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아기 예수가 말구유통에 누인 것,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한 일, 비둘기 두 마리로 어머니의 산후 정결례를 드린 일, 장자인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드린 사건, 12살 되었을 때의 일들, 이것은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돼 있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죠.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이라고 했죠. 그만큼 이 땅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셨고,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잉태의 고통과 괴로움과 성장기의 아픔을 다 겪으셨기에, 오늘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삶의 애환을 친히 공감적인 이해로 품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 주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 곧 세례요한에 관한 사역에 대한 내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디베료 황제란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를 가리키는데, 그가 다스린지 15년째 된 해라는 것이죠. 그때는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A.D.26년∼37년 초반까지라고 다스렸다고 전해주죠. 헤롯은 그때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다스리던 때라고 하죠. 그는 B.C.4∼A.D.39년까지 다스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헤롯의 동생 빌립은 갈릴리의 북쪽 지역을 다스렸는데, B.C4년부터 A.D.34년가지 통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밖에 루사니아는 다메섹의 서쪽 지역인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재임하던 시기였죠.
그리고 그 당시의 대제사장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안나스와 가아뱌 두 사람에 대해 말입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 맡게 돼 있었죠. 그런데도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안나스는 A.D.6년부터 A.D.15년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고, 그 이후에 자기 사위인 가야바에게 대제사장직을 물려준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세습을 한 것이었죠. 그렇기에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때나, 6개월 뒤에 실질적으로 활약하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기간에는 안나스가 아닌 가야바가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던 때라 할 수 있죠. 그런데도 안나스의 이름을 거명한 이유는 그의 영향력이 현직에 있는 자기 사위 가야바보다 훨씬 더 막강한 영향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들 7명의 사람들은 당대의 그 분야에 최고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의 황제였으니 로마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1인자였고, 빌라도 총독도 유대 나라에 파견된 제 1인자였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도 갈릴리 지역에서의 1인자였습니다. 또 헤롯의 동생 빌립도 갈릴리 북쪽 지역에서는 1인자였죠. 다메섹의 서쪽 지역인 아빌레네의 분봉 왕 루사니아도 그 지역에 1인자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대제사장 곧 성전의 최고 대제사장직을 맡은 안나스와 가야바, 그들 두 사람도 성전이나 제사나 유대 종교사회에서는 제 1인자였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2142807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했다고 밝혀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당대의 1인자들에게 임한 게 아니라, 빈 들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임했다는 것이죠. 빈 들은 곧 광야를 가리킵니다. 뭔가 넉넉하거나 만족할만한 삶이 아닌 곳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 곧 벌꿀을 따서 먹는 자였고, 낙타 털 옷을 입은 자였죠.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은 바로 그런 자의 심령 속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빈 들의 심령, 광야의 심령, 목마른 심령의 상태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는 것이죠. 그 당대에 누릴 게 많고, 취할 게 많고, 뭐든지 마음만 먹으면 움켜 쥘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그런 심령의 상태 속에는 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난한 심령, 빈들의 심령, 목마른 심령을 지닌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니고데모도 사두개인으로서 유대 관원 중의 하나였죠. 또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도 최고의 부유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관직이 높든 낮든, 외적인 환경과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그 심령 상태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현재 나의 심령 상태가 가난한 심령, 빈들의 심령, 광야의 심령, 목마른 심령 상태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하나님의 긍휼어린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말씀과 그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죠.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또 로마서 9장 15절에서도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실지 모르기에, 우리의 심령 상태는 늘 빈 들의 심령, 광야의 심령, 목마른 심령을 지니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에, 세례 요한이 그 말씀 대로 사역을 펼쳐나가게 되죠. 그가 무슨 사역을 합니까? 3절에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증언합니다. 그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 본문 7-14절에 나와 있죠. 단지 요단강에 나와 백성들이 세례 받는 행위로 만족할 게 아니라, 그들의 삶에 구체적인 회개의 삶을 수반하도록 외치는 모습입니다. 그만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 그것이 회개의 세례를 베푼 목적이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예비한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8679122
구체적으로 어떤 열매를 말하고 있습니까? 부자들에게 요구하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그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옷에 여유가 있다면, 또 먹을 것에 여유가 있다면 굶주리고 있는 이들에게 나눠 주라고 말입니다. 또 세리들, 곧 세금관리원들에게는 요구하는 회개의 열매가 있죠? 12절에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정한 세금만 거두라는 것이죠. 왜죠? 그 당시 삭개오나 또 주님의 제자가 된 세리 레위, 다시 말해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도 다들 세리 출신들이었죠. 그들은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서 일정부분은 로마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기 주머니에 착복하던 사람들의 대명사였죠. 바로 그것을 지금 바르게 거둬들이라고, 그것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죄사함의 세례라고 말하는 거죠.
14절에서는 군인들에게 요구하는 합당한 열매가 있죠?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하고 말하죠. 군인들, 곧 로마에서 파병나온 군인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들을 향해서는 유대 백성들을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월급을 족한 줄로 알라는 것이죠. 이것이 그 시대에 얼마나 영향력있는 모습이었던지, 본문 15절에서는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나 16절에서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자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다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무슨 차이이겠습니까? 사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죠, 그러나 그가 아무리 강력한 회개의 세례, 그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요구하고 외쳤어도, 그로 인해 변화되었다는 사람에 대한 증언은 복음서에 나타나 있지 않죠. 하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예수님은 뭔가 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0527332
진정한 삶의 변화는 율법의 강요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이죠.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록된 바(눅4:1-13) (0) | 2024.02.22 |
---|---|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눅3:18-38) (0) | 2024.02.22 |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눅2:22-52) (0) | 2024.02.20 |
기쁨의 좋은 소식(눅2:1-21) (1) | 2024.02.18 |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눅1:39-80) (1) | 2024.02.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