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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들려왔습니까? 빈들의 세례 요한에게 임했죠. 티베리우스가 로마 황제로 있다 할지라도,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다 할지라도,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재임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동생 빌립이 북쪽 지역의 분봉왕으로 있다 할지라도, 또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가 대제사장직으로 성전에서 섬기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빈들의 세례 요한에게 임했죠. 그만큼 빈들의 심령, 가난한 심령, 광야요 목마른 심령 속에 거하는 자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와도,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하게 외쳐도, 과연 누가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세례의 회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선포하고 촉구했어도 누구 하나 변화된 삶을 살았다는 이는 복음서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읽은 본문 18-20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번역성경의 번역본을 읽어드립니다.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분봉왕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관련된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 때문에, 요한에게 책망을 받았고, 거기에다가 또 다른 악행을 보태었으니, 요한을 옥에 가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온 백성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면서 외쳤고, 급기야 분봉 왕 헤롯을 향해서도 그 악행에 대해 서슴없이 책망하는 말을 외쳤던 것입니다. 이때의 헤롯이란 헤롯 대왕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이복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는 불륜을 저질렀는데, 그것을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규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또 한 가지의 악행도 곁들여서 회개하라고 촉구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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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일로 헤롯 안티파스가 변화되거나 새 삶을 살게 된 게 아니라, 오히려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둬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이면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들레거나 소리치거나 떠들썩하게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변화된 삶을 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무슨 차이이겠습니까? 가장 큰 차이는 세례 요한은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강력하게 누군가의 죄를 규탄해도 그 누군가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선지자의 한계였죠. 그것이 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인간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기에 사람들에게 조근조근 이야기해도 변화를 가져오게 하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큰 차이가 있다면, 세례 요한은 율법의 마지막 사람이요 우리 주님은 은혜의 시작점이라는 차이입니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마11:13)하는 말씀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강조하며, 그 율법에 근거하여 사람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하고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구약의 율법주의자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관점, 곧 주님의 은혜로 사람들을 감싸고 품어 안으신 분이셨습니다. 이른바 수가성의 여인을 향해서도,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향해서도, 모든 사람들이 죄인취급하는 세리 마태나 또 삭개오를 향해서도, 율법주의자의 관점이 아닌 사랑과 긍휼의 관점 곧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품어 안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이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죠. 오늘도 마찬가지죠. 한 사람의 변화는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한 말씀 때문에 변화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과 긍휼로 품고 헤아려 주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그 사람이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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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만약에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이 없었다면, 누가복음만 기록돼 있는 복음서를 갖고 있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를 이해하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때는 이미 세례 요한이 감옥에 붙잡혀 들어간 뒤입니다.
과연 무엇에 방점을 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들과 똑같이 인간의 모습으로 요단강 가장 낮은 곳 아래에까지 내려가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하나는 그때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위에 임하셨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마지막 중요한 것은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서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는 게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의 방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가 어떤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내가 우리나라의 그 유명한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는지 보다,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것, 또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진정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 바로 그것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죠. 물론 우리가 세례받을 때 성령이 임했는지,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인정해 주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만큼 내가 세례를 받을 때의 그 마음 자세가 더없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겠다는 그 진정성이 있을 때에 세례를 받은 게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세례 받고 난 이후에 그 진정성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은혜를 누리는 분들도 간혹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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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본문은 23절부터 38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 곧 공생에 사역 직전의 상황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때 족보를 한 번 더듬어 살피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그 할아버지 헬리, 그 증조 맛닷, 그 고조 레위, 그렇게 해서 이제 어디까지 올라갑니까? 38절에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하고 말입니다.
이 족보와 마태복음의 족보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하면서 “아브람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하고 시작을 하는데, 오늘 누가복음의 족보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그 위는 맛닷이요...하면서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하는 것으로 족보를 써 내려간 차이점입니다. 마태복음은 상향식에서 하향식으로, 아브라함에서부터 요셉에까지로 이렇게 내려오는 족보인데, 누가복음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되 요셉에서부터 시작해 하나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다윗대까지, 다윗대부터 바벨론포로대까지, 바벨론 포로 대에서부터 요셉대까지 3개 대에 걸쳐 14명의 이름을 넣고 있는데, 누가복음은 단지 78명의 조상들을 모두 밝혀주고 있다는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마태복음에는 여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반해 누가복음은 여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마태복음은 오직 다윗이라는 법률적인 관점 곧 왕권의 후손이라는 관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은 요셉의 아들로부터 시작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까지 올라가고 있다는 것, 곧 지극히 사람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도록, 그것이 바로 공적 사역의 타당성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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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 그것이 공생애 사역의 타당성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고 의지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계보도 계속 올라가면 아담이 있을 것이요, 그 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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