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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아기 예수가 탄생을 밝히면서 그 시대의 세계 통치권자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로마의 속국인 시리아의 총독 구레뇨를 대비하여 언급했고, 아기 예수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 그리고 해산할 날에 누일 곳이 없어서 말 구유통에 뉘었다는 것 등을 밝혀주었습니다. 이유인 즉 당대의 최고 통치권자들이 아무리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요, 예수님이야말로 다윗의 계보로서 참된 메시아요, 더 나아가 왕실이 아닌 가난한 상태 곧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밝혀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우리가 가운데 목격한 이가 없어도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아기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에 올라간 일,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를 드린 시므온, 그리고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 선지가 아기 예수를 보고 역시 경배드리는 모습, 그리고 12살이라는 어린 시절의 예수님의 모습을 각각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이른바 구약의 정결례를 거행한 의식입니다.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8일이 지나 할례의식을 거행했죠. 이것은 최초 아브라함(창17:12)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의식이었습니다. 그 뒤에 모세의 율법(레12:3)에 정식으로 제정이 된 것이었죠. 그와 동시에 아이의 어머니는 33일 동안 부정한 기간(레12:4)을 거치도록 했죠. 그것은 산혈 후에 그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였죠. 그리고 이제 아이가 태어난 지 40일째 되는 날에, 그 어머니는 자신의 부정한 것을 하나님 앞에 속죄함 받기 위해 성소에 나가 제사장에게 제물을 바쳤죠.(레12:6-7). 일반적으로는 어린 양을 바쳤지만, 가난한 경우에는 두 마리의 비둘기를 바치도록 했죠.(레12:8). 그와 더불어서 맏아들일 경우에 5세겔을 바쳐서 하나님께 드리고(출13:2, 민18:16, 삼상1:24-28), 그 맏아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키울 수가 있었죠,
바로 그 의식을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거행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그만큼 가난했음을 알 수 있죠. 더욱이 마리아는 요셉을 통해 아기 예수를 잉태한 게 아니라 동정녀의 몸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했고 출산했죠. 그렇기에 부정한 여인의 몸을 뜻하는 그런 정결례를 거칠 필요가 없었지만, 아이 곧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 때문에, 그에 대한 정결례를 치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훗날 공생애 사역을 할때도 마찬가지였죠. 그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까닭에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죠.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서 가장 낮은 요단강 아래에 내려가 똑같은 인간으로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기에 세례를 받으신 것과 똑같은 이치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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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 본문 25-35절은 시므온이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맞이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란 사람은 평소 성령님의 이끄심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는 죽기 전에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깨닫고 있던 자였죠.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정결례와 대속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나타났을 때, 그때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게 된 것이었죠. 그때 그가 하나님께 찬가를 부르죠. 29-30절을 통해 이제는 종이 죽을 수 있겠다고, 왜냐하면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봤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죠. 31-32절을 통해서는 아기 예수야말로 만민의 구원을 위해 예비하신 빛이자 이방 세계의 구원을 향한 빛이라고, 또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찬가를 부르죠.
그때 33절을 통해 증언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시므온이 그런 찬가를 부르자, 마리아도 그리고 요셉도 놀라죠. 왜냐하면 둘은 아기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사실을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사람들도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 곧 인류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임을 알아보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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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본문 36절 이하에서는 또 한 사람이 아기 예수를 알아보게 되죠.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지 7년만에 과부가 되어 84세가 되었는데, 홀로 살면서 성전을 떠나지 않는 여선지자였죠.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에 대하여’ 곧 ‘그 아기에 대하여’ 다시 말해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그녀는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면서 그렇게 84년 동안 과부로서 성전에서 기도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학수고대하면서 말입니다.
이 사실을 접한 아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은 또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좀전의 시므온에게 들었던 소식처럼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겠죠. 자신들 외에 시므온도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었고, 또 안나라는 여선지자도 84년 동안을 기도하면서 기다려왔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와 같은 소식을 접한 마리아와 요셉은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돌팔매질을 예상하고 아들을 낳게 되었고, 또 여관에 누일 곳이 없어 말구유통에 낳았고, 정결례를 할 때 돈이 없어서 비둘기 두 마리를 번제물로 갖다 바칠 지경이었는데, 그렇게 어려움 가운데 아들을 낳았지만, 시므온과 안나 여선지자가 그렇게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을 봤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정결례와 대속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40절에서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라고 어린 시절의 모습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41-52절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곧 12살이 되었을 때에 겪은 에피소드를 증언해주는 내용입니다. 절기를 좇아 성전에 예수를 데리고 갔는데, 돌아오는 길목에 아이를 놓쳐버렸고, 3일 후에 다시금 성전에 찾으러 갔는데, 그곳에서 나이 많은 선생들 곧 랍비들과 함께 토론하고 대화하는 예수를 보고 깜짝 놀란 사건이 그것이었죠. 그러면서 본문 52절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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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내용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밀려드십니까? 다른 복음서에는 아기 예수의 활동이나 12살 된 어린 예수의 활동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 누가복음에만 기록돼 있다는 사실이죠. 왜 굳이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걸까요? 누가복음이 예수님에 대한 초점을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 맞추고 있다고 했었죠. 그만큼 이 땅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과 함께 사셨고,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서 어린 시절부터 살아오신 분, 그렇기에 인간에 대한 공감적인 이해가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아픔, 배고픔, 괴로움에 대해, 예수님은 충분히 공감적인 이해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오늘도 그 분이 임마누엘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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