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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집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 하나를 섬기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붙여준 어린 양과 같은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돌보고 지켜내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일이요, 가장 귀한 일임을 밝혀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나라를 세울 때 기꺼이 칭찬받을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복음의 방식이 다를지라도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면, 기쁘게 여겨야 할 일임을 밝혀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믿음의 상태 속에 있든지, 나보다 더 연약한 양과 같은 이들이 나를 보고 실족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요, 오히려 나를 보고 더욱더 믿음의 진일보를 일구며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실 일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자아나 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머금고 살 때에 가능한 일이죠.
이제 주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는 상황입니다. 이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베레아 지역을 가리키는 곳입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누군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그의 부도덕함을 비판했을 때, 그 세례 요한을 참수시킨 인물이었죠. 바로 그 헤롯 안티파스가 분봉왕으로 통치하고 있는 베레아 지역을 예수님께서 가신 상황입니다. 그때 수많은 무리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주님은 ‘전례대로’, 다시 말해 ‘늘 예전에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본문 2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이혼하는 게 옳은 지 말입니다. 물론 그들의 물음은 진정을 알고 싶어서,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었죠. 예수님을 시험코자, 다시 말해 예수님을 올무에 빠트리고자 물어본 질문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올무였겠습니까?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을 참수시킨 것도 실은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한 결혼 때문이었죠. 잘 살고 있는 자기 그의 아내를 버리고 자기 이복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했고, 그것을 세례 요한이 책망하자, 그의 생일 잔치 석상에서 새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멋진 춤을 선사하자 그 춤에 반한 헤롯 안티파스가 결국 그의 어머니가 헤로디아가 요구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베도록 했죠.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코자 한 것도 바로 그런 일환이었던 것이죠. 그곳 베레아 지역에서 이혼에 대해 잘못 말할 경우에, 얼마든지 헤롯 안티파스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 예수를 축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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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구약의 두 가지 말씀을 종합적으로 해서 그들에게 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선 아내를 함부로 버려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의 대답은 신명기 24장 1-2절 말씀을 근거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결혼한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란 히브리어로 ‘עֶרְוָה’(에브라)인데 이는 ‘음부’ ‘나체’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뒤에 포도주를 먹고 벌거벗었을 때의 그 수치스러움을 보였는데, 그때 셈과 야벳은 뒷걸음질쳐서 아버지의 몸을 덮어줬는데 가나안은 그 수치를 다 떠벌리고 드러내고 다녔죠. 그 단어를 킹제임스번역본에서는 ‘uncleanness’ 곧 ‘불결하다’는 뜻으로 번역해 놓고 있는데,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새로 결혼한 아내에게서 노아의 그런 모습이 발견될 때 그 아내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이 없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부로 자기 아내를 버리는 일들이 일어났고, 그럴 경우 그 아내는 어디 가서 제대로 된 재혼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죠. 문제는 그런 흐름들이 마치 애굽의 문화처럼 번지게 되니까, 세상의 죄악된 결혼관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신명기의 법전을 통해 그 아내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식 이혼증서를 써서 이혼토록 하고, 그 아내는 다시 재혼할 길을 열어 줄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아무런 흠결도 없는데 괜히 트집 잡아서 아내를 함부로 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명기 법전보다 더 우위에 있는 법전이 있죠. 창세기에 나오는 창세기 2장 24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부부의 연을 맺었다면 진정으로 한 몸을 이루는 삶을 살라는 것, 그것이 실은 상위명령의 법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 상위명령의 법을 더 우위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시금 그 의도를 듣고자 할 때, 말씀해 주신 게 있었죠. 본문 11-12절입니다.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이것은 남편이든 아내든 간음한 이외에 함부로 이혼하지 말라는 뜻이요, 구약시대처럼 혹은 예전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할 때처럼, 여자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차원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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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예수님을 올무에 놓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은 한 마디도 대답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세상 문화는 애굽의 문화를 닮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2017년 우리나라 이혼률이 45%나 된다는데,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라, 사탄이 좋아할 일이요, 애굽의 문화풍속을 좇는 일임을 기억해야 할 일이죠.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 혹은 이혼 부분도 없지 않지만,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대에 여성들, 아내들이, 실은 사람취급도 못 받고 살았던 까닭에, 그녀들을 보호해주려는 주님의 마음에서 출발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당대의 사회적인 약자층, 소외계층의 여성들을 깊이 헤아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본문의 어린 아이에 대한 관점도 똑같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상황인데, 제자들이 그 아이들을 물리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의 관심은 작고 여린 것보다는 크고 높은 데 더 쏠려 있었던 모습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꾸짖었던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작고 여린 자들을 받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제 읽은 9장 37절의 말씀에서 읽었던 말씀이요, 제자들에게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당부요 부탁인데도, 그들의 속중심이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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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2천년 전 여성과 아내와 어린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무시 받는 소외계층의 사람들이었는데, 주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더 품고 받드는 가난한 심령으로 살도록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 곁에 더 작고 여린 어린 양과 같은 이들을 우리에게 붙여주셨다면 주님의 사랑에 기대에 그들을 더 품고 받드는 은혜의 삶을 살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총의 하루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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