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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유머)어느 교회에 믿음이 좋은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가는 귀가 먹었죠.
그분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외출을 하고 싶어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이제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큰애야 외출을 하고 싶구나. 네가 나도 태워주겠니?”
“예, 어머니, 제 소나타 승용차로 모실게요.”
“애야, 이 에미더러 소나 타고 가라고! 쯧쯧쯧, 못된 놈 같으니라구”
이제 둘째 아들에게 말합니다.
“둘째야, 네가 나 좀 태워줘야겠구나?”
“예, 어머니, 제 아벨라 승용차로 가세요.”
“뭐야, 이놈이 망령이 들었나? 에미 나이가 몇인데 아를 베라 그러는 거야, 이놈아.”
그래서 셋째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이구, 셋째 너밖에 없구나.”
“어머니, 제 차는 그레이스 봉고차라 어머니가 타기엔 힘드실 거예요.”
그러자 그 권사님이 뭐라고 말했을까요?
“조금 힘들면 어떠니! 네 차는 은총(Grace)을 주는 차인데 말이다.”
(나예)작년에 동유럽성지 순례를 갔을 때 독일 땅을 맨 먼저 밟았습니다.
그때 입국심사를 받을 때 여권을 내밀었죠.
여권에 담긴 제 사진과 실제 얼굴이 다르지 않았던지 그것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제 옆에 장로님 한 분도 같이 있었는데 누구냐고 제게 물어보길래 일행이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왜 독일에 왔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동유럽 투어차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 뒤부터는 우리 일행들 모두가 순조롭게 입국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문제는 공항에서 밖으로 나가는 관문이었죠.
입국심사를 받을 때는 저보다 맨 앞에 서라고 해서 앞에 섰는데 공항 문을 나설 때는 다른 분들이 앞에 나섰습니다.
그때 저와 함께 들어왔던 장로님도 맨 앞에 다른 목사님과 나갔는데 그때 공항 경찰 둘이 그 분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때 그 장로님은 저에게 “목사님 왜 혼자 가요?”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괜히 그러시겠지 싶어, 그냥 들어가는 모습만 보며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알고봤더니 그 두 분을 대표자로 선정해서 가방과 몸의 소지품을 모두 검색했다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위험물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출입국 심사를 받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여권’입니다.
여권은 각 나라의 자국민이 외국에 여행을 갈 때 국적과 신분을 공적으로 증명해주기 위해 발급하는 것이죠.
상대국에서도 여권 소지자에 대해서는 그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제재할 수가 없죠.
코로나19때는 ‘면역여권’을 도입하려고 했죠.
9·11 테러 사건 이후부터는 전자여권을 도입하기 시작했죠.
전자여권은 칩이 들어가고 지문이나 홍채도 넣을 수 있죠.
현재 전 세계 인구 77억 명 중에 10억 명이 현재 전자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만큼 전자여권이 편리하기 때문이고 그 사람의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어서 출입국 관리에서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적용)그렇다면 천국에 가거나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임하는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할때는 어떨까요?
그때 필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면역여권이나 전자여권이 아니겠죠.
천국에 입성할 때나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필요하겠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그 종들의 이마 곧 우리의 이마에 새겨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돼 있는가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내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가도 정말로 중요한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60924
(역배)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창세기가 성경의 시작을 알리는 책이라면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책이죠.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끌려가 환상을 보고서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당시 도미타아누스 황제의 치세 때 황제숭배사상이 만연했죠.
만약 황제를 신으로 절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물건을 사고 팔 수도 없었고 온갖 핍박을 받아야 했죠.
그런 상황에서 A.D.94년경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 유배로 끌려간 것이었죠.
마치 1081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때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간 것처럼 말이죠.
밧모섬은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진 섬인데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0km 떨어진 흑산도와 같은 거리죠.
사도 요한은 그곳에서 1년간 지낼 때 환상으로 본 그림 언어를 보여주신 것이었죠.
왜 그렇게 했을까요?
당시 황제를 신으로 떠받들지 않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걱정하고 염려하셨죠.
어떻게 하면 당신의 자녀들을 도울 수 있을지 천상의 어전회의를 여셨죠.
그때 천군 천사들이 제시한 방법 중에 가장 좋은 안을 채택한 게 그것이었죠.
사도 요한을 천상으로 불러올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주면서 믿음으로 인내하도록 하고 그런 자녀들에게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케 하시고 상급을 베푸신다는 걸 보여주도록 말이죠.
바로 그것을 유배지에서 풀려났을 때 글로 써서 소아시아 7교회에 편지를 보내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인내하도록 한 것이었죠.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은 사도 요한이 ‘본 것’ 곧 ‘과거에 있던 일’을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죠.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지금 있는 일’ 곧 소아시아 7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한 기록이죠.
4장-22장까지는 요한의 영을 천상에 들어 올려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 곧 ‘미래 일’을 보여주죠.
중요한 것은 그 7교회는 당시의 소아시아 교회뿐만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향한 위로요 권면이라고 했습니다.
곧 오늘날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주님을 왕으로 경배하고 섬기는 우리 자신을 향한 말씀이죠.
(전개)요한계시록 마지막장인 22장은 새예루살렘성에 관한 모습을 보여주는 21장과 맞닿아 있는 말씀이라 했습니다.
새예루살렘 성은 온갖 황금과 보석으로 건립된 곳으로 그곳에서는 돌과 같이 흔한 것들이죠.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햇빛보다 밝기에 빛이 필요치 않는 곳이죠.
죄도 어둠도 죽음도 없는 곳이기에 성문을 닫아놓는 일도 없다고 했죠.
그러면서 사도 요한이 22장 서두에 말한 것은 ‘생명수 강’이었죠.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생명수였습니다.
그 생명수를 마시는 자마다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고 영원토록 사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죠.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에도 그 생명수가 흐르고 있었는데 새예루살렘성에 복원되는 것이죠.
물론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임할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해서만 그 생명수를 마시는 건 아니죠.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섬기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신다”(요4:14, 요6:35, 요5:78))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깨달음)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생명수 양 옆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생명나무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는 잎으로 사용된다고 했죠.
그런데 ‘나무’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가 둘이 있는데 ‘크쉴론(ξύλον)’과 ‘덴드론(δενδρον)’이라고 했죠.
‘크쉴론’은 살아 있는 나무를 벤 목재를 가리키고 ‘덴드론’ 살아 있는 나무 자체를 가리키죠.
예수님께서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그 나무가 ‘크쉴론’ 곧 ‘죽은 나무’죠.
하지만 주님은 그 나무에 달려 죽었지만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나무가 되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수르협곡을 거쳐 마라에 당도해 물을 마셨을 때 쓴물이었지만 한 나무를 던졌더니 단물로 변화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 나무 역시 죽음의 물을 생명수로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생명나무입니다.
고라의 자손들이 하나님께 반기를 들 때 각 지파의 대표자들이 죽은 나무 지팡이를 법궤 앞에 가져왔는데 아론의 지팡이 나무에서 살구나무 잎과 꽃이 피고 열매맺는 역사가 일어난 것도 같은 이치죠.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된 것도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능케 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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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말씀인데 본문 3-4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원해)새 예루살렘 성에는 다시는 저주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죽음도 애곡도 고통도 눈물도 없다는 뜻이죠.
왜냐하면 그곳에 어린 양의 보좌가 한 가운데 있고 그 분이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다.
그래서 그 종들이 무엇을 본다고 말씀합니까?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여기에 ‘본다’는 헬라어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는 그저 눈에 비치는 모습을 바라본다(behold)는 뜻을 넘어 ‘경배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해 경배하는 모습 말이죠.
(깨달음)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된다는 뜻입니다.
모세도 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등만 봤지만(출33:20, 출33:23)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해 보듯이 직접 보좌를 향해 경배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보좌에 계신 주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깨진 관계가 회복된다는 뜻이요 에덴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해2)그런데 누가 그런 은혜를 누릴 수 있는지 나옵니다.
“그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이마’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메토폰’(μέτωπον)인데 눈썹 위의 ‘이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경배하는 이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 ‘메토폰’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메짜하(מֵצַח)’인데 아론의 이마에도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를 이마에 붙이게 한 일(출28:38)이 있습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대제사장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제를 드리는 자였죠.
그 당시 1년에 한 번 대속죄일 때 지성소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 아론이었죠.
바로 그 모습을 연상하듯 훗날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모든 자녀들의 그 분의 이름을 이마에 새겨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만 그런 은혜를 누렸다면 새 예루살렘 성에는 모든 자녀들이 그런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죠.
하나님의 이름표가 있는 자들은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친밀하게 경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 땅에서 주님을 경배하지 않고 짐승을 따르는 자들 요한계시록의 표현을 빌리면 짐승을 따르는 자들은 사탄의 세력을 추종하는 자들이죠.
그들의 이마에는 짐승의 표가 새겨져 있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짐승의 숫자’요 ‘짐승의 표’인 666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걸 예전의 ‘바코드’로 또 지금은 생체칩이라고 해석해서 절대로 새기지 말라고 하죠.
하지만 생체칩은 짐승의 수 666이 아닙니다.
생체칩은 의료와 금융과 미아방지와 출입국제한과 위치추적과 신분보호용으로 이로움을 줍니다.
제가 연구하고 묵상한 ‘짐승의 수’ 666은 사탄의 세력이자 황제숭배사상에 물든 이들입니다.
지금은 이 세상의 것을 우상숭배하듯 사는 자들 정치권력에 기생하고 떠받드는 종교지도자들과 그 추종세력들이요 이단사이비 세력들이 모두 666입니다.
그만큼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이들의 이마에 지금도 짐승의 수가 새겨져 있는 셈이죠.
(적용)그렇기에 머잖아 임할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하늘나라 생명책에 내 이름이 새겨 있어야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내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은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키 위함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섬기는 이들이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탄의 세력을 좇고 짐승의 수를 좇아 세상 방식만을 좇아 사는 자들이 어찌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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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주님께서는 이 땅에서부터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들이 머잖아 임할 새예루살렘 성에서도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주시고 하나님의 보좌를 경배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외국에 입국할 때 여권이 필요하듯이 천국에 입성할때나 머잖아 임할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할때도 그런 게 필요치 않겠느냐?”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그곳,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게 하겠느냐?”
“그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그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만 그곳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 아니겠느냐?”
“이 땅에서 사탄의 세력이 이끄는 대로 우상을 숭배하고 돈과 명예와 쾌락만을 좇아 숭배하는 자들이 어찌 그 보좌를 바라보며 경배할 수 있겠느냐?”
“지금도 누군가는 생체칩을 666 짐승의 수라고 현혹하고 있지만 2천년 전 황제숭배상에 물들어 살 듯이 지금도 사탄의 세력이 부추기는 것을 좇아 살고 정치권력에 기생하고 아첨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그 세력들과 이단과 사이비 추종자들이 짐승의 수를 그 이마에 달고 사는 자들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머잖아 도래할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해서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기고자 할 게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지금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뻐하심과 온전하심을 좇아 살고 있는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보시고 너를 향해 ‘헵시바’요 ‘뿔라’라고 여겨주시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보실 때 ‘내가 너를 기뻐한다’ ‘너는 나와 결혼자 자구나’하고 그렇게 인정해주시는지 말이다.”
“네가 이 땅에부터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녀로 살아간다면 어찌 새 예루살렘 성에서 그 보좌를 향해 경배하는 특권의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겠느냐?”
(찬양)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성화)본래 ‘얼굴’이란 말은 ‘얼꼴’에서 나온 말이죠.
‘바다’도 흙도 오물도 모두 ‘받아주기 때문에’ ‘바다’라고 말하듯이 말이죠.
얼굴은 그 사람의 ‘얼’이 ‘꼴’에 드러나기 마련이죠.
범죄자나 사기꾼의 얼굴에 ‘선한 얼’이 드러날 수 없듯이 말이죠.
어렸을 때부터 형 에서를 속이고 형의 장자권까지 사로챈 야곱의 얼굴도 마찬가지 아니였겠습니까?
그 형을 속였고 그 형의 것을 가로챘을 때 얼마나 쾌재를 부르며 속으로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그 얼굴만은 속일 수 없었겠죠.
그때 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형의 낯을 피해 밧단 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망쳐 20년 넘게 고생고생하며 살았죠.
외삼촌의 양을 치며 살았지만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하듯이 외삼촌 라반의 야곱보다 더 악랄한 사기꾼이었죠.
야곱이 고생한 만큼의 댓가를 지불해주지 않고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한 라반이었죠.
그러니 야곱이 그곳에서 혼인을 해 네 명의 부인과 11명의 자식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목에 낳은 베냐민까지 12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자기 기업을 일굴 밑천조차 없었죠.
그때 야곱은 라반과 계약을 맺으면서 양들이 새끼를 벨 때 신통한 방법을 써서 자기 기업을 일구고 급기야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 라반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죠.
문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길목에 형이 400명의 군사를 동원해 자신과 식솔들을 죽이겠다고 벼른다는 소식을 접했죠.
그때 야곱이 어떻게 합니까?
식솔들과 양 떼를 먼저 보내고 자기 자신은 맨 나중에 얍복강에 남죠.
그런데 그날 밤 도저히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만나주지 않습니까?
그때 야곱은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천사와 씨름하듯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린 야곱이었죠.
그때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 곧 대퇴부를 쳤고 날이 새자 야곱은 절뚝거리면서 형 에서를 만나러 가게 되죠.
그런데 그토록 두렵고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절뚝거리며 오는 야곱을 본 형 에서는 그런 병신과 같은 동생을 죽여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오히려 측은지심이 생겼죠.
그런 과정을 통해 형 에서가 동새 야곱을 용서해 주고 둘은 화해하게 되죠.
(깨달음)훗날 야곱은 그곳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한 그 일을 두고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봤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브니엘’로 명명하죠.
히브리어 ‘브니엘’이란 ‘향하다’(turn)는 뜻의 히브리어 ‘파나(פָּנָה)’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야곱이 자기 꾀나 남을 속이는 것만 쫓으면 그 인생이 ‘야보크(יַבֹּק)’ 곧 ‘텅 빔(emptying)’의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인생은 머잖아 임할 새 예루살렘성에도 입성치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육적인 풍선을 모두 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비로소 야곱의 얼굴이 그 ‘얼꼴’이 드러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야곱을 해야 ‘네가 이제부터 진정으로 나를 향해 살고 있구나’하는 뜻으로 그의 이마에 어찌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주지 않겠습니까?
(적용)저와 여러분들도 야곱의 브니엘의 체험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강결한 회심의 체험, 이전에 사탄이 좋아하는 것과 우상숭배적인 요소와 짐승의 수가 좋아하는 것만 좇아 살았던 데서 온전히 돌아서는 그 체험 말입니다.
하나님을 거래의 차원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 체험 말입니다.
그런 브니엘의 체험을 통해 신앙 생활하는 그 삶의 태도가 그 얼꼴에 신실하게 드러나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 믿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갈 때 어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겠으며 어찌 새 예루살렘 성에 당당히 입성하여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은혜를 부어주지 않겠습니까?
(내기도)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가?
“그래요. 주님. 저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며 산다고 하지만 이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더 바라보며 산 야곱이었네요.”
“그런 인생은 아무리 쌓고 아무리 많이 모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야보크 텅 빈 인생뿐이네요.”
“다리를 절더라도 뭔가 부족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는 그 브니엘의 인생을 살게 해 주세요.”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실 것이요 제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주시줄 믿습니다.”
“그런 저에게 머잖아 도래할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경배하는 은총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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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의 믿음 수준이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경배하는 믿음의 수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날 동안 666 짐승의 수를 좇듯이 사탄의 세력이 좋아하는 것만을 취해 사는 세상 사람들은 결코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수가 없죠.
그들의 이마에 짐승의 수 곧 사탄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야곱이 자기 욕망만을 좇아 살 때는 그 인생이 야보크 ‘텅 빈’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 사는 브니엘을 바라보며 살 때 그때부터 그 인생이 새롭게 되고 어찌 그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주지 않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심을 좇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주실 것이요 머잖아 임할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해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 은혜를 마음껏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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