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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나면 대낮에 잠을 좀 자야 되는데 그럴 수 없는 처지였죠.
밤에 잠을 자려고 몸부림을 쳐도 잠이 오지 않고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모습이 몇 개월째 계속되었죠.
그때 2시 무렵이면 시골 작은 방 마루에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팝송을 듣곤 했습니다.
MBC 아나운서 출신이던 김기덕 씨의 ‘2시의 데이트’에서 내 보내주는 팝송이었죠.
그 시절에 기억나는 팝송은 스모키의 ‘what can I do’(나 어떡해?)였습니다.
또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s’(날 고향으로 데려다 주오)도 있었고 그 밖에 많은 팝송이 흘러나왔죠.
물론 팝송만 틀어주는 게 아니라 김창환과 함께 하는 ‘산울림’ 노래도 많이 틀어줬는데 아주 많이 들었던 노래가 ‘나 어떡해’였죠.
불면증으로 온 밤을 지새우고 나면 아침에 해롱해롱하다가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무렵이면 더 나른하지 않습니까?
그때 지는 햇볕을 받으며 그 팝송과 여러 노래를 들으면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으로 조그마한 위안을 줄 뿐 영적으로 참된 위안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참된 위안을 주는 것은 그 무렵 기독교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여러 목사님들의 메시지였습니다.
그 무렵 기독교 방송을 통해 제 불면증 사연도 보내면서 기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연이 접수가 되어 아주 귀한 오픈 성경 한권을 선물로 받기도 했죠.
어쩌면 그때 거친 과정들을 통해 글을 쓰는 도전을 처음 시도해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깨달음)여러분은 저와 같은 불면증을 겪어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처럼 몇 달은 아닐지라도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맞이할 때 어느 누가 불면증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풀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몇 날을 끙끙 속앓이하면서 지새우는 그 한 밤의 시간들 말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불면증도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내 스스로 힘이나 방법을 통해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그 문제도 어느날 갑자기 풀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분들도 알 수 있는 일이죠.
그렇게 고심하고 속앓이하던 문제가 풀리고 나면 그 고통스런 밤도 그 괴로운 시간들도 내게 은총의 새 날을 열어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는 것이죠.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말입니다.
어둠이 거치면 빛이 찾아오듯이 말이죠.
고통이 지나가면 평안이 찾아오듯이 말이죠.
나쁜 일이 지나가면 좋은 일이 다가오듯이 말이죠.
그러니 지난 날의 불면증과 어둠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빚으시려는 새 날의 아침을 준비하는 과정과도 같은 것이죠.
(적용)그것은 죄와 사망의 땅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죠.
그들은 400년 넘게 파라오의 노예로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면서 애굽 땅에서 나갈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간구했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른바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게 하셔서 그 피를 본 이스라엘 집은 죽음의 재앙을 넘어가주셨죠.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밤에 일어났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해가 저물 오후 3시 무렵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인방에 발랐고, 애굽 전역의 집에는 죽음의 재앙이 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죽음의 재앙이 넘어간 것이었죠.
그리고 밤이 될 무렵 애굽 전역에는 모든 장자와 짐승의 초태생이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곳곳에 통곡과 슬픔이 터져나왔죠.
그때 그 완연한 밤에 더 이상 바로가 붙잡지 못하고 나가라고 할 때 그 밤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을 꾸려 애굽을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한 밤은 400년간이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는 기쁨의 새 날을 맞이하는 밤이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금요일 오후 3시부터 안식일을 맞이하기 준비하고 저녁무렵에 참된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저녁은 참된 자유와 기쁨을 맞이하는 새로운 날의 시작과 같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지나면 빛이 찾아오듯이 밤이 지나면 새벽이 밝아오듯이 고통이 지나면 기쁨이 찾아오듯이 말입니다.
그만큼 그들이 맞이한 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는 소망의 새 날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머잖아 맞이할 육신의 죽음도 실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새 날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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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논리나 이성으로 규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수용해야 할 말씀이라고 했죠.
과학기술 태초를 규명하려고 하지만 빅뱅이론의 그 폭발의 힘은 외부에서 온 것인데 누가 그 폭발의 힘을 가했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메바나 단세포 동물이 원숭이와 유인원이 되었고 그것이 진화하여 사람이 됐다고 하지만 그 중간단계도 없고 원숭이 피를 사람에게 수혈할 수도 없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의 창조는 복잡한 시계를 만든 시계공처럼 누군가 이 우주와 지구를 설계하고 디자인한 것이요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 앞에 우리는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경외할 수밖에 없다고 했죠.
그 분을 나의 창조주로 모신다는 것은 내 생명도 주님의 것이요 내 목숨도 내 삶도 내가 가진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심을 믿고 사는 걸 뜻합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 말이죠.
그런 청지기로 이 땅에 살다가 내 수명을 정하신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나를 부르실 때 그분의 영원하신 하나님나라로 천군천사의 인도와 함께 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믿는 자들은 어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지라도 결코 요동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나일강은 완만해서 홍수가 폭우가 쏟아져도 서서히 차오르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줄기는 좁고 가팔라 홍수나 폭우앞에 걷잡을 수 없이 모든 게 쓸려나간다고 했죠.
퐁수와 폭우가 쓸고 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고대근동의 갈대아 우르 지역의 달신을 숭배하는 이들이 얼마나 헛된 신을 숭배하는지 알도록 하기 위해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다스리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밝혀주었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운행하신다’는 것은 새끼 독수리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서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펴거나 새끼 독수리가 세상을 향해 날기 시작할 때 낭떠러지에서 품어 올려주는 날갯짓과 같다고 했습니다.
400년간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독수리 날갯짓으로 업어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것이죠.
2024년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같은 일들이 몰려올지라도 성령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당신의 날갯짓으로 친히 품어안아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전개)지난 시간에 나눈 말씀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광명체의 빛 곧 해와 달과 별과 같은 그 빛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연계의 빛은 넷째날에 지으셨다고 창세기 1장 16절 이하에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첫째날의 빛은 자연계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밝혀주는 진리와 생명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임재와 영적인 깨달음을 안겨주는 빛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악을 밝혀내 진리로 인도하는 그 빛 말입니다.
죽음을 알게 하셔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오게 하는 그 빛 말이죠.
오직 성공과 출세만을 목적으로 삼은 바울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실때도 그 빛으로 찾아오신 것이었죠.
(깨달음)죄와 사망에 빠져 있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실때도 마찬가지죠.
깊은 인생의 수렁에 빠져 있을 때도 우리 주님은 진리와 생명의 빛으로 찾아와 나를 건져주시고 안아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본문)이 시간에는 본문 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원해)여기에서 빛을 낮이라고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다고 하는데, 낮과 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진리와 생명이 그 빛이요 그 빛이 낮에 해당되는 것이죠.
그와 반대되는 것이 바로 거짓과 죽음이요 그것이 어둠이자 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임재와 대비되는 것들을 깨닫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생명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그 첫째날을 설명하면서 밝힌 게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사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씀은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창1:5,8,13,19,23,31) 계속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저녁과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저녁은 다릅니다.
우리말 ‘저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레브’(עֶרֶב)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할 때 그 밤이 히브어로 ‘라일’(לַיִל, midnight, 출12:29)입니다.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에레브’는 정오의 태양이 서산으로 점점 기울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에레브’는 해가 완전히 지기 직전의 시간들로서 하루를 종결하는 준비하는 시간이자 밤을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루가 끝날 때와 하루가 시작될 때의 분기점이 ‘에레브’입니다.
‘에레브’는 구약 성경에서 ‘저녁’ ‘해질 때’ ‘저물 때’ 등(창1:5, 출12:18, 레23:32)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에레브’는 정오인 낮 12부터 시작하는 저녁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일’은 ‘에레브’와 달리 ‘한 밤중’을 뜻하는 말입니다.
해가 기울어 완전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깔리는 시간입니다.
모두가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요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시간입니다.
물론 ‘두 저녁’을 구분 짓는 시간이 오후 3시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출애굽기 12장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 저녁에 그 피를 발랐고 밤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에레브’ 곧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는 오후 3시에 유월절 어린 양을 피를 발랐고 ‘라일’ 곧 한 밤 중에 애굽을 빠져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시간도 마찬가지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그 시각에 숨을 거두셨고, 바로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유월절 밤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7
(깨달음)그렇다면 오후 3시 무렵 곧 ‘에레브’의 때에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의미가 왜 중요한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오후 3시 무렵부터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해가 완전히 기운 밤이 되면 유월절을 시작하는 것이요 그 전인 오후 3시부터 유월절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우리가 예배를 준비하는 것도 주일날 11시가 되기 전부터, 아니 그 전날 오후 3시부터 준비한다면 얼마나 더 뜻이 깊겠습니까?
유월절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며 주일예배를 준비하는 모습 말입니다.
(적용)그런 차원에서 볼 때 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니라 둘째날이니라 셋째 날이니라’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녁’을 뜻하는 ‘에레브’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는 시작점이자 저녁의 시작을 알리는 분기점이 된다는 것이죠.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이 완성된 시간이 바로 그 저녁 곧 ‘에레브’였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저녁’은 어둠은 죽음을 알리는 시간이자 실은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열리는 관문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 저녁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발라 애굽에서 해방되는 날을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서 그 에레브 그 오후 저녁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출발점을 누리게 된 것이죠.
이것은 우리의 일상속에서 적용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시기 전에 연단의 밤을 반드시 통과하게 하신다는 사실이죠.,
우리를 교만치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성결케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고난과 역경의 밤을 통과하게 하신 후에 정금같이 사용하시는 것이죠.
그런 과정을 통해 참된 생명의 그릇으로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혹여라도 2024년을 시작하는 1월달에 큰 어둠을 맞이한 분이 계십니까?
아니면 작년부터 혹은 그 전부터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불면증과 같은 밤, 고난의 밤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다시는 새 날을 맞이할 것 같지 않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그런 환란의 밤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분명코 새 아침의 날이 밝아오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 밤에 그 에레브 때에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말입니다.
그 분을 생명의 주님으로 믿는 자에게 어찌 그 눈물과 고통과 욱여쌈의 밤을 통과하여 새 날을 맞이하지 않게 하시겠습니까?
그토록 춥고 눈보라치던 그 한 겨울도, 꽁꽁 얼어붙던 그 한겨울의 때도 봄날에 다 녹는 자연의 이치를 보여주신 것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심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으로 죽음당하신 그 저녁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새 날을 허락하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주음성)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그 밤도 하나님께서 끝내게 하시고 새 날을 맞이하게 해 주시지 않았더냐?”
“도저히 네 힘으로 풀 수 없는 그 문제로 고통의 밤을 맞이했는데 너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풀어주셔서 기쁨의 새 날을 맞이하도록 해 주지 않았더냐?”
“400년간 애굽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도 밤마다 눈물로 지새웠지만 유월절 양의 피를 그 저녁에 바르게 하시고 그 밤에 해방의 새날을 열어주지 않았더냐?”
“예수님께서 그 저녁 오후 3시에 십자가에 숨을 거두셨기에 오늘 너에게도 영생의 새날을 맞이하게 하신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맞이하고자 해가 기우는 오후 3시부터 안식일을 준비하는데 너도 주일을 그런 마음과 자세로 준비하며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께서는 네가 교만하지 않도록 자고하지 않도록 너에게 고통의 밤을 통과하게 하실 때가 있으니 그때도 낙심치 말고 온전히 창조주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설령 2024년 초입에 네게 불면증이 찾아오고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일로 인해 고난의 밤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독수리 날갯짓으로 품으시사 새로운 아침의 날을 맞이하게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에게 임한 밤 때문에 괴로워하고 답답해할지라도 낙심치 않았으면 좋겠구나”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그 아들과 함께 너에게도 해방과 자유와 기쁨의 새 날을 밎아하게 하실테니 말이다.”
“그러니 2024년 한 해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하루의 밤과 아침을 맞이할때마다 하나님께 더 겸손하고 더욱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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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깊은 밤 홀로 우는 그대여 그대 눈물을 내가 아노라
그대 눈물은 가슴을 적시고 발을 적시고 땅 위에 내린다
그대 아픔을 내가 같이하노라 그대 슬픔에 내가 기쁨 주리라 그대 눈물을 내가 다 마시노라
깊은 밤 홀로 기도하는 그대여 그대 기도를 내가 듣노라
(전개)“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이 구절은 창세기 1장에 6번 기록됐는데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없습니다.
7일째 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7일 동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생각하지만 하루하루의 ‘일’ 곧 ‘날’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욤’(יוֹם)은 24시간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곳에서는 하루로 쓰였지만 밤의 반대편을 뜻하기도 하고 인생의 날로, 어느 기간을 칭할 때도 ‘욤’이 쓰였습니다.
더욱이 태양이 있어야 하루 24시간이 되지만 창세기 1장 14절의 ‘광명체’도 히브리어로 ‘마오르’(מָאוֹר)인데 성소 안의 ‘등불’(출25:6, 출27:20, 시74:16)을 쓰인 단어죠.
(원해)그만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쨋날 둘째날 셋째날 여섯째날 이 모든 ‘수’와 ‘날’은 하루하루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의 ‘수’와 ‘날’은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과 언약’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칠’ 곧 ‘일곱’을 뜻하는 히브리어 ‘쉐비이’(שְׁבִיעִי)는 ‘완전’ ‘충만’ ‘전체’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와 어근이 같은 ‘샤바’(שָׂבָע)가 ‘가득히 차다’는 곧 ‘충만’으로 뜻였습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사바)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3:10)
신약시대에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강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성찬식(마26:26)을 행하셨죠.
‘일곱’은 예수님께서 칭하신 생명의 떡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언약을 맺은 자들은 일곱 인을 떼고 일곱 대접을 붓고 일곱 나팔을 불 때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깨달음)그렇기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하는 그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단순히 날의 개념보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나아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날들도, 내 인생이 70이든 100살이든, 그 모든 날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언약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자 영생의 나라에 입성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안에 사는 자들에게 풍성한 식탁 넘치는 포도즙을 가득히 채워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이죠.
그 언약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는 다윗이 고백한 그대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축복의 주인공으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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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차를 사주겠다고 말이죠.
그런데 아들은 대학에 합격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차를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는 조건으로 아들에게 성경을 주면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말씀 안에 차보다 더 좋은 보화가 있을 것이다고 했죠.
그 말을 들은 아들은 화가 나서 대학 근처에서 하숙하는 동안 결코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자신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불평하면서 대학 4년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이제 졸업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숙 생활을 마치고 짐을 싸는데 선반 위에 아버지가 주신 성경책이 먼지에 쌓여 있었습니다.
아들은 먼지를 툴툴 털면서 무심코 그 성경책을 뒤적거렸는데 그 속에서 종이 쪽지 한 장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종이는 자동차를 사고도 남을 만한 액수의 수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표는 기한이 지나서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그제야 성경을 읽으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4년 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던 자신의 우둔함을 애석해하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닜까?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하고자 집에 도착했을 때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차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몇 년 동안 그 수표가 사용되지 않는 걸 알고 아들이 졸업하고 집에 돌아올 즈음 그 선물을 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아버지의 언약을 알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세월을 보냈네요.”
“아버지의 참된 언약을 알때에만 아버지가 약속한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줄 믿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니라 둘째날이니라 그 날들도 실은 일곱 완전수를 향한 하나님의 안식과 언약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었네요.”
“오늘 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언약을 맺고 말씀에 순종할 때 샤바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 언약 사는 자들에게 집을 얻게 하시고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고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고 배불리(שָׂבַע) 먹게 하신다고 약속(신6:10-11)하셨으니 제가 그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서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게 준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이웃에게 전하여라
그러면 네가 짓지 않은 큰 집을 주리라 네가 심지 않은 과실을 먹게 하리라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면증에 시달리고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밤을 맞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밤들을 통해 새날을 여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날 둘째날 여섯째날 그 모든 날들도 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날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향한 과정으로 주님께서 주신 그 날들의 청지기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에게 차를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아버지가 언약을 맺었는데 그걸 믿지 못한 아들이 불평속에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언약의 말씀을 좇아 청지기로 사는 자들에게 집과 우물과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다고 언약으로 약속해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십자가 언약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고 그 복을 누리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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