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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마가복음

육신이 약하도다(막14:32-42)

by 권또또 202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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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의 목요일날 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만찬을 가지셨습니다. 그 직전에 주님께서는 ‘이 중에 나를 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차라리 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하고 이야기하셨는데, 다들 ‘나는 아니지요’. ‘나는 아니지요’,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떡과 잔 곧 살과 피를 나누어주셨는데, 그 때라도 가롯 유다가 “주님 그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하고 회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어쩌면 그 시간까지 마지막 기회를 주시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그렇게 하질 못했죠. 그에게는 주님의 생명보다 이 세상의 돈의 가치, 자기 욕망의 가치

가 훨씬 더 크게 보였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달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모두가 다 버릴지라도 저만은 버리지 않겠나이다”하고 호언장담했는데, 주님께서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한 번 더 힘을 주어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 지언정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실은 이런 모습이 ‘스스로 띠 띠고자 하는 모습’이고,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의 태도가 아니라, “자기 열심”, “자기 의로움”을 내세우는 율법주의자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바 있었습니다. 적어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베드로가 자기의 힘으로 주님을 따라나설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말할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렇게 고백했어야 하는 것이죠. “주님, 다들 부인하고 흩어진다고 하는데, 저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토록 연약한 자 중에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주님, 이 연약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하고 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방식, 자기 생각, 자기 열심히 따르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말씀 곧 주님이 주신 힘과 은혜로 인해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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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BR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BR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BR 오래전 신영복 교수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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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본문은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행한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겟세마네’(Gethsemani)란 예루살렘 동쪽의 기드론 계곡을 눈 앞에 둔 감람산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입니다. 그 뜻은 ‘기름 짜는 기계’란 의미입니다. 이른바 감람나무 열매를 압착하여 올리브 기름을 짜내는 곳이 바로 겟세마네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기름 짜는 방앗간 정도가 될까요? 그러나 더 중요한 의미는 바로 그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피와 땀의 진액을 짜내는 기도를 하셨다는 점이죠.

제가 2000년 전주태평교회의 전도사 시절에 자취를 하면서, 토요일이면 말씀도 준비하고 또 주일을 내다보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교회 맨 꼭대기 방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함께 기도한 신학생 후배가 있었죠. 그런데 그 친구는 마치 본문의 겟세마네 기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한 시간 정도 하면 온갖 진액을 짜듯이 완전히 땀방울로 온 몸을 적시기 때문이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그 친구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친구처럼 진액을 짜듯이 기도를 하든, 혹은 침묵 가운데 기도를 하든, 기도의 자세는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과 태도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35절에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하고 기도했습니다. 감람산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올라갔는데, 그 중에 세 제자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떨어진 곳에 나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깨어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기를 당부하신 뒤에, 당신이 홀로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줄 압니다. 그러니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매달리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의 내용으로 나아갔습니다.

사실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예수님께서도 그 고난의 잔, 십자가 형틀과 죽음을 될 수 있는 한 피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것이 솔직한 주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것을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맞서 나가야만, 이 땅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그 기도 중에 깨달으셨던 것이죠. 그래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의 내용을 바꾸어 나갔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는 길이란, 하나님 아버지를 따르는 기도란 바로 이런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연약한 우리 자신들도, 기도의 초점에 내 눈에 보이는 한 가지 것, 내 욕심에 이끌린 한 가지 것 밖에 보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질서를 조화롭고 균형잡아가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하나가 아닌 열 가지 상황, 아니 만 가지 상황의 수를 다 보고 계셔서, 가장 좋은 것을 응답해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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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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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겟세마네의 기도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듣는 기도입니다. 내 육신적인 뜻을 꺾고 주님의 깊으신 뜻을 좇는 것 말이죠. 그런 기도야말로 주님을 따르되 거래하거나 내가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기도와는 다른 ‘순전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은 늘 은혜를 공급해주시죠.이제 주님께서 돌아오십니다. 본래 세 제자들이 있던 곳으로 말이죠. 본문 37절에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그렇게 돌아왔는데, 제자들이 자고 있는데,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를 통해 주님께서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짧은 몇 마디를 기도하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주님의 깊으신 뜻을 아는 데에는 시간의 길이와도 정비례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이죠.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시험에 당하지 않으려면 기도해야 하는데, 피곤한 육신을 이기지 못해 그러는구나.’하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겟세마네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놓쳐서는 안되는 게 있습니다. 자기 수준만큼의 기도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게 아니라, 연약하면 연약한 대로 기도하는 사람의 그 수준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 사람이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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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BR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BR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BR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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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그렇게 제자들의 수준을 이해주시면서, 또 다시 그곳에 나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다”고 본문 39절에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보셨는데, 그들이 심히 피곤하여 “그들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41절 하반절의 새번역성경이 이렇습니다.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 때가 왔다. 보아라,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어떻습니까? 나 같으면 왜 나처럼 기도하지 못하세요, 할 것 같은데,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수준을 요구하신 게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너무나도 피곤하여 눈꺼풀이 내려가 있는 그들에게 이제는 잠깐이나마 자라고 오히려 위로해 주시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당신 자신이 맞서 나가아야 할 십자가의 길을 외면치 않고 당당하게 나가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기도를 하되, 이런 수준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 때문에 좀 더 성숙한 겟세마네의 기도, 곧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만큼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 수준에 맞춰줄 줄 알고, 그러면서 내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뜻은 기꺼이 응답해드리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따라 자는 기도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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