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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전개)하루 일과 중 오후 3시가 되면 마감을 준비합니다.
오전 9시나 그 이전이나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 점심을 먹고 오후 일을 하다 3시에 술참을 먹습니다.
그때부터는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는 단계로 접어듭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 저녁이 되면 쉼을 얻고 잠자리에 빠져들죠.
그래야 쉼을 얻고 육체가 풀리고 생각도 비어낼 수 있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루하루의 일과는 일주일이 되고 그것이 그 일주일이 모여 한 달이 되고 일생이 되는 것이죠.
인간의 일생도 그와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임도원’처럼 갓태어난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아장아장 걷다가 ‘할아버지’ ‘할머니’하면 얼마나 흐뭇해 하겠습니까?
그런 유아기를 지나 초중고를 거쳐 청년기에 이르고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다 서서히 노년에 접어들죠.
그때가 되면 인생의 오후 3시처럼 나머지 일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때죠.
그런데 그런 날이 언제쯤 올까 싶지만 우리의 지난 날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처럼 영원한 안식의 날도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하셨지만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지 않았지만 불현듯 도적같이 오시는 것처럼 말이죠.
그 날이 되면 진짜로 ‘속히 오셨구나’하고 탄식할 사람도 있고 믿음으로 인내한 사람들은 감격하며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예)실제로 제가 힘들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늦깎이 대학시절에 새벽이 되면 인력공사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지하 물탱크청소 빌라5층건물에 사모래를 지고 올라간 일과 소가죽 염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죠.
겨울철 봉동읍에 있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 아시바를 해체하는 일도 위험스럽기는 마찬가지였죠.
그렇게 일을 하고 밤이 되면 대학교에 수업받으러 갔는데 그야말로 졸음 반 수업 반이었습니다.
그러니 낮 시간의 뙤약볕 아래에서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언제 이 날들이 지나갈까?’ ‘어쩌면 이 고된 인생이 끝나지 않는 것 아니야?’
‘내게도 과연 행복한 날이 찾아오기나 할까?’
그렇게 힘겨운 생각들을 하면서 4년을 보냈는데 그 또한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지나간다고 하듯 말입니다.
언제 훈련병 시절을 마치고 이등병을 달까 싶은 '조세민'도 올해 9월에 전역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힘든 기간을 인내하며 통과한 자들에게는 분명코 새날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적용)그것은 신앙생활에도 적용이 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 백성이나 초대교회에 로마황제의 핍박을 견딘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렇죠.
애굽에서 300년 넘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보냈겠습니까?
애굽의 고센 땅에서 파라오를 태양처럼 떠받들며 국고성 라암셋과 비돔을 건축하는 일에 투입되었죠.
매일같이 강제노동의 현장에 끌려나갈 때면 언제 이 지긋지긋한 삶을 청산할까 생각했겠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하나님께 기도하며 산 것이죠.
‘하나님. 언제 우리를 이 애굽 땅에서 내 보내주실 것입니까?’
‘언제 이 지긋지긋한 고된 노역에서 해방시켜주실 것입니까?’
‘제발 하루 빨리 이 고통스런 강제노동현장에서 저희들을 건져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면서 그들을 돕고자 천상의 어전회의를 통해 계획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유월절 오후 3시에 양을 잡아 그 피를 집에 바르게 하셨고 밤이 되어 모두가 애굽을 빠져나가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었죠.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해방과 자유의 날이 인내하며 기다린 보람을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적용)로마 황제의 핍박과 회유를 받고 인내하며 살던 초대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 누구든지 간에 로마 황제의 신상 앞에 절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던 시대였습니다.
만약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긴다면 고발당하고 감옥에 들어가나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던 시대였죠.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카타콤 지하예배 처소에 모여 따로 예배하며 기도하며 믿음을 지켰죠.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주신 것처럼 저희들도 로마의 황제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세요..’
‘이 기간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요. ‘언제쯤 기쁨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힘겹게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 때 어찌 하나님께서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셨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 천상의 어전회의를 통해 천사들에게 방도를 제시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천년을 장악한 로마도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하셨고 기독교도 공인시켜 주셔서 마음껏 주님을 경배하게 하신 것이었죠.
그렇기에 주님을 믿고 사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것 때문에 낙심이 밀려와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오후 3시가 돠면 하루를 정리하고 저녁에 안식하듯 우리 인생의 오후 3시를 지나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날에서 맞이할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에는 이 땅과 달리 수고와 눈물과 괴로움과 고통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05319
(역배)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이란 유배지에 끌려가 환상을 보고서 쓴 편지입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신으로 숭배케 하게 만드는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그 후 5대 네로를 거쳐 11대 황제 도미타아누스 치세 때 황제숭배사상이 모든 속국에 시행케 했죠.
당연히 기독교인들도 로마 황제의 신상 앞에 절을 해야만 상거래를 하며 먹고 살 수 있었죠.
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치세 때 많은 그리스도인이 감옥에 들어갔고 많은 이들이 화형당하거나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식 때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다는 이유로 야만인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핍박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카타콤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이었죠.
그곳마저 밀고 당하거나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만의 신앙표시였던 ‘익두스’ 곧 물기기 표시를 암호로 삼으며 살아간 것이었죠.
바로 그 시점인 A.D.94년 경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 유배를 간 것입니다.
밧모섬은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져 있는 섬입니다.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진 흑산도와 같은 섬이죠.
1081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났는데 정약전도 흑산도로 유배갔죠.
사도 요한은 그 이듬해 네르바 황제가 즉위할 때 밧모섬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1년 전 밧모섬에서 환상으로 본 그림언어를 글로 써서 소아시아 7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이죠.
다른 사도들은 순교당하고 사도 요한이 붙잡혀갔을 때 수많은 성도들은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성도들보다 더 걱정하고 더 염려하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신앙인들이 두려움과 걱정에서 사로잡혀 있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더더욱 걱정하는 것이죠.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 황제의 핍박과 환란을 겪는데 어찌 가만히 계실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일어서서 스데반 집사를 바라보고 격려한 것처럼 말이죠.
그런 성도들을 돕고자 하나님께서 하날나라에 천상의 어전회의를 여신 것입니다.
욥기서 1장의 천상회의처럼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미가야가 본 천상의 회의처럼 말이죠.
하나님께서 천상의 어전회의를 주관하시면서 수많은 천사들에게 의견을 내도록 했겠죠.
그때 수많은 천사들이 각자은 의견을 내놓았고 그중에 가장 좋은 안이 채택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그림 형태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어서 편지로 써서 소아시아교회 성도들에게 읽으며 권면토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은 서론 격으로 사도 요한이 ‘본 것’을 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3장은 ‘지금 있는 일’을 기록한 것이죠.
소아시아 7교회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칭찬받을 일은 무엇이고 책망받을 일은 무엇인지 일깨워준 것입니다.
그리고 4장-22장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래 내용만 나와 있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 내용이 함께 들어 있어서 잘 분별해야 하죠.
중요한 것은 계시록 2-3장에 나와 있는 ‘일곱 교회’는 그 당시의 교회는 물론이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7’이란 숫자가 충만수를 뜻하듯 7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향한 위로요 권면입니다.
그 일곱교회를 향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했는지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계2:1)로 소개하죠.
서머나 교회에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계2:8)로 소개합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계2:12)로 소개합니다.
두아디라교회에는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계2:18)로 소개하죠.
사데 교회에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계3:1)로 소개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계3:7)로 소개하죠.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에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3:14)로 소개합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예수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지금도 7개 교회 곧 세상 모든 교회에 운행하시며 불꽃같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으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며 살라는 것이죠.
어떤 핍박과 환란이 닥쳐와도 결코 흔들리지 말고 주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인내하라는 것이죠.
(적용)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죠.
우리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핍박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상대방에 욕하면 이에는 이로 맞서고 싶지만 예수님 때문에 참는 것 자체가 핍박이라 할 수있죠.
눈 한 번 딱 감으면 큰 것을 얻을 수 있는데 거짓말하지 말고 속여 빼앗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다들 악한 길을 좇고 죄인의 길에 들어서고 오만하게 사는데 예수님 때문에 의로운 길을 좇아 겸손하게 사는 것도 힘든 일이죠.
세상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좇아 사는데 믿음 때문에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것을 생각지 않고 주어진 삶에 자족하며 사는 것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믿음 때문에 인내하며 핍박과 갈등을 이겨내고자 할 때 누가 더 염려하고 걱정하겠습니까?
신실한 자녀들, 말씀대로 인내하며 살고자 하는 자녀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염려하고 걱정하죠.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천상의 어전회의를 통해 신실한 믿음의 자녀들을 돕고자 회의를 하며 게획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그날 그들이 행한 대로 상급을 주시는 아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116349
(본문)오늘 읽은 22장은 사도 요한이 환상가운데 하늘에 올라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을 본 마지막 부분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전개)사도 요한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 길 가운데 흐른 것을 본 거죠.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고 열 두 가지 열매를 맺고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이것은 계시록 21장에 이어지는 것인데 장차 임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 성의 외형과 사방으로 난 열 두 문에 대한 설명을 계시록 21장에서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은 온갖 보석으로 치창돼 있고 문도 모두 진주로 돼 있다는 것이죠.
이 땅에서는 황금과 보석이 가장 귀하지만 새 예루살렘 성에는 황금이 돌같이 흔하다는 것이죠.
더욱이 새 하늘과 새 땅 그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햇빛보다 밝기에 빛이 필요치 않는 곳이라고 하죠.
물론 새 하늘과 새 땅 그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는 성문을 닫아 놓을 일이 없다고 하죠.
거기는 밤도 없고 어둠도 없고 죄악도 없고 죽음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황제를 숭배하듯 가증한 것을 숭배하는 자들이나 거짓말 하는 자들은 그 성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죠.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깨달음)오늘 읽은 1절 말씀은 그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 놓여 있는 생명수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생명수는 창세기의 에덴동산에도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은 강물이 흘러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부터 흘러가 온 대지를 풍요롭게 합니다.
그 모습을 연상케 하듯 회복될 낙원에도 성 한 가운데에 생명수가 흘러 온 대지를 풍요케 하고 피조물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수의 시작점이 어디로부터 시작됩니까?
하나님과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보좌로부터 시작된 생명수의 강이 거룩한 예루살렘 성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이죠.
(원성)이 생명수의 강은 에스겔 선지가 본 것(겔47장)과 똑같습니다.
그 당시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발 강가에서 환상 가운데 새 성전을 본 것이죠.
그 환상 가운데서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흘러나와 강을 이루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에스겔은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물을 생명수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과 고기가 되살아날 것(겔46:9)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순즌 지금 우리 가운데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초막절 끝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을 향해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믿는 자는 성경이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깨달음)그 모든 말씀이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 당신이 영원한 생명수이심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리고 밧모섬에 유배갔을 때 머잖이 임할 새 예루살렘 성에서도 생수의 강이 흐르는 걸 본 것이죠.
(적용)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그와 같은 새 예루살렘 성과 생명수를 보여주신 걸까요?
인생의 오후 3시를 준비하며 살되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인내하며 하나님나라에 입성할 소망을 품도록 한 것이죠.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3:1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13992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들도 인생의 오후 3시를 내다보며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여 영생수를 마시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때문에 남이 알지 못하는 고통과 핍박과 유혹속에 살고 있는 걸 왜 주님께서 모르겠느냐?”
“로마 황제 치세 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온갖 핍박과 회유 속에서 인내할 때 오히려 주님께서 그들을 걱정하시고 천상회의를 열지 않았더냐?”
“지금도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공산권 국가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네가 들어서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자유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너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 때문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때문에 남이 알지 못하는 고통과 괴로움과 갈등을 겪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그 괴로움도 인내의 수고도 오후 3시가 지나가면 다 사리지고 밤을 맞이하듯 머잖아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날이 너에게 다가오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때문에, 손해보거나 따돌림당하거나 뒤쳐진다고 해도 낙심치 않았으면 좋겠구나.”
“예수님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더 큰 부를 누리지 못한다고 주변에서 손가락질한다해도 낙심치 말고 인내하며 좋겠구나.”
“이 땅에 성공이 성공이 아니요 이 땅에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돼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성공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과 갈등도 주님께서 격려하시고 천사들을 통해 돕고자 하지 않겠느냐?”
“네 인생의 오후 3시를 지나 밤을 맞이할 그때 네가 새 예루살렘 성에서 주님의 생명수를 마시며 영생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으면 좋겠구나.”
(찬양)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 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길 다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주시리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주시리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60924
(예화)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여서 천상에 계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죠.
그때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그러자 사탄이 대답하기를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하고 말했죠.
이에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종 욥을 눈여겨봤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대답을 합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를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당신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려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셔 한 번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그는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죠.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마아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허락한 그대로 욥의 재물과 소유와 자식들까지도 다 걷어가버렸죠.
그런데 그때 욥이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그 모든 상황에 욥이 범죄치 않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치 않고 그렇게 믿음으로 인내하며 고백했습니다.
“주님. 내가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도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주님.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내게 있는 걸 가져간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만 찬양할 뿐입니다.”
그런데 다시금 천상의 어전회의를 통해 사탄이 하나님께 청을 또 넣죠.
욥의 몸을 치면 분명코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저주할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그때도 욥은 하나님 앞에 순전한 믿음으로 인내했고 훗날 참된 상급을 받게 되죠.
(깨달음)우리도 그와 같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무언가를 해 주시고 무언가 복을 베풀어주셨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아니라는 것 말이죠.
내가 지금 믿음의 삶을 굳게 지키는 것은 그 분이 이 세상의 창조주요 그 분이 이 세상의 심판주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움을 겪든지 어떤 환란을 당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 사는 자들에게 머잖아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케 하시는 은혜를 베풀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의 모습처럼 내가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 때문에 고난과 핍박과 갈등을 겪을 때 주님께서는 지금도 천상의 어전회의를 통해 나를 돕고자 하는 방책을 열어주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내 인생의 오후 3시가 피곤하고 고단해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 때문에 남모르는 핍박과 괴로움과 수모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천상의 어전회의를 여셔서 나를 도울 방책을 찾고 계실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게 하시옵소서.”
“이 세상의 성공이 성공이 아니요 이 세상의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걸 새 예루살렘 성에서 보길 원합니다.”
“욥이 사탄의 세력에게 모든 걸 빼앗겼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경주자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무언가를 해 주지 않아도 욥처럼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온전하심과 기뻐하심을 좇아 살게 하시옵소서.”
“내 인생의 오후 3시에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와도 주님의 은혜로 견디며 인내하게 하시옵소서.”
(찬양)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은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상거래가 막힌 시대속에 온갖 핍박과 고통속에 살았습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품도록 사도 요한에게 천상의 어전회의를 보여주며 머잖아 임할 새 예루살렘 성에서 살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고난과 핍박과 갈등이 닥쳐와도 인생의 오후 3시가 지나면 영원한 안식의 새나라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신앙생활 때문에 믿음으로 인내하는 자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지금도 천상의 어전회의를 통해 돕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수를 마시며 복된 자녀로 살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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