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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로마 장교 백부장의 유대인 하인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약 9km 남동쪽에 위치한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데, 그 상여를 붙잡고 그 죽은 청년을 살려내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화론이나 문명론으로, 이신론으로 설명 불가능한 일입니다. 참고로 이신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지만, 그 하나님은 창조시점에만 역사할 뿐 지금까지도 통치하시고 관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고서 주인에게 줄 때 그때부터는 시계의 주인이 맡아서 관리한다는 것과 같다는 뜻이죠.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하늘과 땅,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리고 우리가 천국에 입성할 때까지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통치하시고 주관하신 분이시죠.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란, 바로 그것을 믿는 믿음이죠. 주님께서 죄 없는 동정녀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통해 수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 쫓으시고, 심지어 죽은 나인성 과부의 독자나 죽은지 나흘째 된 나사로를 살려내신 일, 그리고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째 되는 새벽 미명에 다시 살아나신 일, 그리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지내시다가, 하늘로 부활승천하셨고, 다시금 재림하실 것을 믿는 믿음 말입니다. 그 믿음 하나면 됐지 무엇을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도, 우리가 믿는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라, 성령안에서 그 믿음을 주셔야 오전히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겸손하게 그런 믿음의 은혜를 주시라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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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요한의 제자들이 말한 ‘이 모든 일’은 무엇이고, 또 그것을 알렸다고 나오는데, 과연 누구에게 알린 것이겠습니까? 새번역성경은 보다 분명하게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미 누가복음 3장 20절을 통해 세례 요한이 감옥에 붙잡혀 들어간 상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 감옥 속의 세례 요한에게 그 제자들이 가서 ‘이 모든 일을’ 알려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일, 수많은 병든 자를 고치신 일들이죠. 특별히 나병을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로마 장교 백부장의 하인의 죽을 병을 고치신 일이죠. 그리고 어제 읽은 말씀처럼 나인성 과부의 죽은 청년까지 살려내신 일을 말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해 내고 있다는, 그 모든 일들을, 감옥 속의 세례 요한에게 가서 알려줬던 것입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본문 19절입니다.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제자 둘을 주님께 보내서,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이 한 말을 그대로 예수님께 전하는 상황이죠.
그렇다면 왜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면서, 구약에서 오신다는 메시아가 당신인지,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굳이 물어보게 했던 것이겠습니까? 이미 우리는 누가복음 3장 16절을 통해 세례 요한도 그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물론 그 말씀은 적어도 누가복음만 놓고 본다면 세례 요한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아직 목격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렇게 자기 바람을 밝힌 고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 21절에서는 백성이 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고, 뿐만 아니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 때쯤이면 세례 요한도 예수님이 그 메시아, 곧 구원자이심을 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누가복음을 넘어서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살펴볼 때, 그는 예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어떻게 제가 메시아이신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예수님을 만나서 그렇게 고백한 자요, 이튿날에는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고 고백할 정도였던 세례 요한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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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 세례 요한도 예수님이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그 모든 일을 제자들에게 보고받고, 다시금 제자 둘을 보내서, 당신이 메시아이신지 아니면 다른 이를 메시아로 기다려야 하는지, 한 번 확인하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그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4장 18절의 말씀이 정작 세례요한 자신에게는 성취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지금 주님은 계속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고, 눈먼 자에게 보게 하는 기적을 펼쳐주고 계시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해주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을 내 좇아주고 있고, 나병과 중풍병자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계시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려내시는 메시아로서의 역사를 보여주고 계신 것이죠. 그런데 정작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펼쳐보여 주신다고 했는데, 감옥 속에 붙잡혀 있는 세례 요한 자신에게만큼은 그 역사를 일으켜 자기를 구원해 주지 않으니까, 기다리다 지쳐서, 그렇게 자기 제자를 보내 것 말입니다. 그래서 계속 주님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지, 다른 이를 바라봐야 하는지, 그걸 확인코자 제자 둘을 보냈던 것이죠.
본문 21절은 때마침 중요한 일이 펼쳐진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의 제자 두명이 주님께 나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 마침 예수님 앞에 질병과 고통으로, 또 귀신 들린 자들이 나와서 그들을 고쳐주신 사건, 그리고 많은 맹인들을 보게 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장면을 펼쳐보여주신 것이었죠. 그래서 너희 스승 세례 요한에게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라고 말씀하죠. 그래서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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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밀려오십니까? 이렇게 대단한 역사를 펼친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런 생각이 안 드십니까? 그도 감옥에 갇히면 절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주님께서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도 살려내는데, 정작 감옥속에 붙잡힌 자기 자신에게는 그 어떤 역사도 일으켜주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그런 기대감에 어떤 부응도 없다는 것 때문에, 다른 이를 메시아로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묻는 그 수준이 실은 우리 자신의 수준일 수 있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의 역사를 컨트롤하려고 하거나 내가 주님의 역사하시에 대한 시간을 점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당신의 때에 내게 임하시고, 그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묵묵히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렇게 겸손한 자에게 주님은 분명코 역사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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