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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마가복음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14:12-31)

by 권또또 202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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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의 수요일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 베다의 문둥병 환자 시몬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때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두 사람이 있었죠. 300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순전한 나드 향유, 당시 노동자의 1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린 마리아가 있었고, 반대로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가롯 유다가 있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까? 개인적인 주님의 은혜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났는데도 그런 오라버니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받은 바 있고, 또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가르칠 때 맨 앞에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체험이 있는 신앙인이죠. 반대로 가롯 유다는 주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녔고, 주님께서 갖가지 기적을 행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주님을 만나는 개인적인 관계의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오늘 우리에게도 그래서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은 너무나도 소중한 주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때로 성령님께서 나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시고, 나의 연약함 가운데 위로해 주시고, 내가 지쳐 있을 때 새 소망을 불어넣어주시고, 말씀을 통해 귀한 감동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그런 은혜의 체험이 우리 각자에게 너무나도 귀중하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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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BR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BR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BR 오래전 신영복 교수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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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목요일 날에 행한 일들인데,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장면이 기록된 내용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다가오면 양을 잡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출애굽 시절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자 함이죠. 그래서 지금 그 날을 맞이해 양을 잡아 음식을 준비하는 상황이고, 그 장소가 어디가 좋을지 묻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이것이 무엇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묻는 상황이고,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미리서 준비해 놓으신 듯, 성내에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면 그 모든 것들이 준비돼 있을 것이고, 그곳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음식을 먹자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순종하면, 제자들의 필요를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채워주시고 만족케 해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실은 내가 스스로 띠 띠며 사는 것과 대조되는 삶, 주님께서 띠 띠워주며,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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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하나님의 시간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br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br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br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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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목요일 저녁에 12제자를 데리고 그 다락방에 올라가서, 음식을 먹을 때 말씀을 하셨죠. 본문 1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하시면서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비록 가롯 유다는 이미 그 마음을 품고 있어서 놀라울 게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11명의 제자들은 여태껏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라, 그 충격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감히 우리 가운데 누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다들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자가 그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분명코 이 중에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더 확실하게 하시는 말씀이 있죠. 21절 마지막 부분에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하시는 말씀이 그것이죠. 그렇게 나를 팔 바에는 차라리 이 땅에 태어난 것보다 못한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렇게 냉엄하게 나를 팔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이 떡 곧 빵을 떼어 주시면서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모습입니까? 나를 팔 자가 있다고 했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음만 못하다고 할 정도였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떡을 먹는 순간, 주님의 몸을 받아드는 순간, 그것을 뉘우칠 기회를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떡 곧 그 빵을 주님의 몸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래서 그 떡을 주님의 몸으로 받아드는 제자들이었다면, 그 자리에 있는 가롯 유다도 그 순간 주님앞에 진정으로 회개하면 될 일 아니었겠습니까? 그때 가롯 유다가 회개했다면, 그 다락방의 강화사건은 진정으로 가롯 유다를 위한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롯 유다는 떡을 받아드는 순간에도, 또 이후의 잔을 마시는 순간에도, 그 어떤 회개도, 그 어떤 뉘우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주님의 몸과 주님의 살을 받아드는 것, 곧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취하는 것보다 이 땅의 돈, 은전 30냥이 훨씬 더 커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탐욕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가롯 유다와 달리,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 곧 주님의 언약의 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보혈의 피로 구원받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이것이 주님의 귀한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나의 행위나 자아나 의로움 때문에 누리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신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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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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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 26절에는 그 성찬식 제정 이후에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밝혀줍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고 하시면서, 스가랴 13장 7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흩어짐 같이” 너희들도 다 흩어질 텐데, 내가 다시 살아나서 갈릴리로 먼저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죠. “모두가 다 버릴지라도 저만은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죠. 그런데도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힘을 주어서 말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 지언정 결코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실은 이것이 스스로 띠 띠는 삶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자아를 강하게 드러내는 모습이요, 자기 의로움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세우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을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진정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였다면,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들 부인하고 흩어진다고 하는데, 저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이 연약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강직하게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하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공급받는 비결입니다. 강한 자 같으나 약한 자로서 겸손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만한 자, 자가 의로움에 갇혀 있는 자는 꺾으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긍휼함의 은혜를 덧입혀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성령님께서 띠 띠며 이끄시는 삶을 살아가는 은혜로운 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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