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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 복수법, 그것은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율법 중에 시민법에 해당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칼에는 칼로 동일하게 복수하라는 법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법을 주신 취지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해결하라는 측면보다는 누군가 가해자가 될지도 모를 상전들, 윗 사람들, 가진 자들에 대해 연약한 자를 배려하면서 살라는 요구셨습니다. 그래야만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지 않고, 오히려 샬롬의 나라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원수를 만들지 말도록 하고, 만약 원수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목말라 할 때 물을 마시게 하고 굶주림에 처해 있거든 먹을 것을 줘서, 그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원수 같은 사람을 향해 적극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죠.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뜻만으로는 결코 그런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고 말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내 뜻에 반대를 하는 사람, 내 의견에 다른 의견만 내비치는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대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빚진 자로 사랑하며 사는 길은, 오직 성령님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할 때에만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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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도 계속해서 산상수훈, 다른 말로 하면 산 위의 평지에서 천국복음을 전해 주신 내용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님께서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을 비판하면 분명히 정죄하는 단계로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정죄는 한 덩어리가 되기 쉽다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내어 맡기라는 것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용서하라는 것이죠. 끊임없이 용서하다보면, 그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38절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님께서 평소 주는 삶, 베푸는 삶을 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죠.
그런데 그 말씀 다음에 나오는 게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는다”하고 말씀하시는데, 앞 뒤가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 돌려 받을 수 있을지, 그것을 가늠하지 말고 너의 여유가 있는 만큼을 주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유가 있는데도 인색하게 하면, 되질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후하게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주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채워주시는 은혜를 덧입게 된다는 말씀이죠.
38-39절은 주님의 제자로서 누군가를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이끄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맹인으로서 맹인을 인도하지 말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가 진리와 생명을 깊게 깨달아 인도한다면, 스승과 같은 자라고 칭찬을 해 주고 계시죠.
41-42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남의 들보를 보기 전에, 네 눈 속의 티를 빼도록 하라는 것 말입니다. 자기 속에는 대들보 같은 큰 죄악과 악행이 넘쳐나는데, 다른 사람의 작은 티와 같은 죄를 꾸짖고 비난하는 것은 겉 다르고 속이 다른 외식하는 자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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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죠. 율법의 잣대로 남을 정죄하기에 바쁜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은 정죄보다 긍휼과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리 바닷가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던 것도 바로 그런 이치였지 않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율법주의자의 관점을 지녔다면, 남의 티를 캐내기에 바쁜 삶을 산 바리새인들과 같았다면, 어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그렇게 하고서도 내 제자라고 할 수 있더냐?’하고 아주 무한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던 것은 ‘너는 연약하기에 나처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내 사랑 안에 기대고 의지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하는 뜻이라고 했죠. 바로 그런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힘을 얻게 되는 법이죠. 율법은 비난과 정죄로 복종을 강요하지만, 주님의 은혜는 사랑안에서 순종할 힘을 얻게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 43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는 자는 결코 못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찌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으며, 찔레에서 도포를 딸 수 있겠느냐는 것도 바로 그런 말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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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오늘 이 천국복음을 결론적으로 귀결시켜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46-49절을 통해 ‘행함’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게 그것이죠. 46절에 “주여 주여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하십니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짓되 흙 위에 지은 자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에서 48절에 탁류가 난다, 흙탕물을 넘어 범람하는 물, 홍수로 인한 물난리를 가리키는 것이죠.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지은 자이기 때문에 그때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견딜 수 있지만,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그 탁류에 부딛혀 집이 무너져 파괴된다는 것이죠.
과연 이 탁류, 흙탕물, 범람하는 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탄의 시험과 유혹이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왜 주님의 천국복음에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유혹과 시험 앞에서도 요동치 않는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동역자로 살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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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심령, 목말라 하는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 안에 살라고 말입니다. 원수가 있거든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정죄하기 전에 너 자신의 들보와 같은 죄를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보라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춘 나의 심령이 가시나무나 찔레는 아닌지 살펴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자가 되기보다,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자, 인생의 집을 주님의 은혜라는 주춧돌 위에 세워나가도록 말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의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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