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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마가복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7-38)

by 똑똑이채널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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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근처의 광야에서 행하신 칠병이어의 은총, 곧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토막으로 4천명을 먹이신 사건,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해 1만 5천명은 족히 되는 그 군중들을 먹이신 사건을 살펴봤고, 아울러 달마누나 지역에서 표적을 구하는 무리들에게 그 어떤 표적도 보여주지 않으신 모습, 그리고 제자들이 육신의 떡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 곧 그들의 어리석은 교훈을 주의하라고 일러주셨고, 갈릴리 벳세다에서 맹인을 고쳐주셨는데 주님의 방식으로 그를 고쳐주신 사건을 살펴봤었습니다.

그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었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올 때 주님은 우리의 상황을 먼저 아시고 채워주신다는 것,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먼저 내어드릴 때 차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 다만 눈에 보이는 표적만을 좇는 자에게는 그 어떤 표적도 보여주지 않는 게 오히려 은혜라는 것, 그래서 맹인과 같은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 어둡고 둔한 심령들을 깨워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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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 유페이퍼- 교보ebook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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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27절 말씀이 이렇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제 갈릴리 벳세다를 떠나 그 위쪽인 빌립보 가이사랴에 제자들과 함께 당도하신 모습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바다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도시입니다. 그곳은 로마 황제를 위한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에 그곳은 이교도인 시리아와 그리스 사람들이 주로 사는 그리스-로마식 도시였습니다. 사실 빌립보 가이샤라란 이름은 분봉 왕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롯 빌립이 자신의 이름과 로마 황제의 이름 곧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호적 조사를 명령했던 그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름인데, 다른 말로 ‘아우구스투스’ 또 ‘옥타비아누스’로 불린 인물입니다. 헤롯 빌립의 이름과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름을 합쳐 빌립보 가이사랴로 새로 불렀던 도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도시나 로마 황제의 이름을 갖다 붙일 순 없다는 점입니다. 로마 황제를 위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첫째는 로마 황제의 위용에 걸맞는 규모를 갖추어야 했죠. 당시 지중해 세계의 1인자인 로마 황제의 이름을 아무데나 붙인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그 도시의 중심이나 혹은 도시 가장 높은 곳에 황제를 위한 신전이 반드시 자리 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지상의 신으로 군림했습니다. 그것도 명목상의 신이 아니라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직접 받는 실질적인 신으로 군림하고 있었죠. 바로 그것이 황제숭배사상으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분봉 왕 헤롯 빌립이 건설한 그 도시에 황제의 칭호를 붙였다는 것은 두 가지 그 조건이 충족됐던 것이고, 그만큼 빌립보 가이샤라는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도시를 지나가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말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대답하죠.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더러는 엘리야, 또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하고 말이죠. 그러자 주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사람들의 견해는 놔두고, 너희들은 과연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죠.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그런 대답을 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봤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고백을 덧붙인 것으로, 그러나 마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하고 짧고 굵게 대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 구원자를 뜻하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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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볼 수 있어요 | 권성권 | 유페이퍼- 교보ebook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너무나 답답했다. 지금도 그게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게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들도 꿈을 꿀 수 없는 상태다.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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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하필 주님께서 그곳 빌립보 가이샤라, 즉 황제를 위한 기념비적인 도시에서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그런 대답을 듣고자 하셨을까요? 이 세상은 로마 황제가 주름잡고 있고, 모두가 황제의 논리, 경제법칙의 논리, 금권의 논리대로 따라 움직이지만, 너희들만큼은 메시아, 곧 구원자의 법칙을 바라보며, 하늘 생명을 바라보며 살라는 그런 뜻에서 하신 질문이셨던 것이죠. 비록 겉모습과 옷 입는 행색은 로마 황제와 비교도 안 되는 주님이시지만, 그러나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참된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을 통해 그렇게 멋진 대답을 한 베드로, 그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관점이 얼마나 주님과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마가복음에서는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그런데 어떻습니까? 32절을 보면, 좀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을 대표해서 그 멋진 고백을 한 베드로,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이번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여기에서 ‘항변하다’는 ‘에피테마오’(ἐπιτιμάω)로 ‘비난하다’(rebuke), ‘꾸짖다’(reprove)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가고자 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비난하고 꾸짖는 베드로의 형국인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3절 후반부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고 진짜로 꾸짖는 장면이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 곧 진정한 메시아요 참된 구원자가 되는 길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가능한데, 지금 베드로는 그 길을 꺾도록, 그 길을 거부하도록, 그 길을 가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주님을 비난하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생각이 사탄의 생각에 사로잡힌 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가장 귀한 말씀이죠. 34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 메시아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이 세상의 황제숭배사상에 물들어 있는 자기 욕심, 황제의 법칙, 금권의 법칙 경제제일의 법칙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의 욕심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으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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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성경으로 문화읽기2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오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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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지금도 이 세상은 황제의 법칙 곧 권력과 금권과 경제논리가 판을 치지만, 우리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법칙 곧 생명과 진리의 법칙을 따르게 하시는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황제의 법칙과 경제 금권의 법칙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부여하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시는 은혜를 부어주셨다는 점입니다. 그 은혜가 있기에 오늘도 부족하지만 그 은혜 속에서 주님의 길을 좇아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주일날 낮에 말씀드린 차원, 곧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물으셨던 것과 같은 이치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신 것 말이죠. 이 세상에서 너와 함께 하는 사람들 곧 너의 동업자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신 물음이고, 또 하나는 각주 1에 있었듯이 ‘이 사람들’이란 ‘이것들’로 대치되는 바, 그물질하고 물고기 잡고 돈을 버는 것, 바로 그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신 물으심입니다. 한 마디로 황제의 법칙이 판을 치는 이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의 법칙, 곧 생명과 진리의 법칙을 더 사랑하며 살겠느냐는 것이죠. 우리 각자의 능력과 의지로는 그걸 좇아 살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서, 주님의 생명과 진리의 법칙을 쫓아 살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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