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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마가복음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막14:53-72)

by 권또또 2024.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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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뒤에, 체포되실 때,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들 도망쳐버리고 말았죠. 그리고 거기에 청년 하나가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갔는데, 그가 체포조들에게 붙잡힐 때 그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 일도 있었죠. 그 청년에 대해 많은 성경학자들은 본문을 기록한 요한 마가, 마가의 다락방 주인의 아들 요한 마가로 여기고 있습니다. 굳이 자기 수치를 드려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들도 그런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연약한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함이죠. 바꿔 말해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주님의 은혜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결심이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원동력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진정한 원동력은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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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 유페이퍼- 교보ebook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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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이후에 심문받는 모습이 기록돼 있습니다. 본문 53절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그 체포조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갔다는 것이죠. 이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입니다. 하지만 그는 명목상의 대제사장이었고, 실질적인 실권을 쥐고 있는 대제사장은 그의 장인 안나스였습니다. 안나스는 수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유지하다가 그의 사위인 가야바에게 넘겨줬습니다. 하지만 모든 실권은 여전히 안나스가 쥐고 있었던 것이죠.

바로 그 안나스의 공관에 예수님을 끌고 와서 이제 심문을 벌이는데, 본문 55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회’란 유대 사회의 최고법정기구인 ‘산헤드린 의원들’이 모인 공식적인 회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의원은 대부분 사두개인들, 현실정치에 실권을 쥐고 있는 사두개인 출신들이 대부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그 70명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23명만 모여도 중차대한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고 처리할 수 있었죠. 지금 시각이 곧 닭이 우는 새벽이 밝아오는 때요, 70명이 다 모였다기보다는 대제사장을 포함해 22명이 모여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정도만 결의해도 법적인 충족요건이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예수님을 사형 선고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던 까닭이죠.

그런데 모든 법정에는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와 증인들이 있기 마련 아닙니까? 지금 안나스의 법정에는 안나스라는 판사가 있는 마당이고, 검사는 대제사장과 함께 하는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인 셈이죠. 그런데 변호사는 예수님 혼자뿐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피고인이자 변호사 자체가 되시는 것이죠. 문제는 본문 56-59절을 보면 여러 증인들이 그 법정에 내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증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여러 가지 것들을 증언하지만 다들 일치하지 않는 게 문제였죠. 어떤 증인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고 했다는 진술을 하죠. 그런데 그 증언 역시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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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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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떻게 합니까? 본문 60절에 보면 대제사장 곧 안나스가 나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무엇을 물어봅니까? 본문 61절에서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하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찬송받을 이’란 곧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의 아들 그리스도냐’하고 물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온 메시아 곧 구원자이냐, 하는 뜻으로 질문한 것이었습니다.

안나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다른 증언자들의 증언이 다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고, 시간이 질질 끌면 자신들에게만 불리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듣고자한 까닭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야’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여태껏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하셨는데, 드디어 입을 떼십니다. 본문 6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게 무엇을 뜻하는 대답입니까? 여태껏 다른 증언자들을 내세워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했는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죠. 하지만 지금은 물어본 그 말에는 진리이기 때문에, 진실이기 때문에 직접 대답하고 나선 상황입니다.

만약 이 때 예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 당신이 메시아 곧 구원자라는 점도 다 묻히고 마는 것 아닙니까? 바꿔 말해 대답하셨기에, 당신이 십자가의 길로 더 확고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진실 앞에 진실로 대답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용기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용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기게 되죠.

예수님께서 진실을 진실로 대답하실 때, 그때 대제사장은 더 이상 무슨 증언을 더 듣겠냐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다면서,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들먹이며, 사형에 해당한다고 선고를 하죠. 그러자 65절의 말씀처럼 이제는 주님께서 법정 죄인으로 취급받게 되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침을 뱉고, 얼굴을 가려서 주먹으로 치고, 또 대제사장의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치기까지 했죠. 이런 수모와 수치를 당할 걸 왜 예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용기를 내시고, 그 모든 수모와 수치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확실히 용기입니다. 손해 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진실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고 당당하게 진실되게 말하는 것,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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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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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본문 66절입니다.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본문 5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새벽녘에 체포돼서 안나스의 공관까지 끌려왔는데, 그때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그의 집까지 따라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심문받는 동안에 그는 아래쪽 뜰에서 숯불에 불을 쬐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만큼 유대 광야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한기 때문에 숯불을 피워놨던 것이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 자,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베드로에게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하고 단정하면서 물어 본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네가 말하는 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면서, 그 내용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때 한 번만 그랬는가? 본문 69절에서 두 번째, 그리고 본문 70절에서 세 번째 그렇게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죠. 그때마다 베드로는 매번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고, 심지어 71절에서는 저주까지 하고 맹세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했죠. 그러자 닭이 두 번 울었다고, 72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왜 그렇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맹세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아는 게 진실이요, 3년씩이나 동고동락했고,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더 많은 신뢰를 받았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다들 부인하고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주님께서 죽는 데까지 함께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는데 말입니다. 왜죠? 왜 그렇게 맥없이 부인하고 저주해 버린 것입니까?

베드로에게는 믿음의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담대한 용기를 불어넣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그렇기에, 우리에게 누군가 진실을 진실되게 물어볼 때, 비록 예수님처럼 내게 손해가 일어나고 수모와 수치스런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용기를 불어넣어주실 때, 우리가 담대하게 진실되게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믿음의 용기를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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