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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서북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의 게네사렛에서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게 아니라 속에서 나온 악한 생각들이 더러운 것임을 밝혀주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율법의 문자주의나 형식주의에 갇히지 말고, 사람에 대한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도록 말이죠. 그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자, 내 힘과 내 의지와 내 능력을 빼도록 하여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시는 분임을 깨닫도록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이제 그곳 가버나움의 게넷사렛에서 40마일 곧 64km나 떨어진 ‘두로’ 지방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문 24절에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두로는 지중해 해안가에 있는 해상지역으로, 그 옛날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두로 왕 히람이 사신들을 통해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냈던 지역이고, 솔로몬 이후의 남북 분열왕국 때에는 해상무역로를 완전히 장악하여 세계 패권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여세를 몰아 애굽과 모압과 에돔과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대항했던 나라입니다. 물론 그렇게 교만할 때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그들의 교만을 꺾도록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겸손하도록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채 바벨론에 대항하다가 13년간 포위한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하고 말죠. 그 뒤로로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강력하게 항거했지만 결국 함락되고 말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어제 말씀드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이 그곳 두로까지 들어가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곳 이방 땅 두로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집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누가 나타납니까? 25-26절에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헬라인 곧 이방여인인데,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하는 여인이죠. ‘수로보니게’란 두로와 시돈 지역을 포함한 ‘베니게 지역 출신’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녀의 딸이 지금 귀신 들린 상태인데,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귀신을 내 쫓아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가 지금 예수님께 나온 것이죠.
그런데 27절을 통해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새번역성경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두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기 동족을 먼저 챙기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죠.
이때 그녀가 보인 태도가 무엇입니까? 28절의 새변역성경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굽히며 자신을 더 가난한 자세로 주님께 말씀드린 것이죠. 상 아래의 개들도, 그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먹고자 한다고 말입니다. 제가 비록 동족은 아니더라도, 부스러기의 은혜라도 베풀어 달라고, 간곡히 호소하는 모습이죠.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의 딸에게 들어 있는 귀신이 떠나갔다고, 그러니 집에 돌아가 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딸이 완전케 되었음을 본문이 증언해주고 있죠. 그렇기에 주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제는 그 의도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녀를 무시하고 짓밟기 위해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니죠. 자녀들에게 떡을 먹여 배불리게 해야 하니, 그 떡을 개들인 너희 같은 이방인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신 의도는, 결국 그녀의 심령을 가난한 심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녀가 그 절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면 결단코 주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었겠죠.
이어지는 본문이 3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주님께서 그 두로 지방에서 나와 이제는 그곳에서 또 40마일 북쪽 지역 곧 64km나 떨어진 그 위쪽의 ‘시돈’지역으로 가셨다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이제 데가볼리 곧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인의 2천마리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신 그 인근 지역인 데가볼리를 지나, 다시금 갈릴리 호수로 오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로의 위쪽 도시인 ‘시돈’까지 주님께서 가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시돈’은 그 옛날 오므리 왕조의 아들인 북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이, 자기 왕비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바로 그 이세벨이 시돈의 엣바알 왕의 딸이었다는 점입니다. 바꿔 말해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 땅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먹이고 입혔던 이유가 바로 시돈에서 정략결혼 차 시집 온 이세벨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시돈도 두로와 함께 바벨론에 패했고, 그 후에는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에게 패했는데, 지금 그곳 지역에까지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어서,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당신의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돈 지역을 돌보고, 다시금 데가볼리를 거쳐 갈릴리의 가버나움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어떤 일이 나타났습니까? 본문 32절에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께 데려왔고, 예수님께서 안수해 주시기를 원하는 장면이죠.
왜 그들이 예수님께 그 사람을 데리고 나왔는지, 왜 예수님께서 안수해 주시기를 원했는지 알 수 있죠. 이미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그 예수님께서 어떤 병든 자도 고칠 수 있고, 어떤 귀신들린 자도 다 몰아내실 수 있고, 대부분 그들을 고치실 때 손으로 안수하는 방법을 쓰셨기 때문에, 똑같이 안수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33-35절을 통해 이렇게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예수님께서는 귀머거리요 벙어리가 된 그 사람을 고치시되,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에바다’ 하신 것입니다. 곧 열려라, 하고 명령하신 것이었죠.
그런데 한 가지 의문시 되는 부분이 나오죠. 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서 그런 일을 행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이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의해 통제 받는 분도 아니요, 그들의 구경꾼도 아니요, 그들이 원하는 방식에 끌려다니는 분이 아니라, 그들의 주관자이심을 천명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컨트롤하려고 하거나, 내 방식으로 주님을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신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 제목, 소원하는 바가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주님만 의지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귀먹고 벙어리 된 심정으로 절망의 상황에 맞이했을 때 그때 내 방식으로 주님을 컨트롤하려고 할 게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네 힘을 빼고 내 힘을 의지하도록 말이죠. 네가 앞서려고 하지 말고 내가 앞서게 내어 맡기라고 말입니다. 네 방식은 내려놓고 주님의 방식을 따르도록 말입니다. 그때에 주님의 한없는 은혜를 부어주시겠다고 말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혜의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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