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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베레아 지역을 지나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 있었죠.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 말이죠. 그때 제자들은 이전과 똑같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그 때가 곧 왕 위에 오르는 때라고 보고 큰 자리 하나씩 요구하고 나섰죠. 하지만 주님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이후에, 제자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이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그래도 그들이 깨닫지 못하자,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면서, 제자들의 영적인 눈도 밝아지길 바라셨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구원의 은혜, 영생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내 곁의 작고 연약한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섬김의 삶을 살도록 은혜를 부어주셨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11장은 네 개의 사건이 기록돼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왕의 입성 장면(1-11)이고, 둘째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12-14), 세 번째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15-19),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저주하신 무화과에 대한 교훈(20-25)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은 흔히 말하는 종려주일, 다시 말해 고난주간의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있었던 일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이튿날”이란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월요일 다음날임을 알 수 있고, 본문 19-20절을 통해 볼 때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더라” 그리고 20절에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하는 것으로 봐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있던 일을 연속해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본문 1-11절까지는 종려주일, 곧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월요일 날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 계신 상황으로서, 예루살렘의 동쪽편인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른 상태입니다. ‘벳바게’란 ‘싱싱한 무화과나무가 많은 집’을 뜻하고, 베다니는 ‘설 익은 무화과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만큼 두 지역 모두 무화과나무가 많은 곳으로,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곳이 바로 감람산이고, 감람산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환히 보이는 곳이죠. 바로 그 벳바게와 베다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맞은 편 마을, 곧 벳바게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2절을 통해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맞은 편 마을, 곧 벳바게에 가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당부합니다. 만일 누가 묻는다면, 그 주인이나 그 관리자가 묻는다면,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하면 “즉시” 보내줄 것이라고 말씀하죠. 그래서 제자들이 가서 봤는데,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고, 그것을 풀자, 거기 있는 사람 중에 어떤 이들이 왜 그것을 푸는지 물었죠.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렀고, 그때 그들은 허락해 줬죠. 어떤가요? 여기에서 궁금증이 생기지 않습니까? 도대체 그 성읍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그 나귀의 주인은 또 어떤 사람이기에, 그 나귀 새끼를 지키고 돌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제자들이 그 나귀 새끼를 끌고 가려고 할 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아무런 것도 살펴보지 않은 채 순순히 내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이미 주님께서 그 전에 다 말을 맞춰놓은 나귀 새끼의 주인장이라고 말이죠.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시기에, 어떤 능력을 펼치셨는지, 익히 알고 있는 주인이었기에,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나귀 새끼를 내 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제자들이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다는 것,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자들이기에 기꺼이 나귀 새끼를 내 줄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어떤 사람이 전혀 일면식도 없는데, 나귀 새끼를 순순히 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바꿔 말하면 그만큼 나귀 새끼의 주인장도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따르고 수종들고 주님의 뜻을 받드는 제자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안다고 해서, 주님의 제자들을 안다고 해서, 그렇게 순순히 나귀 새끼를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그 주인이 진정으로 주님을 깊이 알고 있지 않다면, 주님의 제자들을 참되고 알고 있지 않다면, 값 나가는 나귀 새끼를 기꺼이 헌신해 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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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귀 새끼의 주인은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셨고, 그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걸 목격했죠.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고 고백하고 선포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현장이 있던 곳에 대해 요한복음 1장 28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요단강의 건너편 마을이 바로 베다니와 벳바게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나귀 새끼의 주인도 세례 요한이 증언한 그 사실을 직접 목격했거나 아니면 그 증언을 들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는 점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 그리고 남동생 나사로의 고향이 ‘베다니’였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동네에 가서서 동굴 무덤을 열게 하시고, 수의로 감싸 있는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선포하셨을 때 죽은 지 나흘 째 된 나사로가 다시금 살아서 동굴 무덤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이죠.
그 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 역사상 가장 놀랄 만한 사건이요, 베다니에서 천지가 떠들썩한 사건이지 않았겠습니까? 나귀 새끼의 주인도 바로 그 사건을 목격했거나, 들었거나, 아니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를 직접 만져봤거나 했겠죠. 바로 이것이 나귀 새끼의 주인, 혹은 그 주인의 명령을 따른 나귀 새끼의 관리자들이 “주가 쓰시겠다”고 제자들이 할 때, 기꺼이 주님께 내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새끼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고 간 것 말이죠. 그래서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고 열광하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하고 그 옛날 다윗 왕의 시절이 도래하기를 소원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상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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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나귀새끼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신 모습이 스가랴 9장 9절에 이미 예언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주님께서는 그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고, 나귀새끼가 그렇게 쓰였던 것이요, 나귀 새끼의 주인이 그런 은총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는 그런 생각인들 못했겠지만 말이죠.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첫 시작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그 시작점이 나귀 새끼를 내어드린 그 주인의 헌신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죠. 이미 그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주님을 알아 본 자였고, 나사로를 살려내실 때에도 주님의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깨닫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 ‘주가 쓰시겠다’할 때 기꺼이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헌신의 제물을 드렸고,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시작점을 여는 은총도 누렸다는 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은혜가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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