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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고린도전서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음으라(고전4:17-21)

by 권또또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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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음으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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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영어 단어에 크레더빌리티 갭’(credibility gap)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발언과 사실에서 오는 불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보통 정치가의 발언이나 정부의 정책이 사실과 달라 신뢰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총선이 410일이라 이제 한 달도 채 못 남았습니다.

각 정당별로 대진표가 나왔고 각 후보들은 공약을 내 놓습니다.

하지만 그 공약이 약속을 지키는 공약이 아니라 빈 공약인 경우도 많죠.

대통령도 각 지역을 돌면서 토론회를 하고 정책을 발표하지만 표퓰리즘인 경우도 많습니다.

 

(깨달음)왜 국회의원에 대해 대통령에 대해 불신하는 것입니까?

정치가의 발언과 정책이 사실과 다르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적용)그런데 그런 모습은 정치가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크리스천의 말과 삶에도 나타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전파하는 이가 없이는 절대로 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0:14-15)

 

복음을 전파하는 이가 없이는 결코 복된 소식이 전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4-16)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빛을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삶으로 보여주는 복음보다 더 좋은 복음은 없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천이 살아가는 곳곳에서 빛이 되고 소금으로 녹아든다면 누가 그 복음을 불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우리 모두는 말의 성찬보다도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성찬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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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묵상하기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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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다툼과 분열을 일삼기보다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18절부터 계속 써내려왔죠.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118절부터 시작된 그 내용이 일단락되는 그 끝부분에 달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바울이 책망을 했지만 마지막 부분으로 갈수록 사랑이 넘치는 권면을 했습니다.

그만큼 교회 분열을 종식시키고자 부성애적인 권면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와 같은 사랑의 권면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 믿음의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죠.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직접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을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자신을 본받으라고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당부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하지만 그것이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처럼 권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권하다는 헬라어 누쎄테오’(νουθετω)는 부성애적인 훈계를 뜻하는 말이었죠.

그만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 지혜와 지식과 은사를 내세우며 왕노릇하는 모습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훈계하고자 권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바울이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일만 스승아버지로 비유해서 설명해줬습니다.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고스’(παιδαγωγς)후견인’ ‘가정 교사를 뜻하는 말이었죠.

당시에 귀족 계급의 가정에서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육하도록 그 집에 지혜로운 종에게 맡겼죠.

바로 그들이 파이다고고스인데 개역한글판에서는 몽학선생으로 번역됐고 개역개정에서는 초등교사로 나와 있죠.

하지만 당시의 파이다고고스는 글이나 말솜씨는 잘 가르쳤을지 몰라도 자식을 직접 낳은 아비나 어미의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격이나 삶을 통한 본을 보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일만 스승과 달리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해산의 수고와 고통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돼라고 감히 권면하고 훈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기 파벌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따라가는 것처럼 너희들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한 마음 한 뜻으로 교회를 세우는데 하나가 돼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죠.

그만큼 바울이 강종하는 최종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 17절을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원해)바울은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를 좇는 그 삶과 각 교회에서 가르쳤던 것을 잘 일깨워주도록 디모데를 보내겠다고 하죠.

디모데는 바울이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루스드라에서 만난 젊은 청년이었죠.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인데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을 본받은 자죠.

그런 디모데를 고린도교회에 보내겠다고 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다툼을 종식시키고자 한 것이죠.

 

그런데 본문 17절에 보내었으니하는 헬라어 펨포’(πμπω)파송하다’(to send)는 뜻으로 과거형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610절에서 디모데가 이르거든이란 말씀이 나오는데 헬라어로 에르코마이’(ἔρχομαι)오다’(to come) 도착하거든이란 뜻입니다.

그와 같은 두 구절을 살펴볼 때 디모데는 이 편지가 고린도에 당도할 즈음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 고린도로 향하고 있는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를 고린도교회에 파송함으로써 얻는 효과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각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들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생각나게 해주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각 교회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지역적인 모임들이고 또 떨어져 있어도 연합 속에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런 교회들을 향해 디모데를 보내서 연합과 일치됨의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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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욥기서 읽고 묵상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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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그런데 본문 18-19절을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설마 바울이 오겠느냐 하면서 교만한 이들이 있었다는 거죠.

에베소에서 고린도까지 오려면 2차전도여행의 그 과정과 길목을 따라 배를 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와야 하는데 쉽겠냐는 것이죠.

더욱이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자기 지혜와 은사를 최고로 여기는 이들은 바울의 사도성과 외모와 안질의 질병등을 문제삼아 바울을 무시하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과는 다른 아볼로파 게바파와 같은 파벌을 더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온다고 해도 어쩌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었죠.

 

바울은 그들의 교만과 우월심과 은사를 통해 파벌과 분열을 일삼는 것을 알고 있기에 19절에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속이 가서 알아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히로 번역된 헬라어 타케오스’(ταχως)빨리’(quickly)라는 부사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뜻이 있으면 방문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165-9절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지연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러 있겠다고 언급을 하면서 말이죠.

왜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서 머물러 있어야만 했을까요?

무엇보다도 에베소에서 선교활동하는 것이 마무리되지 않았을 수 있었겠죠(14:27,고후2:12,4:3).

그 때문에 하루 속히 고린도에 가서 바로잡고자 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란 단서를 추가한 것입니다.

이 말은 당장에라도 고린도에 달려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만 그 역시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에 가는 것조차, 교만한 자들을 바로잡는 것조차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좇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2)그런데 오늘 우리가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말씀이 20-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깨달음)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빨리 가고자 한 것은 고린도 교회에 속한 교만한 자들이 말하는 그 의미를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능력을 선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 지혜로운 말 입바른 말 곧 입술의 성찬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자기 지혜 자기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말의 성찬만 늘어놓는 교만한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능력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문맥상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순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죠.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만한 자들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과 한 일을 통해 분별하겠다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교만한 자들은 헬라철학의 지혜와 웅변으로 치장된 말의 성찬만 늘어놓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한 삶이었습니다.

그들의 실상을 바울이 직접 가서 파악해 보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은사와 지혜와 성령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삶에 감동감화의 삶이 베어나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삶에 그런 복음의 감동감화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매를 가지고라도 가야 되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훈계하는 매를 사용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어긋난 길을 가는 그 길을 바로 잡고자 함이요 비틀어진 가지를 바로 세우고자 함인 걸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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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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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매를 가지고 갈지 아니면 사랑과 온유함으로 갈지, 그 모습은 주님의 재림과 흡사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교만한 자들은 매를 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복음의 삶을 사는 자들은 사랑과 온유함의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가겠다고 할 때 바로 곧 재림하실 주님의 그 마음(22:7.12,20)을 드러내 보인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 매를 들고 가거나 사랑과 온유함의 칭찬을 갖고 가듯이 주님께서 재림하실때도 똑같지 않겠냐는 뜻으로 말이죠.

그만큼 여러분들이 교만하여 왕노릇하고 분열과 다툼을 일삼을 게 아니라 주님의 재림 앞에 깨어서 늘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가 돼야 하지 않겠냐 하는 것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말의 성찬이 아니라 삶의 성찬으로 증거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삶에 있다는 것을 너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하신 것도 입술의 성찬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빛과 세상에 녹아드는 소금이 되라고 한 것 아니더냐?”

그런 삶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의 거울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속히 가서 알아보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더냐?”

고린도교회에 자기 지혜와 자기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교만한 이들에게 과연 삶의 복음이 있는지 말이다.”

그게 없다면 그들에게 매를 들고서라도 바로 잡고자 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자라면 너의 삶이 복음의 거울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말과 언어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주님께 나오는 게 아니라 네 삶의 거울을 보고 감동감화를 받아 주님께 나오는 것 아니겠느냐?”

누군가는 주님께서 오지 않는다고 이 세상만을 목적으로 살지만 그들에게는 확실한 심판의 매가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네가 주님의 재림 앞에 깨어 있어서 어디에 있든 빛과 소금의 삶을 산다면 그것이 복음의 참된 능력이요 그런 자들에게 사랑과 온유함의 상급을 베풀지 않겠느냐?”

주님께서는 지금도 네가 입술의 성찬만 늘어놓는 자가 아니라 삶의 성찬을 통해 참된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걸 기뻐하시고 하늘의 상급을 베풀지 않겠느냐?”

 

(찬양)나는 거짓을 기뻐할 수 없어서 매를 맞으면서도 외면했건만 너희는 담대하여 거짓 속에 사는구나

나는 거짓을 기뻐할 수 없어서 창을 맞으면서도 외면했건만 너희는 거짓과 함께 손을 잡고 사는구나

정직하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내 딸들아 정직하라 나의 가슴을 치며 너희에게 구하노니 구하노니

나는 불의를 기뻐할 수 없어서 온갖 조롱받으며 외면했건만 너희는 담대하여 불의 속에 사는구나

나는 불의를 기뻐할 수 없어서 침 뱉음을 받으며 외면했건만 너희는 불의와 함께 손을 잡고 사는구나

진실하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내 딸들아 진실하라 나의 가슴을 치며 너희에게 구하노니 구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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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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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파하는 입술과 복음을 전파하는 발걸음이 없이 어찌 복된 소식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입술과 발걸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삶으로 살아내는 복음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입술의 성찬을 늘어놓는다해도 한 영혼이 주님앞에 나아오는 길은 복음의 삶에 감동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자기 지혜와 지식과 은사를 최고로 여기며 교만한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입술의 성찬으로 가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준비된 것든 매요 매를 들어서라도 그들이 주님 앞에 바로서서 하나가 되기를 바울은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입술의 성찬이 아니라 삶의 성찬이 있다면 사랑과 온유함으로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때도 나러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곧 삶의 성찬이 있는 자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온유함의 상급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복음의 거울 삶의 거울로 복음의 증인되는 축복의 주인공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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