지버섯이 좋고 팽나무 곁에서 자라는 황제보다 더 좋다는 상황버섯이 좋다고 해도 불로불사하는 약초는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나오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그것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 바로 그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을까 싶어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습니다.
그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생한다면 죄악을 안고 영생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내보낸 것이었죠.
그러나 그 생명나무는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다시금 복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장 7절에 주님께서 친히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적용)이 세상의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땅 위에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어려움도 당하고 고통도 당하고 환경오염으로 날로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죠.
그만큼 이 땅에서는 불로불사 할 약초나 열매가 없습니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예루살렘 성이 임하면 그때 비로소 생명나무열매를 먹고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생명나무 열매는 죽어서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땅 위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05319
(역배)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이란 유배지에 끌려가 환상을 보고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도미타아누스 황제의 치세 때 황제숭배사상이 만연했는데 황제를 신으로 떠받들고 절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당하고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죠.
당신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떠받들고 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만 왕의 왕으로 섬기며 모셨죠.
그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극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았는데 그걸 피해 지하 예배처소인 카타콤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모임을 가졌죠.
그들이 발각당하거나 밀고당하지 않도록 그들만의 신앙표시인 ‘익두스’ 곧 물고기 표시를 암호로 삼고 믿음을 지킨 것이었죠.
그런 상황속에서 A.D.94년경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사도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간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진 섬이 밧모섬이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진 흑산도와 같은 위치에 있는 섬이죠.
사도 요한은 그곳에서 1년간 지낸 다음에 네르바 황제가 즉위할 때 밧모섬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그때 1년 전 밧모섬에서 환상으로 본 그림 언어를 글로 써서 소아시아 7교회에 편지한 것이었죠.
그 당시 다른 사도들은 순교당하고 사도 요한이 붙잡혀갔을 때 수많은 성도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걱정하고 더 염려하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을 어떻게 도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천상의 어전회의였습니다.
욥기서 1장의 천상회의처럼 그리고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미가야가 본 천상의 어전회의처럼 말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상의 어전회의를 주관하시면서 수많은 천사에게 의견을 내도록 했겠죠.
그때 수많은 천사가 내놓은 의견 중에 가장 좋은 안을 채택한 게 요한계시록에 담긴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영을 천상으로 불러올려 이전에 있던 일과 지금 있는 일과 앞으로 될 일을 보여주며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격려하는 것 말입니다.
그 믿음을 지킨 이들에게 온갖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케 해주실 것이요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을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은 서론 격으로 사도 요한이 ‘본 것’ 곧 ‘과거에 있던 일’을 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지금 있는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소아시아 7교회가 지금 처한 상황은 어떤 것인지, 칭찬받을 일은 무엇이고 또 책망받을 일은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것이죠.
그리고 4장-22장까지는 요한의 영을 천상에 들어올려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 곧 ‘미래에 있을 일’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물론 미래 내용만 담겨 있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 내용도 포함돼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와 있는 ‘일곱 교회’는 그 당시의 교회는 물론이고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7’이란 숫자는 충만수를 뜻하는 바로 그 당시의 소아시아 7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향한 위로와 권면을 담고 있는 것이죠.
그 일곱교회는 현존하는 모든 교회의 샘플로서 순전한 믿음을 지킨 교회도 있고 우상을 좇아 섬기는 교회도 있다는 사실이죠.
그 일곱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죽은 자들도 있고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신앙심을 보인 교회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교회들조차 셩령으로 운행하시면서 보호하시는 분이고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며 충성하는 자들에게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케 하여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깨달음)그렇기에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쓰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것이요 그들을 격려하고자 요한계시록을 쓰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대표자로 사도 요한을 환상 가운데 이끌어 올려 천상의 어전회의에서 나온 그림언어를 보게 했고 그걸 글로 써서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내도록 한 것입니다.
그 글을 읽는 교회마다 그 편지를 보는 성도들마다 지금의 믿음 상태가 어떤지 돌아보고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믿음을 굳게 지켜 최후 승리를 얻도록 하고자 말이죠.
(적용)지난 시간에 살펴본 요한계시록 22장 1절은 요한계시록 21장과 맞닿아 있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은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모습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 성은 온갖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곳으로 이 땅에서는 황금과 보석이 가장 값비싼 것이지만 그곳에서는 가장 흔한 돌과 같은 것이었죠.
더욱이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햇빛보다 밝기에 빛이 필요치 않는 곳이요 죄도 어둠도 죽음도 없는 곳이기에 성문을 닫아놓는 일도 없었다고 했죠.
그토록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본 것은 ‘생명수의 강’이었습니다.
그 생명수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자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명수를 마시는 자마다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고 영원토록 사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었죠.
그렇기에 그 생명수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초막절 끝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을 향해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믿는 자는 성경이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그렇기에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그 생명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요 어떤 핍박과 환란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그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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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새 예루살렘 성에 흐르는 생명수와 더불어 생명나무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원해)여기에 ‘생명나무’에서 ‘나무’로 번역된 헬라어 ‘크쉴론’(ξύλον)은 ‘나무’(wood)와 ‘목재’(timber)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나무를 가리키는 다른 헬라어가 있는데 ‘덴드론’(δενδρον, 마3:10, 마7:19, 갈3:13, 계8:7)이 그것이죠.
둘 다 신약성경에 19회 쓰였는데 크쉴론과 덴드론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덴드론’은 대부분 살아 있는 나무를 가리키고 ‘크쉴론’은 자른 나무 곧 죽은 나무(눅23:31, 행5:30, 행13:29, 계22:14)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무 위에 매달려 죽으셨는데 십자가 나무를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크쉴론’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를 베어서 십자가 형틀로 사용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나무에 위에 매달린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나무는 죽음에서 부활한 ‘생명나무’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5장 25절에 나오는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꾼 나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나와 홍해를 건너고 수르 협곡을 거쳐 마라에 당도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마실 물을 찾고자 마셨는데 그 마라의 물이 쓴 물이라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나무를 취해 그 물에 던지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그 물이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변화된 것이었죠.
그야말로 죽어 있던 물이 살아 있는 샘물로 바뀐 것입니다.
바로 그 나무가 실은 ‘생명나무’요 곧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나무 아니겠습니까?
(원성)그래서 갈라디아 3장 13절과 베드로전서 2장 245절에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깨달음)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무에 매달려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릴 수 없는 것이죠.
지금도 율법 아래에 얽매여 계속 짐승을 잡아 제사드리는 제사 행위를 반복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십자가 나무 위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모두 대속해주셨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죠.
그만큼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 분이 우리를 향한 영원한 ‘생명나무’가 되신 것입니다.
(적용)이 생명나무는 12가지 열매를 맺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요 이 땅에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이단들이 그렇듯 신천지의 이만희는 자신이 생명나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신천지는 이만희를 ‘이긴 자’라고 부르는데 이만희의 입에서 나오는 계시를 생명수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명나무의 열두 가지 열매를 신천지의 열두 지파로 해석하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만희가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죠.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은 이만희가 이긴 자가 아니라 환란과 풍파 속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킨 자가 ‘이기는 자’인 줄 믿습니다.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의 좌 우편에 있는 생명나무는 이만희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영생수를 마시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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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새 예루살렘에 입성케 하시고 생명나무 열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오늘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불사하는 영생초를 마시고자 그토록 갈망했지만 끝내 먹지 못하고 50살에 요절하지 않았더냐?”
“그만큼 모든 권력과 부요와 쾌락을 누리며 살지라도 이 땅에 영생하는 나무는 없지 않느냐?”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십자가 나무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지 않더냐?”
“그 나무에 매달려 죄를 속량해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열어주신 분 아니더냐?
“신천지의 이만희가 이기는 자거나 생명나무가 아니라 오직 죄와 사망의 문을 열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꿔준 그 나무도 실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않겠느냐?”
“아론의 지팡에서 싹이 난 것도 죽음의 문을 열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아니겠느냐?”
“네가 겪는 고난과 곤고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승리할 때 새 예루살렘에 입성케 하는 은혜를 베풀지 않겠느냐”
“친히 나무에 매달려 네 죄를 담당하신 그분을 생명의 주님으로 모실 때 지금도 네 인생에 싹이 나고 꽃피는 삶을 살게 하지 않겠느냐?”
(찬양)갈보리 언덕에 주님의 십자가 그 피로 내 죄를 깨끗하게 씻었네
아아 생명에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나무라
절망과 고통에 세상길 헤매일 때 예수님 품으로 나를 인도하셨네
아아 생명에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나무라
지나온 인생길 부끄러움뿐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감사만이 넘치네
아아 생명에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나무라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나무라
(예화)‘세 나무 이야기’(The Tale of Three Tree)가 있습니다.
올리브와 떡갈나무와 소나무의 원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동화죠.
이들 나무는 각자 특별한 존재가 되겠다는 큰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정교하고 화려한 보석 상자가 되어 그 안에 온갖 보물을 담는 꿈을 꾸었죠.
어느 날 나무꾼이 숲의 수많은 나무 중에서 그 올리브 나무를 선택해 베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아름다운 보석 상자가 될 기대에 부풀어했습니다.
하지만 더럽고 냄새나는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가 되었습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꿈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은 가치 없고 천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떡갈나무였습니다.
떡갈나무도 위대한 왕을 싣고 바다를 건널 거대한 배의 일부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무꾼이 자신을 베었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무꾼이 자신으로 조그만 낚싯배를 만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떡갈나무는 슬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는 소나무 차례였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사는 소나무의 유일한 꿈은 언제까지나 높은 곳에 버티고 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섭리를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번개가 치더니 소나무를 쓰러뜨렸고 그 꿈도 모두 빼앗아가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나무꾼이 쓰러진 소나무를 가져다가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은 세 나무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세 나무의 꿈은 모두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리아와 요셉은 아이를 낳을 곳을 찾지 못해 헤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마구간을 발견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 구유에 뉘였습니다.
그 구유는 바로 그 올리브 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귀중한 보석을 담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때 올리브 나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하나님의 아들을 담게 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은 키와 지혜가 자라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크고 멋진 배가 아닌 작고 초라한 낚싯배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낚싯배는 그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떡갈나무는 위대한 왕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더 좋은 계획이 있으신 것이었습니다.
그 떡갈나무는 만왕의 왕을 태우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몇몇 로마 병사들이 그 소나무가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찾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 소나무는 곧 땔감 신세가 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병사들은 그 소나무를 작은 두 조각으로 쪼개 십자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레서 그 소나무에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것이었습니다.
그 소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을 보여주는 표상이 되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세 나무는 모두 자신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여긴 채 더 이상 희망을 품지 못한 나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가장 요긴한 나무로 쓰임받게 된 것입니다.
(적용)예수님께서 매달린 그 십자가 나무도 누군가 버렸거나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나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 나무에 매달려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그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 오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어떤 나무로 존재하든지 간에, 어떤 형편에 처한 나무든지 간에, 주님의 섭리 안에 생명나무와 같은 존재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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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도)우리가 이 시간에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올리브 나무일 수도 있고 떡갈나무일 수도 있고 소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보석상자가 되고 싶고 왕을 싣고 다니는 멋진 배가 되고 싶고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보여주고 싶은 그런 나무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올리브나무의 바람대로 떡갈나무의 바람대로 소나무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기 예수를 품은 말구유통과 예수님과 제자를 싣고 다닌 갈릴리의 작은 배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든 소나무가 되게 해 주셨네요.”
“그것보다 더 소중한 생명나무와 같은 존재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한 생명의 나무가 되어 주신 것처럼 저도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그런 생명나무로 써 주시길 원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작고 초라할지라도 주님나라와 주님의교회를 위한 생명나무로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는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주님의 생명나무 도구로 삼아주시옵소서.”
(찬양)갈보리 언덕에 주님의 십자가 그 피로 내 죄를 깨끗하게 씻었네
아아 생명에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나무라
절망과 고통에 세상길 헤매일 때 예수님 품으로 나를 인도하셨네
아아 생명에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나무라
지나온 인생길 부끄러움뿐이지만 주님의 은혜로 감사만이 넘치네
아아 생명에 꽃 피었네 열매 맺었네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나무라
나는 다시 태어났네 그 이름 생명나무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불로불사하는 영원한 생명의 약초나 나무는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나무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올리브나무든 떡갈나무든 소나무든 어떤 형편속에서도 주님을 위한 생명나무의 도구가 되길 원하는 분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아론의 죽은 지팡이에 싹이 나고 꽃이 피듯 주님을 위한 생명나무로 쓰임받는 자들에게 인생의 꽃을 피우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자들이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는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주님의 생명나무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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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1-5)_2024년 1월 21일 주일설교문 (0) | 2024.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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