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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주변의 12제자들도 실은 각기 살아 온 환경과 배경과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었죠. 대부분은 갈릴리 어부였고, 그 중에는 세리도 있었고, 나라의 독립을 꿈꾸며 활동한 열심당원도 있었죠.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이질적인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며 주님을 위한 동역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들 가운데 바로 주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가 지향하는 일이 세상을 위한 욕망에 있었던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었기 때문이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전파 사역을 위해 헌신한 여성들도 이질적인 여성들이 함께 했다는 점이죠. 그 중에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나음을 입은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도 있었고,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도 있었고, 또 헤롯집안의 고위급 관료 출신의 아내 ‘수산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서로 다른 환경과 위치에 속해 있던 그녀들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사역을 도울 수 있었습니까? 그녀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이 그들 가운데, 그녀들의 심령 가운데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더욱이 그녀들이 주님께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이 함께 발을 맞추며 헌신하고 봉사했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제자들이나 그녀들만을 위한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죠.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 한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고 있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행하고자 하는 까닭이기 때문이죠. 이 세상의 욕망과 탐욕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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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맞으편 거라사인 동네로 가신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고, 그때 곧장 예수님께서는 잠에 빠지셨죠. 그만큼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들이 많았고, 피곤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모습이죠. 그런데 그때 광풍이 일어났고, 배에 물이 가득차서 배가 위태한 지경, 곧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24절에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이 잠든 주님을 깨워서, 우리가 죽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잠에서 깨서 곧장 바람과 물결을 꾸짖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 풍랑과 바람이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하신 것 말입니다. 왜죠? 여태껏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귀신을 내 쫓는 모습도, 베드로 장모의 열병도 꾸짖어서 고쳐주신 것도, 문둥병자도 고쳐주시는 것도, 반신불수가 된 중풍병자도 고쳐주신 것도, 다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의 제자들조차도 다 보고, 자기들의 스승인 감옥 속에 갇힌 세례 요한에게 다 알려주라고 말씀할 정도였죠.
그렇다면 그들이 모시고 다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믿고 의지하며 다녀야 할 것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서 이 땅의 구원자라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귀신도 내 쫓아주시고, 병든 자도 고쳐주시고, 심지어 사람의 죄까지도 사해 주시는 능력을 지닌 분이라면, 어떤 형편과 환경 속에도 주님께서는 구원해 주시는 능력을 지닌 분임을 온전히 믿고 의지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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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파도와 풍랑 앞에서 그들이 죽게 되었다면서, 주님을 깨우는 그 상황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실은 제자들이 지닌 믿음의 한계요, 실은 우리 자신의 믿음의 모습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아무리 가까이에서 주님의 기적과 능력을 보았다 할지라도, 정작 자기 자신의 문제 앞에서는 두렵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보여준 믿음인데, 사실 그들은 배 안에 계신 주님보다 배 밖에 일어난 파도와 풍랑을 더 크게 본 것 아니겠습니까? 배 안에도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그 어떤 파도와 풍랑 속에서도 기겁하지 않고, 담담할 텐데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상황이 이런 태풍과도 같은 상황이라면, 그 태풍을 맞은 우리 인생을 주님께서는 충분히 공감하고 품어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순한 연처럼 사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짊어지고 품어주실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이 말씀을 통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배를 저어 오셨는지, 충분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그 뱃길에서 풍랑까지 만나게 되었는지, 제자들이 왜 그런 위험을 당했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 한 사람’을 만나고자 한 까닭이었습니다. 이른바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기에 나온 ‘거라사인’(Γαδαρηνός)은 갈릴리 호수의 남동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데가볼리’ 곧 ‘데카메론’처럼 ‘데카’라는 말이 10개를 말하는 것이고 ‘볼리’는 ‘폴리스’를 뜻하는 말인데, 그 ‘10개 지역의 마을이 뭉쳐 있는 도시’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당도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평소 무덤 사이에 살던 귀신들린 사람, 곧 동물 무덤에 거주하고 있던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님께 나왔죠. 그가 얼마나 큰 괴력을 발휘했던지 쇠사슬과 고랑까지도 다 끊어버릴 정도였죠. 어떻게 그토록 큰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까? 본문 30절에는 그가 “군대 귀신”이 들렸기 때문임을 밝혀줍니다.
마가복음 5장 13절에서는 그 수가 2천 마리나 되었다고 증언해 줍니다. 이른바 본문 33절의 말씀처럼, 그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갔는데, 그 돼지 수가 2천 마리였음을 마가복음에서 증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대 귀신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강력한 귀신의 영향력이라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는 예수님에게 어찌 그들이 버텨낼 재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파도와 풍랑을 잠잠케 해 주신 주님이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군대귀신들까지도 완전히 좇아내 주시는 주님이심을 만 천하에 알려주신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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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37절에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왜 예수님더러 떠나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까? 또 다시 그렇게 군대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서 돼지떼에게 들어가 몰살 당하게 한다면, 자신들의 재산상에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죠.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 파도와 풍랑까지도 뚫고, 그 지치고 곤한 몸을 이끌고, 그곳 거라사인의 지방까지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한 영혼을 회복시켜 주신 다음에, 특별한 일 없이 다시금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가시는 모습이죠.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신 그 말씀을 성취하고자 말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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