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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일 주일 아침에, 이슬람 수니파 원리주의 무장단체 일명 IS(이슬람국가)가 인질로 잡아 협상하던 일본 사람 고토 켄지(47, 後藤健二)를 참수했습니다. 본래 고토 켄지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전 세계의 분쟁지역을 돌면서 여성과 어린 아이들의 억압받는 현실을 영상과 책으로 보도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시리아의 IS지역에 들어가 취재하려다가 봉변을 당한 것도 그런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고토 켄지는 본래 일본기독교단(日本基督教団) 덴엔쵸후교회(田園調布教会) 교인으로 평소 그런 말씀을 버팀목으로 삼으며 취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54:4) 더욱이 그가 SNS에 올린 글을 통해서는 이슬람 사람들을 ‘형제’로 불렀다고 하죠. “눈을 감고, 가만히 참는다. 화가 난다고 성을 낸다면 그걸로 끝이다. 그것은 기도에 가깝다. 증오는 사람의 일이 아니고, 심판은 신의 영역이다. 그렇게 가르쳐 준 것은 아랍의 형제들이었다.”는 글도 남겼다고 합니다. 그의 참수 소식에 아내 린코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가족들의 슬픔이 크다. 우리는, 두 딸의 아버지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부모의 사랑스러운 아들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분쟁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전하기 위해 힘쓴 남편의 삶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이시도 준코 여사도 기자회견을 통해 “아들 켄지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꿨고 분쟁과 가난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일했다”고 밝혔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무슬림 사람들을 ‘형제’로 생각하며, 그곳의 약자들을 취재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알고 취재하던 중에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면, 우리는 그의 죽음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의 죽음도 내다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세례 요한의 참수 소식을 전해주고 있어서, 잠시 그의 죽음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기도하는 어머니 엘리사벳 밑에서 태어난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출생도 예수님처럼 천사로부터 미리 예고받고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 장소는 광야였고, 그의 주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고, 그의 의복은 낙타 털옷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검소하며 가난한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광야는 ‘미드바르’로 말씀을 칭하는 ‘드바르’와 연관 있는 단어입니다. 아무런 것도 갖춘 게 없는 광야였기에 오직 위를 우러러 볼 수밖에 없고,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가 바로 광야라는 점입니다.
그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한 자요,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외치고 선포하고, 직접 세례를 주던 선지자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자였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것을 본 자요, 하늘에서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까지 들었던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살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면서 불의에 대항하는 자였습니다. 그 까닭에 예수님께서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7:28)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고,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기며 살던 그가, 돌연 참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당대의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과연 그가 참수형을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세례 요한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이복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 앞에 부도덕한 일로, 죄악이라고 말입니다. 헤롯은 그런 세례 요한의 지적이 매우 불쾌했지만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의로운 선지자로 알았기에 헤롯 안티파스도 세례 요한을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왕이나 권력자가 해를 가할 경우 도리어 그 해가 자신에게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에게 독기를 품었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된 헤롯 안티파스를 헐뜯고 비방하는 것은 곧 자신의 부도덕함을 꼬집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날이 되었고, 귀빈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때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모든 궁중 대신들 앞에서 아름다운 춤을 선사하자, 특유의 호기를 부립니다. 살로메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나라의 절반까지도 다 주겠다면서 말입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자기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달려갔고, 헤로디아는 그 기회를 놓칠 새라 헤롯 안티파스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요청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살로메의 요청 앞에 헤롯은 아차 했지만 그걸 어긴다면 귀빈들 앞에서 자기 체면이 손상될 것 같아, 끝내 딸의 요청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소반에 얹어 딸에게 주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롯은 소반에 담긴 요한의 머리에서 혀를 잡아댕기는 욕을 보이는 행동을 취했다고 전하죠.
그의 죽음 앞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얼마나 큰 슬픔에 잠겼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죽음 앞에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 장례를 치렀다고, 본문 29절에서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하고 아름답고, 죄를 죄로 규정하며 불의 맞선 세례 요한의 죽음 앞에 우리는 무슨 생각이 들게 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자기 사명을 다한 세례 요한을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하는데, 왜 하나님은 방치하셨던 것입니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죠.
더욱이 오늘 읽은 본문의 앞에서 일어난 사건을 떠올린다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충분히 뒤로 미루실 수 있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어제 읽은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셔서 둘씩 둘씩 짝을 지어 귀신을 좇아내는 권능을 부여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부여하신 일을 잠시 미룬 채, 우선 세례 요한부터 살리고 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을 파송하기에 앞서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딸이 죽었을 때에도 그 딸의 영혼을 살려내셨다면, 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한 여인을 고쳐주셨다면, 더욱더 위대한 하나님의 선교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세례요한의 죽음 정도는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주님이시지 않았겠냐는 거죠.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마가를 통해 이 본문을 이 부분에 배치하여 기록하게 하신 뜻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제 곧 12명의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세례 요한의 참수형 당한 것을 기록하게 하신, 그 의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제자들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다 보면 세례요한처럼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고난에 직면할 수도 있고, 심지어 배고픔과 굶주림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자, 세례요한의 참수형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이 본문을 우리에게까지 읽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하시는 ‘일하는 제자들’로 삼으셨을 때, 우리에게도 이런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고토 켄지처럼 IS지역에 나가 순교당하는 일을 직접 겪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전하는 일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다보면 남모를 고난과 수모에 직면할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살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삶을 살던 세례 요한보다 분봉 왕 헤롯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고, 파리 목숨 같은 세례 요한보다 헤롯은 그 목숨을 지배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제자들’로서, 그런 믿음과 가치를 붙잡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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