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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샤라, 곧 황제의 신전이 있고 그 위용을 자랑하는 황제의 도시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물었을 때, 그들은 “주님은 그리스도시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의 그 물으심과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그 대답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었습니까? 황제의 법칙, 권력과 금권의 법칙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우리들은 오직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곧 메시아요 구원의 주님으로 모시며 살겠다는 다짐의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은 황제의 법칙 곧 권력과 금권과 경제논리가 판을 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의 법칙을 따르도록 이끌어주시는 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황제의 법칙과 경제 금권의 법칙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부여하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시는 것도 크신 은혜라는 점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가 황제의 법칙만이 통용되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오직 주님의 생명과 진리의 법칙, 곧 하늘나라의 법칙을 따르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그때로부터 6일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본문 2절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왜 다른 제자들은 놔 두고 그들 세 명의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가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에 대해 어떤 신학자는 그들에게 9명의 다른 제자들을 잘 이끌 수 있는 특별한 리더십을 훈련시키기 위함이라고도 하죠. 하지만 그런 견해보다는 오히려 이 세 명의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이 비해 더 관심가져 줘야 할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도 하죠. 저는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베드로도 급하고 다혈질적인 기질이 있고, 도 요한과 야고보도 사마리아 성에서 예루살렘으로 올 때 그 성읍 사람들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서 번개를 쳐서 심판하라고 말할 정도로 그들도 성품이 완만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가셨다고 하는데, 과연 이 그 산이 어디이겠습니까? 성경학자들은 이 산이 바로 ‘헬몬산’이지 않겠냐, 하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앞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곳이 빌립보 가이샤라이고, 그 인근의 높은 산이 바로 헬몬산이기 때문입니다. 헬몬산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에 솟아 있는 해발 2,814m의 높은 산입니다. 헬몬산이 중요한 것은 그 산에 눈이 봄철에 녹으면 그 시냇물 줄기가 요단강을 거쳐 갈릴리 바다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133편 3절에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하고 읊조릴 정도죠. 헬몬산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 곧 예루살렘을 뒤덮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죠. 본래 이스라엘 땅이 척박하고, 광야로 이뤄진 땅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헬몬산의 이슬 자체가 복이요, 그것을 영생으로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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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이 비해 그 심성과 그 인격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그 헐몬산, 온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물줄기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그 산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주님께서 변형이 되셨습니다. 과연 어떻게 변형되셨습니까?
본문 3절에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의 옷에 광채가 났는데, 그 광채가 새로 빨래한 옷보다 더 광채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4절에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그 광채 가운데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고, 예수님께서 그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말합니다. 본문 5-6절의 새번역성경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모습을 제자들이 보기에, 베드로가 보기에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광경이었습니다. 더욱이 그곳에 모세도, 엘리야도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된 것입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 같으면 이 모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가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주님 여기다 초막 셋을 지어서 살도록 하시죠. 하나는 주님을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다른 하나는 엘리야아를 위해서 말이죠.’하고 말입니다. 이 말은 뭔가 깊은 생각 가운데 내 뱉은 말이 아니라, 무심코,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그때 구름이 덮이면서,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이른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이죠. 그래서 문득 둘러보니, 예수님과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사건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왜 변형이 되셨고, 왜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된 변형체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 속에는 모두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이 사건 속에도 하나님의 뜻하신 뜻이 담겨 있는 것이죠.
바로 그 뜻은 그 다음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이른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좀 전에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예수님의 당부이십니다. 이 말씀은 어제 읽은 마가복음 8장 후반부의 말씀 곧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 부분과, 오늘 읽은 9장 초반부의 그 변형된 모습과 상관이 있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모습, 곧 부활체의 모습이, 그렇게 변형된 모습, 광채가 나는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그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었죠.
그렇다면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는 그 사건을 미리서 예증으로 보여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점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죠. 그들의 시선은 오직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한계요, 실은 우리 자신의 한계 아니겠습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황홀경에 도취된 채 다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연약함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건보다도 그 사건 이면에 일어나는 그 뜻과 의미를 캐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볼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연약함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연약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깨달을 수 있도록, 미리서 예시해 주시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당신은 분명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영광의 광채로 변모된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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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방식이 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미리 예증을 통해 보여주시고, 그래도 깨닫지 못할 때 확고하게 성경을 통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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