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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손과 발을 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음식을 먹을 때에도 손을 씻고, 잔과 그릇을 씻어서 먹는 것도 당연하죠. 그런데 그것을 율법의 규례로 정하고 장로들의 전통으로 정해서 그것으로 사람을 옥죄는 이들이 있었죠.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들이었죠.
바리새인이란 말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생겨난 말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던 날, B.C.586년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그 이후 페르시아, 헬라 제국, 심지어 로마 제국에까지 흩어져 살았죠. 그들을 일컬어 ‘흩어진 유대인’ 곧 ‘디아스포라’라고 하죠. 그들은 자신들이 패망한 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이 뒤부터 스스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는 무리들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곧 ‘분리주의자들’, ‘바리새파’가 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킬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일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과 의지만으로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킬 수 있다고 자신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의 참된 정신과 의미보다도 그 형식만을 중시했던 자들로 변질되었죠.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들어 있지도 않는 그들만의 전통까지도 만들었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일반 백성들을 무시하고 옥죄는 삶을 살았죠.
그렇다면 서기관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인쇄기술이 발달치 않은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양피지에 필사하던 자들이 그들이었죠.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면 목욕재기를 하고, 새로운 붓으로 바꿔서 썼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면서 ‘야훼’라는 이름도 ‘나의 주님’이라는 ‘아도나이’로 불렀던 이들이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성경을 필사하다보니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능통한 지식, 그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들 역시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의 참된 정신과 의미보다 율법의 문자주의에 갇혀 버렸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서기관들도 율법의 형식주의에 치우쳐버렸던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오늘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다면서 예수님을 나무라는 형국이죠. 그러면서 그들이 어떤 자들이었는지, 본문 3-4절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죠.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해가 되십니까? 그들이 어떤 조례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까? 손을 씻지 않고서는 절대로 먹지 말라,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물을 뿌려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도 필히 씻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장로들의 전통과 조례로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일반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법조항처럼 강조했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엔 ‘부정한 자’로 취급하던 그들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게 됩니까? 그것은 율법이나 규례나 조례 차원의 사항이 아니라, 그저 세균 때문에 청결하게 씻으면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죠. 그런데도 그들은 뭔가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조례들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런 조례들이 ‘자기들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자아로 똘똘 뭉쳐 있는 못난 심보’라는 점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핵심적으로 말씀하신 게 있죠.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본문 6b-8절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정결례, 곧 그들이 손을 씻도록 강요하고, 옷을 씻도록 강조하고, 잔과 주발을 씻어서 먹는 걸 조례로 만들어놓고 백성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전통’일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전통은 지키면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자기 영혼의 생명을 지키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때로는 바빠서 손을 씻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밭에서 일하다보면 일하던 그 손으로 장갑만 벗은 채 먹을 수 있는 게 일반인들의 삶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그것을 율법의 조례처럼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사람에 대한 긍휼어린 마음이 없는 것’이요, ‘그들 마음속에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긍휼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율법의 형식주의자들인 그들에게 주님은 엄히 말씀하십니다. 본문 9-13절 말씀입니다. 그것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면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합니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제 5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고 명령하셨고, 그 계명에 대한 각론으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죽이라’(출21:17, 레20:9)는 계명도 포함시켜 놨는데, 너희들은 부모 공경에 대한 부분조차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면 온전하다고 선언하여, 부모에 대한 예의와 도리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고르반’ 제도까지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데 비용이 100만원 정도 들어가는데, 그것이 무리라고 생각하여, 차라리 50만원으로 ‘고르반’이라 하여 하나님께 드리면, 부모 공경은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라고 단정하게 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일깨워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녀야 할 사람에 대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모세오경을 통해 당신의 율례와 법도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사람에 대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인데, 부모님에 대해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정말로 공경해야 하고, 사람에 대해서도 겉모습만 볼 게 아니라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품고 살아야 할 텐데, 그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5-16절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물보다, 손으로 씻지 않고 먹는 것보다 진정으로 더러운 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는 점, 21절의 후반부의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의 문자주의나 형식주의에 갇히지 않는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나에게 영적인 하나님의 대리자인 부모님을 공경하게 해 주셨고, 사람에 대해서도 긍휼과 자비와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하셨다는 게 은혜입니다. 더욱이 내 마음 속에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 있다면, 그 중에 죽일 것은 더 죽이고 뺄 것은 더 빼도록 하셔서 당신의 더 크신 은혜를 채워주신다는 점입니다. 내 것을 빼면 하나님의 것을 채워주시는 게 은혜입니다. 내 속에 악한 것을 빼도록 하실 때 순종하면 당신의 더 크신 은혜로 채워주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내 속에서 빼도록 하시는 게 무엇인지, 이 새벽 시간에 깨달을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 동안에 더욱 크게 채워주실 은혜를 바라볼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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