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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지 않습니까? 충분히 제사장 라인 속에서 뭔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낙타 털옷을 입으며,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살았죠. 그래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세례요한 앞에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정도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의 뒤에 오실 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베풀었고, 또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 세례 요한이었는데, 자기 자신이 감옥 속에 붙잡혀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들지 않았습니까?
왜죠? 다른 사람들은 다들 고쳐주고, 귀신도 내 쫓아주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주시는데, 자기 자신은 풀어주거나 감옥에서 나오도록 능력을 베풀어주지 않으니, 그게 답답해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면서까지, 우리가 당신을 메시아로 믿어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할 정도였죠.
그러나 그런 세례 요한만 비난 할 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어쩌면 세례 요한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죠. 다른 사람에게는 귀신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도 살려내는데, 정작 내게 일어난 문제에 대해 하루 빨리 응답이 이뤄지지 않을 때, 내가 꼭 정한 시간대에 그 일이 이루어지고 응답이 되면 좋으련만, 점점 지루하게 늦춰지고 뭔가 응답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의 역사를 컨트롤하려고 하거나, 내가 주님의 역사하시에 대한 시간을 점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당신의 때에 내게 임하시고, 그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묵묵히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겸손한 자에게 주님은 분명코 역사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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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 귀한 향유 옥합을 깨트린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 36절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셔서 음식을 먹는 장면 자체도 놀라운 모습 아닙니까? 여태껏 예수님 주변의 바리새인들은 다들 예수님을 헐뜯고 비방하기 위한 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자리는 그 당사자와 좋은 관계의 차원에서 하는 모습이죠. 특별히 그에게 주님의 구원이 임했거나, 그가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을 때 말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는 그런 내용은 전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한 식사자리에 초대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장면이 있죠. 그 동네에 지를 지은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함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리면서 자기 머리털로 닦아드리는 모습 말이죠. 마태복음 26장에서는 그 일이 베다니 문둥병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마가복음 14장에서도 역시 베다니 문둥병 시몬의 집에서 한 일로 증언하고 있고,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이 일이 베다니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마가복음 14장 5절에서는 그 항유의 값이 300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자의 품삯이라면 거의 1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귀한 향유임을 밝혀주죠.
하지만 오늘 본문의 사건은 베다니 문둥병 시몬의 집이거나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 아닙니다. 그저 한 바리새인 집, 오늘 본문 40절에 예수님께서 대화를 나누시는 그의 이름이 나오는데, 시몬입니다. 그 한 바리새인 바로 시몬이라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시몬 베드로가 아니라 바리새인 시몬 말이죠.
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 그리고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둔 사건인데 반해,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1차 갈릴리 사역을 끝내시고, 이제 2차 갈릴리 사역을 시작할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죠. 공생애 사역으로 구분한다면, 마태와 마가와 요한복음은 공생애 사역 마지막의 일이고, 오늘 본문은 공생애 사역 1년 즈음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궁극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을 흔히 ‘막달라 마리아’ 곧 일곱 귀신들렸다가 주님께로부터 고침받은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로 여기지만, 그녀 일수도 있고, 혹은 또 다른 여인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 8장 1절로 넘어가면 예수님께서 이제 제2차 사역을 펼쳐나가는 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바꿔 말하면 오늘 본문에 향유를 부어드린 일은 주님의 죽으심을 염두에 둔 사건이라기보다는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응원하고 물질로 후원하는 모습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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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본문 말씀은 그녀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가장 큰 이유를, 예수님의 대화 장면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39절을 보면 그 바리새인의 집 주인인 시몬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서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녀가 어떤 여인인지 예수님께서 아신다면 결코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죠.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만큼 그녀는 이니 죄인으로 소문이 나 있던 여인이고, 만약 예수님께서 선지자라면, 선지자들은 다들 죄를 꾸짖고 바르고 선하게 살도록 촉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그녀의 죄를 질책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40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그 집 주인인 바리새인 시몬의 속내를 아시고, 그가 속으로 한 말을 알아차리시고, 이제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른바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각각 탕감해 줄 때,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이죠. 바리새인 시몬이 자기 생각을 밝히죠 아니, 우리도 그렇게 대답하겟죠. 많이 탕감함은 자입니다, 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말씀하시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왜 그녀가 그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많은 죄 때문에,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렸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그녀가 향유 옥합을 깨트린 것은 주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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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 앞에 보여주신 것, 곧 육신의 질병이나 귀신을 내쫓아주시는 전능자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까지도 사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분 앞에서 그녀가 죄를 사함 받아 향유를 깨트려서 부어드렸으니, 그 무엇으로 감사를 드려도 부족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옥합을 깨트린 그녀의 마음과 자세처럼 주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늘 갖고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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