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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그 삶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고백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제 삶이 너무 힘듭니다. 주님 너무 힘이 드니 제 짐을 가볍게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녀는 이렇게 애원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그때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십자가를 잘라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 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뒤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강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하늘나라로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아래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그녀는 너무 서러운 나머지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면서 예수님을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7,마16:24)
그때서야 그 자매는 ‘아멘’ ‘아멘’하고 소리를 쳤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모름지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자들에게 고난은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고난의 삶을 사셨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런 고난이 뒤따를 것도 친히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적용)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그런 자녀들에게 하늘의 상이 클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이 훗날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상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만 왕의 왕이 되실 수 있었던 것도 십자가 고난의 죽음 없이는 될 수 없었습니다.
왜 십자가에 내려오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열두 군단되는 천사를 동원해서라도 당장에라도 진압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분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 분이 십자가 고난을 기쁨으로 감내하신 것은 영광의 부활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맞이하는 고난이 실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요 훗날의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다리가 되어줄 것이기에 기쁨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05319
(논지)사순절은 부활절 전으로 일곱 번째 주간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부활절까지 40일기간 동안 회개와 성화의 기간으로 삼는 절기입니다.
왜 40일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죠.
성경에서 ‘40’이라고 하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일어날 때 40주야간 비기 쏟아졌다(창7:17)고 기록돼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을 때 시내산에서 40일간 머물렀습니다(출24:18).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 머문 기간도 40년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호렙산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40일을 걸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면서 지내셨습니다(마4:1-2).
그 중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전 광야에 머물며 기도하신 40일의 시간이 사순절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것이죠.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기간입니다.
‘40’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진정으로 훈련받고 연단받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40일의 사순절 기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영적인 훈련과 변화를 갖는 기간입니다.
초대교회 신앙인들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해서 그때 이마에 재를 뿌리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 회개하는 전통은 스스로 진토만도 못한 죄임을 고백하는 구약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순절을 맞이한 우리 자신들도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삶을 참회하는 절기로 맞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만 해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며 사는 길이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골로새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돼 로마로 이송된 후에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에 있을 때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그때가 A.D.60-62년 경의 일입니다.
과연 골로새교회는 언제 어떻게 해서 세워진 교회일까요?
고린도교회나 에베소교회처럼 바울이 직접 그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세운 교회였을까요?
골로새란 도시(The city of Colosse)는 에베소에서 동쪽 내륙으로 160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B.C.500년경 그곳 골로새에서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간에 전쟁이 한창이었죠.
B.C.222-187년엔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 휘하 장수 안티오쿠스 3세가 통치했죠.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많은 유대인 가족들을’ 그곳 골로새에 이주시켜 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후 그곳 주변에 소아시아 남서쪽의 ‘리쿠스강’(Lycus river)을 통과하는 무역로를 건설하게 되고 그때부터 상업도시로 자리 잡게 되죠.
그 무렵 골로새 사람들은 ‘검붉은 모직천’(colossinum)과 올리브와 무화과를 생산하여 돈을 벌어들입니다.
그런 상업도시로 소문이 나서 그런지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골로새라는 도시에는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과 해외 상인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 됐습니다.
그런데 B.C.100년경부터 골로새 지역 인근에 또 다른 새로운 상업도시를 세우게 됩니다.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란 도시가 그곳이죠.
‘라오디게아’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7개 교회 중 하나이기도 하죠.
그리고 ‘히에라볼리’는 현재 터키의 ‘파묵칼레’로 유명한 온천 지역입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필수 코스로 하얀 석회암에 흐르는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도록 하죠.
그 히에라볼리는 A.D.87년 빌립 집사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 때 순교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처럼 두 지역이 점점 부각되는 상황이라 골로새 지역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죠.
더욱이 A.D.17년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와 A.D. 60년 네로 황제 치세 때 골로새에 큰 지진이 나서 무너지게 되죠.
급기야 A.D.400년경에는 골로새가 완전 폐허더미로 변하고 지금은 잡풀만 무성한 곳이 되고 만 곳입니다.
그런 골로새 도시에 교회가 세워졌다면 바울이 직접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운 것이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도시가 한창 번성할 무렵 골로새 지역의 상인 출신인 에바브라가 에베소 지역에 머물던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 들러서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그때 에바브라(골1:7)가 바울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그곳에서 160km 떨어진 자기 고향 골로새에 가서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죠.
그러자 빌레몬의 집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함께 모여 그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이 골로새교회가 태동된 과정이죠.
저희 시골교회도 옛날에 동네의 가정집에서 시작했고 사람들이 점차 모이자 마을회관에서 예배당으로 삼은 것과 같은 격이죠.
그때 상인이었던 에바브라는 그 인근의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 지역에도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행19:9-10).
문제가 골로새교회에 여러 혼합주의와 이단들이 교회 안팎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의 희랍신들과 헬라철학과 이원론 사상과 유대인들의 할례와 의식과 절기와 같은 율법주의 문제는 물론이고 황제숭배사상이 교회 안에 침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교회의 창립맴버인 에바브라가 로마의 셋집에 가택연금상태로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와 골로새교회 형편을 알린 것이죠.
그때 바울이 펜을 들어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혼합주의와 이단을 경계하도록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14절까지 인사말과 감사와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들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너희가 하늘의 소망을 두면서 지금까지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이죠.
1장 15-29절까지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죠.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그리스도(골1:17),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골1:18), 바로 그 분의 터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 안에 흔들리지 말도록 하라(골1:23) 말이죠.
2장 1-23절까지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거짓된 철학과 속임수를 잘 분별하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영은 깨끗하고 육은 더럽다는 헬라철학이나 유대율법주의와 금욕주의가 고상한 것 같지만 오직 말씀에 뿌리박고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하죠.
3장1-4장6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이라면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골3:1-2) 살라고 말이죠.
4장7절-17절까지는 이 편지의 전달자와 바울의 지인들과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한 인사말이 나와 있습니다.
마지막 4장 18절에서는 바울의 개인적인 인사말로 골로새서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116349
(본문)오늘 본문은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온 바울이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밝혀줍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24절)
(원헤)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말 ‘괴로움’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테마’(πάθημα)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 16번 사용됐는데 바울은 물론이고 베드로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suffering, passion)으로 사용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골로새교회 성도들 때문에 직접적으로 받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로 찾아온 에바브라에게 복음을 전한 것과 골로새 지역에 교회를 세운 일련의 일들이 주님의 십자가 고난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도 교회를 세울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바울이 골로새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는 상황도 주님의 복음 때문에 가택연금에 처한 상태였으니 그 또한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모습입니다.
‘기뻐하다’는 ‘카이로’(χαίρω)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십자가 대속을 통해 값없이 베푼 사랑의 은혜로 누리는 기쁨입니다.
무언가를 내게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구원해주신 그 은혜만 생각해도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
바울이 지금 감옥과 같은 가택연금 상태에 처해 있어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원해2)그런데 그 다음 부분은 조금 난해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에 ‘남은’으로 번역된 헬라어 ‘휘스테레마타’(ὑστέρημα)는 ‘부족’ ‘모자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부족해서 더 보충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다 이루었다’(요19:30)하고 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겪는 고난이 실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겪은 모든 고난의 흔적을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으로 생각했던 것(갈6:17)입니다.
(깨달음)머잖아 새 하늘가 새 땅의 새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예수님은 바울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아. 참 수고했다. 네가 나를 위해 받은 고난은 곧 나의 고난이었다”
바로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지금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 아니겠습니까?
바꿔 말해 주님을 위해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의 가택연금상태에 있으면서 기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이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적용)물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은 이때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이미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인사하고 헤어지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그 이후에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들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리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는 것을 이미 성령님게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죠.
바울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바울은 자신이 결박당하고 환란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다.
그것 역시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길임을,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0580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주님의 남은 고난을 짊어지고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시골에 사는 그녀가 짊어지고 사는 삶이 너무나도 무거운 십자가라며 주님께 잘라주라고 요청했을 때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십자가 무겁다며 계속 잘라달라고 했을 때 결국은 요단강을 건너야 할 다리가 너무 짧아진 것 아니더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야 하는 길인데 너에게 맞는 십자가를 너는 어떻게 짊어지고 있느냐?”
“바울도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이 너무나도 힘겨운 십자가를 짊어지는 길이지 않았겠느냐?”
“골로새 출신의 상인 에바브라가 에베소의 두란노서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골로새의 빌레몬에게 그 집에 교회를 세운 것 자체도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께서 너에게 맞는 십자가 네가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를 왜 주셨는지 기억하면서 짊어지고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바울에게 맞는 십자가 에바브라에게 맞는 십자가 빌레몬에게 맞는 십자가가 다 따로 있듯이 말이다.”
“지금도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겠느냐?”
“왜 나만 겪는 십자가 고난이냐고 그 무거움을 탓하고 하소연하기보다 그것이 훗날 천국의 다리요 새예루살렘 성에서 상급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찬양)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뒷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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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마카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푼 구원의 사랑을 받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주님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걸 봤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카리우스는 또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끈기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번 애원했죠.
이윽고 주님은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러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습니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죠.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너의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너의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주님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그때서야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와서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는 온 데 간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 배 없단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죽는 그런 십자가 고난을 짊어지라고 말씀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그 죽음의 십자가는 결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이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짊어지길 원하는 십자가는 우리 자신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바울에게 맞는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졌고 에바브라도 빌레몬도 각자에게 맞는 주님의 십자가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2960924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요. 주님. 제게 맞는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네요.”
“제가 짊어지고 살아야 할 십자가는 내 팽개치고 주님의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욕심을 부리기도 했어요.”
“때로는 제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주님께서 하소연하고 탄식한 적도 있었어요.”
“주님 바울은 바울에게 맞는 십자가를 짊어졌고 에바브라도 빌레몬도 각자 맞는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졌어요.”
“저도 저에게 부여하신 가정속의 십자가 일터의 십자가 교회에서 짊어지고 살아야 할 십자가를 바울처럼 기쁨으로 짊어지고 살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이 사순절 40일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에 더 동참케 하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사람으로 더 변화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제게 맞는 십자가 고난을 기쁨으로 짊어지게 하셔서 훗날 천국의 사다리가 되게 하시고 하늘나라의 영광의 상급이 되게 해 주실 줄 믿어요.”
(찬양)영광의 길 너 걷기 전에 갈보리 길 너 걸으라
네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하늘 가는 다른 길 없네 오직 예수 오직 한 길
갈보리 길 걸어가신 주 그 길 따라 너 걸으라
영광의 길 너 걷기 전에 갈보리 길 너 걸으라
네 모든 것 주께 맡긴 후 하늘 문을 바라보라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의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못 박힌 두 손 날개 펼치사 나로 그 그늘에 쉬게 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 날 오라 부르시네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 십자가의 길이 있네
죄에 빠진 영혼을 위해 주님께서 피 흘렸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남은 십자가 고난을 우리가 짊어지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내게 맞는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지고 사는 것이 곧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길인 줄 믿습니다.
바울은 바울에게 맞는 십자가를 짊어졌고 에바브라도 빌레몬도 각자 각자에게 맞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각자를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에서 만났을 때 수고했다고 네가 나를 위해 받은 고난은 나의 고난이었다고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고난의 십자가는 내가 충분히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이기에 주님께서 짊어지게 하신 줄 믿습니다.
그 십자가가를 기쁨으로 짊어지고 사는 자들에게 훗날 새예루살렘에 입성케 하셔서 각자에게 맞는 영광의 상급을 베푸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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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계22:1-5) (0) | 2024.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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