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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어느날 황혼 녁에 한 농부가 황소 한 마리를 끌고 황톳길을 걸어 귀가합니다.
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뒤로 황토 먼지가 폭폭 일어났습니다.
그때 마침 붉은 석양빛이 그 먼지 위에 내려앉자 황토 먼지가 금가루처럼 빛을 냈습니다.
한 사진 작가가 마침 그 장면을 보고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러면서 “먼지도 아름답다!”는 제목을 붙였죠.
더러운 먼지도 빛을 입으니 그토록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는 뜻입니다.
(깨달음)그처럼 티끌 같은 인생도 빛 되신 주님을 영접하면 밝게 빛을 내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빛을 덧입은 아브라함도 소돔 성의 조카 롯을 위해 기도할 때 ‘티끌과 같은 저라도’하면서 기도를 하죠.
자식 하나 없던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후손을 창대케 해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비추면 자신도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안 것입니다.
그런 티끌과 같은 아브라함도 빛되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으면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도 오직 이 세상만을 목적으로 유대율법주의자로 산헤드린 의원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죠.
그 까닭에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일 때 맨 앞에서 증인이 되었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선 자였죠.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정오의 태양빛보다 더 밝은 빛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야말로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이 여태껏 떵떵거리며 출세지향적으로 살아왔지만 주님의 그 빛 앞에서는 너무나도 타락한 죄인임을 알게 된 것 말이죠.
바울도 주님의 그 빛 앞에서 티끌이요 먼지임을 알았고 주님의 그 빛으로 비춰주셨을 때 비로소 그 인생이 아름다운 작품이 된 것이죠.
(적용)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실은 먼지와 티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 땅에 흙에 묻힐 존재죠.
하지만 주님의 빛으로 죄인인 우리를 감싸주시고 죄와 허물을 가려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주신 것이죠.
그 은혜의 빛으로 인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참된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 빛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감싸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빛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인도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빛이 주님의 생명의 빛이요 그 빛이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빛인 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그 빛으로 우리 인생을 빚으시고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3605319
(성화)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선지자인 사무엘 다음으로 첫 왕으로 뽑으셨는데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왕으로 세웠죠.
왕이 되어 적군과 전투를 벌일때도 성령을 부어주셔서 담대하게 맞서 싸워 승리하게 해 주셨죠.
하지만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자기 왕권만 소중히 여기는 걸 알고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하시고 한탄했죠.
그때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어 세우도록 하셨는데, 그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리자 백성들이 어떻게 화답했습니까?
“다윗이 죽은 자는 만만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로다” 하고 다윗을 더 높게 평가했죠.
그때부터 사울은 시기와 질투심에 이끌려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사위가 된 뒤에도 그랬죠.
급기야 다윗은 사무엘의 고향 ‘라마’로 도망쳤죠.
라마에는 나이든 사무엘이 고향에 내려가 선지자 생도들을 모아서 영적인 훈련을 하는 ‘나욧’이라는 ‘거처’가 있었죠.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은 군사를 보내 사울을 잡아오도록 하는데 그들이 도착하자 그곳에서 예언을 하면서 잡아오지 못합니다(삼상19:20).
그래서 세 차례에 걸쳐 군사들을 보내 다윗을 잡아오도록 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예언을 하면서 잡아오지 못하죠.,
급기야 사울이 군사를 거느리고 라마 라욧으로 가는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무엘상 19장 23-24절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깨달음)사울이 다윗을 잡고자 군사를 대동해 라마에 갔는데 나욧에 도착하기까지 그 길목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나욧의 선지자 학교에 있는 사무엘을 만났는데 그 앞에서 벗은 몸으로 누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속담이 생겼는데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하는 속담이라는 것이죠.
그로 인해 잡아 죽이겠다는 다윗은 잡지 못하고 그도 허탕을 치고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도 읽은 말씀인데 최근에 48독째 성경을 읽으면서 그 부분을 읽고 새롭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사울이 보낸 군사나 사울에게 임한 성령님은 성령의 외적인 능력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는 것이죠.
마치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한 번도 적을 맞아 싸우지 않았던 사울이 군사들을 이끌고 담대하게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하신 그 성령님의 외적인 능력 말이죠.
그와 같은 성령님의 능력이 사울이 보낸 군사와 사울에게 직접 임하셔서 그들을 붙잡은 것이었죠.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제자들이 두려움에 휩쌓여 있는데 주님께서 성령을 불어 넣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 이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이고 곳곳에서 주님의 부활하심을 담대하게 증언했으니 말이죠.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하고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 두려움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는 일에도,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사람과 뭔가를 해결해야 할때도 그렇죠.
그때 성령님의 권능이 우리를 붙잡고 감싸게 되면 그 일도 그 사람도 담대하게 만나서 해결해 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울에게 임한 성령님의 외적인 권능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적인 충만함은 더욱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울은 왜 자신이 보낸 군사들에게 성령님의 권능이 임했는지, 왜 자신에게도 성령님의 권능이 임했는지 깨달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사울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성령의 외적인 권능에만 도취된 채 예언을 하고 심지어 왕복을 벗은 채 하루를 지낸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입에서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는 조롱 섞인 말이 나돌게 된 것입니다.
(적용)그만큼 성령의 외적인 능력과 권능은 중요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는 것처럼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힘이 생깁니다.
삼손도 성령님의 외적인 임재와 권능을 통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장수 천명을 죽인 괴력을 발휘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외적인 임재와 능력은 성령님의 내적인 충만함으로 연결되어야만 성령님의 역사가 더 빛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에게 임한 성령님의 외적이 임재와 능력 앞에 자기 시기와 질투심을 복종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꺾지 못할 때 그의 왕복을 벗게 되는 정신분열증과 같은 증세를 만천하게 드러낸 것이죠.
왕복을 벗는다는 것은 이제 곧 하나님께서 그를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실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가 왕복을 벗는 일이 있어도 성령님의 내적인 충만함 속에 자신의 자아를 꺾었다면 아름다운 인생으로 재탄생되었겠죠.
하지만 끝내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의 인생이 교만함으로 끝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도 성령의 임재와 권능을 사모하되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내적인 충만함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티끌과 같은 나를 주님께서는 더욱 아름다운 인생으로 빚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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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죽은지 사흘째 되는 새벽 미명에 예수님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동굴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지진이 일어났고 천군천사가 그 동굴무덤을 열어제쳤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걸어나오신 것이었죠.
그때 동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슬퍼하던 막달라 마리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 보여주셨죠.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려주도록 했고 그녀의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 즉시 동굴 무덤을 찾았죠.
하지만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왔고 그날 저녁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삼삼오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이기 시작했죠.
낮동안에는 유대인들에게 발각이 되면 자신들도 유대 당국자들에게 체포돼 고문과 매질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 밤에 모이고 방문을 꽁꽁 걸어잠궜죠.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그 방문을 통과하시면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고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진짜로 부활하신 주님이신가, 아니면 그 분의 환영을 본 것인가, 의아해하고 있던 그들에게 당신과 손과 옆구를 보여주셨죠.
그때서야 제자들이 주님인 줄 알고서 기버할 때 그때 또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평강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깨달음)주님께서 불어넣어주신 평강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평강이었습니다.
그 평강은 이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로 얻을 수 있는 상대적인 평강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도 몰아내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평강이었습니다.
그 평강이 그들에게 자리잡게 되면 유대인들을 향한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도 다 사라지게 되는 평강이었습니다.
(적용)주님께서 그 밤의 제자들에게 불어넣어주신 그 평강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불어넣어주시고자 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식주 문제로 근심하는 우리에게, 물질 때문에 자녀의 앞날 때문에 걱정하는 우리에게도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평강으로 근심걱정을 잠재워주시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내가 거하는 삶의 자리에 불의와 다툼과 원망이 가득한 그곳에도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평강으로 화해와 일치가 가득하길 바라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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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 말씀이 나오는데 본문 2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원해)여기에 ‘성령’은 헬라어로 ‘하기오스 퓨뉴마’(ἅγιος πνεῦμα)로 ‘거룩한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이란 다른 말로 ‘진리의 영’ ‘하나님 아버지의 영’ ‘생명의 영’ 더움과 대조되는 ‘빛의 영’이라고 번역할 수 있죠.
티끌과 같은 우리에게 거룩한 빛의 영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온전한 작품으로 빚으신 그 영 말입니다.
자식 하나 없던 아브라함을 티끌과 같은 존재로 자각하게 하셔서 그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빚으신 진리의 영 말입니다.
이 땅의 출세와 성공만을 목적으로 살던 바울을 그 빛으로 품으시고 빚으셔서 새로운 소명의 작품으로 빛으신 그 영 말입니다.
(깨달음)‘받으라’는 헬라어 ‘람바노’(λαμβάνω)는 ‘잡다’(to take) ‘받다’(to receive) ‘자신의 것으로 삼다’(to take what is one's own)는 뜻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조건 받는 게 아니라 온 의지를 다해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보혜사로서 주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은혜베푸시고’ ‘스승처럼 갈 길을 인도하시는 인격체’죠.
그 성령을 주님께서 받으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의 심령에 모셔들여야만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케 되는 것이죠.
(적용)그런데 주님께서 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겠습니까?
방금전까지 평강을 불어넣어주셨는데 그 평강을 더욱더 확고하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심령에 임재하게 되면 주님께서 주신 평강을 더욱 굳건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이 제자들의 심령에 임하게 되면 성령님의 권능을 갖고 유대인들 앞에 두려움 없이 나아가 주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이 들어왔다가도 나갈 수 있는 성령님입니다.
초창기 왕이 된 사울에게 성령님의 외적인 권능이 임했던 것처럼 그 성령님이 임재하셨다가 떠나갈 수 있는 성령님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이후에 승천하시고 그로부터 10일 뒤 오순절날 임한 성령님은 들어왔다가 떠나가는 성령님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게 하시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춰주시는 성령님 말입니다.
그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성령님의 내적인 충만함 앞에 내 자아를 꺾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겠다는 그 혈기와 시기심과 질투심을 성령의 앞에 꺾고 순종하는 모습 말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한 것은 이후에 오순절날 임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 성령님이 너희들에게 내주하면 지금과 같은 성령의 외적인 권능만 믿고 말고 어떤 곳에서든지 사랑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온유함으로 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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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님의 외적인 임재와 권능을 체험하여 성령님의 내적인 충만함의 단계로 나가는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주님께서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사울이 왕이 될 때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맛보게 해 주셨는데 후에는 성령의 내적인 충만함으로 나아가길 원한 것 아니더냐?”
“지금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한 것도 그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 속에서 그들에게 부어주신 펑경을 유지토록 하기 위함 아니겠느냐?”
“그러나 사울이 왕이 된 후에 다윗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 혈기와 시기와 질투심까지도 성령님께 복종하길 원하신 것 아니더냐?”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한 것도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을 통해 담대하게 하기 위함이요 오순절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그들의 인격과 성품도 온전히 복종시키길 원하신 것 아니더냐?”
“그래서 제자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들이 관계맺고 사는 이들에게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온유가 가득하여 주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며 살도록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 네가 티끌임을 잊지 않는 길은 성령님의 임재안에 살때 가능한 것 아니겠느냐?”
“너에게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을 부어주신 것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담대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 아니겠느냐?”
“너에게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부어주신 것도 네 혈기와 고집과 시기와 질투심까지도 온전히 꺽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 아니겠느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땅의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 성령님께 너를 쳐 복종하며 사는 걸 주님이 기뻐하심을 알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너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더욱더 풍성하신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은 물론이고 성령님의 내적인 충만함을 부어주실테니 말이다.”
(찬양)성령 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 살리소서
성령 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 속 헤매는 우리
태워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 하나님이시여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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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바울이 1차와 2차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1차와 2차와 3차 전도여행 때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기적을 행한 바울이었죠.
심지어 텐트 만들 때 땀닦던 천조각과 앞치마처럼 쓰던 거적데기를 병든 자에게 얹을 때 병이 떠나가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죠.
그 모든 일은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의 역사로 바울을 감싸주고 덮어줬기에 가능한 역사였죠.
그 모든 성령의 사역을 마치고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원로들과 작별을 하면서 인사말을 남깁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깨달음)바울은 지금껏 여러 성을 돌아오면서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게 있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분명코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내가 가야 할 길이 그곳이고 그것이 주님께 받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기에 내 생명조차 티끌처럼 여기고 간다는 것입니다.
(성화2)그런데 이때만 그런 결심을 내비치는 게 아니라 이후에 밀레도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가이사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곳 가이사랴에서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아가보라는 대예언자가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 수족을 묶으면서 예언을 하죠.
“성령의 임재와 권능으로 지금 내게 예언하게 하시는데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이렇게 결박하여 이방인에게 넘겨줄 것이니 가지 말라”하고 말이죠.
그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21:13-14)
(깨달음)이미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오는 길목에 성령님의 감동속에서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면서 그럼에도 나는 티끌과 같은 존재로 성령님의 빛 가운데 새롭게 태어난 그 사명을 위해 간다고 말한 것이죠.
지금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직전의 지중해 해안가 가이사랴에 도착해 대예언자 아가보를 통해 또다 환란과 결박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의 감동으로 말씀하는 예언이라면 바울은 기꺼이 순종하여 가지 않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자기 안위나 자기 목숨보다도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자기 주관과 자기 고집과 자기 목숨까지 쳐서 복종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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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도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만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주관과 고집도 꺾을 수 있는 성령의 내적인 충만함의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육체의 소욕은 내 편안한 길을 좇고 싶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지만 성령님께서 뭔가 감동을 주실 때 기꺼이 내 고집과 혈기와 내 주관까지 꺾고 순종하는 사람 말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바울처럼 내 육체의 편안과 내 만족을 위함보다도 성령님께서 더 원하시는 일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게 해 주세요.”
“사울에게 성령을 통해 예언하게 하신 뜻이 뭔가 폼내고 자랑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다윗을 죽이는 것이 불의한 것이요 그것에 복종토록 한 성령님이듯이요.”
“다윗도 예루살렘 길목이 환란과 결박임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알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을 쳐 복종시켰어요.”
“주님. 나는 나 보기에 좋은 것만 취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려고하지만 성령님께서 내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위해 나를 쳐 복종하길 원하실 때 기꺼이 복종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세요.”
“그 성령님께서 친히 내게 임재하시고 내주하셔서 내가 어떻게 세상을 이겨내야 할지 담대함과 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티끌과 같은 저를 통해 성령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찬양)허무한 시절 지날 때 깊은 한숨 내쉴 때 그런 풍경 보시며 탄식하는 분 있네
고아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으리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하리라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억눌린 자 갇힌 자 자유함이 없는 자 피난처가 되시는 성령님 계시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 자유가 있다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지나 티끌이라도 석양의 빛을 받으면 황금 빛깔을 띤 아름다운 모습을 갖춥니다.
우리 자신이 아브라함의 고백처럼 실은 티끌이요 먼지와 같은 존재일진데 생명과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케 해 주셨습니다.
그 빛이 실은 보혜사 성령님의 빛이요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베푸시고 길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빛이십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통해 우리가 머문 곳곳에서 사랑과 화평과 자비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도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을 통해 이후에 오순절 내주하심을 통해 이 땅에 성령의 내적인 열매를 맺길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머문 곳곳에서 성령님께서 감동감화를 주실 때 내 고집이나 주관을 꺾고 주님의 뜻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주님의 도구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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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1-6)_2024년 3월 31일 부활주일설교 (1) | 2024.03.29 |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27:32-36)_2024년 3월 24일 종려주일설교문 고난주간설교문 (2) | 2024.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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