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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거라사인 마을로 가실 때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혼비백산할 정도로 그 풍랑과 파도에 기겁을 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파도와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해 주셨습니다. 그 사건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서 천지만물의 주관자요 곧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셨습니다.
풍랑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주님께서는 이내 갈릴리 바다의 남서쪽에 위치한 거라사인 마을에 당도하였습니다. 그곳에 가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평소 무덤에 살면서 쇠고랑도 다 끊어버리고 괴성을 지르면서 마을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귀신 들린 자 한 사람, 곧 2천 마리 군대 귀신들린 자 한 사람을 회복시켜주기 위함이셨습니다.
주님께서 2천이나 되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통해 무엇을 일깨워주고자 하심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그 어떤 악한 영의 세력들도 제압하실 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떠나가기를 원했다는 사실이죠. 돼지 떼 2천 마리가 몰사당한 것을 보고서, 자신들의 재산상에 손해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영혼 없는 수많은 돼지떼들보다 영혼을 지닌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거라사인의 광인,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한 사람을 고쳐주시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영혼을 지닌 한 영혼이 주님을 통해 온전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임을 보여주신 후에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신 후에 곧장 본래 있던 갈릴리 해변가로 배를 타고 돌아오셨습니다.
마침 그 해변가에 엄청난 군중이 모여들었고, 그곳에는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는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회당’은 구약의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외국에 생겨난 제도입니다.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된 이후에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10명 정도 이상이 모이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도 하고 또 각종 모임을 갖던 장소가 회당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그래서 성전과 회당이 공존했는데,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완전히 무너뜨렸을 때인 A.D.70년 후에는 회당에서 더 많은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에는 지금도 옛날 회당의 터전이 있는데, 바로 그 회당장 역할을 한 야이로라는 사람이 지금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으며 도움을 청하는 상황입니다. 본문 23절에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하는 간청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회당장의 말을 듣고, 그의 집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하나라도, 병든 자 한 사람이라도, 그 영혼과 육체를 회복시켜주시고 고쳐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더 찾고 얻기 위해서, 그의 집으로 가시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와중에 또 한 여인이 주님께 나오는 장면이 포착됩니다. 본문 25절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혈루증이란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혈이 멈추지 않는 유출병’ 중 하나죠. 구약시대의 율법의 관점으로 보면 그녀는 도저히 한 동네에 함께 살 수 없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사회생활을 할 수도 없고, 늙어죽을 때까지 격리의 대상, 부정의 대상이었죠.
그런 그녀가 지금 주님께서 가시는 길에 나왔다는 것은, 돌팔매질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릎쓰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받고, 온갖 비난과 모욕을 받으며 돌팔매질을 당할지라도, 주님을 만나 몸도 마음도 고침을 받으면, 족하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온 믿음을 갖고 주님의 옷에 손만 대도 낫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의 옷에 손을 댔는데, 그 즉시 그의 혈루증세가 멈춰서 버렸죠. 그때 주님께서는 그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30절에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애워 싸 미는 것을 주님께서 착각하신다고 하는데, 주님은 그녀가 믿음을 갖고 손을 댄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때 여자와 주님께서 눈이 마주쳤는지, 그녀는 오히려 두려움 속에서 주님 앞에 엎드리면서 그 모든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34절에 “딸아 네 미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에서 첫 마디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딸아”, 이 얼마나 듣고 싶은 말이었겠습니까? 어쩌면 그녀는 유출병으로 인해 그 부모님에게서 버림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어머니조차 자기 딸을 딸로 인정해주지 않고 자기 딸을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동네 사람들, 그 지역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녀를 온전한 사람 취급도 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예수님께서 “딸아”,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아’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셨으니, 많은 눈물이 복받쳐 올랐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렇듯 모두가 부정하다고 낙인찍은 그 여인, 잉여인간으로 취급하면서 소외시킨 그 여인, 사회적인 장애물로 여기던 그녀에게 사람의 존재감을 다시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평안을 선물해 주셨고, 그 병에서 놓여 강건하게 살면서, 이제부터는 한 가정의 구성원이자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살도록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그 회당장 야이로의 집안 사람들이 찾아와서,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시고 갈 이유가 없다고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죽은 딸아이가 있는 그 회당장의 집에 가셨고, 다들 통곡하며 울고 있을 그 때에, 주님께서는 그 아이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셔서, 그 아이를 향해 ‘달리다굼’ 곧 “소녀야 내가 내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하시는 그 말씀으로 소녀의 시신을 향해 명령하셨는데, 그 소녀의 영혼이 살아돌아왔습니다. 그때 그 소녀의 나이가 12살이었다고 본문 42절에서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가장 큰 슬픔은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꽃도 피지 못한 상태로 그 딸아이가 죽었으니, 그 회당장 야이로의 가슴은 얼마나 무너져 내렸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딸아이의 영혼을 살려내셨고, 그 온 가족에게 큰 기쁨을 선사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이 그 회당장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죽은 사람의 영혼도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천명하신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12년 동안 하혈하는 그래서 가정안에서도 무시받고 있고,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격리의 대상이 된 한 여인의 질병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셨고, 뿐만 아니라 죽은 12살 된 회당장의 딸의 영혼을 되살려내심으로서, 모든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오늘 우리에게까지 깨닫게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해 주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까? 하나님은 누구든지 12년 동안 하혈하며 고생하고, 또 사회적으로 격리의 대상이요 천대받는 삶을 살아왔어도 주님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딸처럼 아들처럼” 당신의 자녀들로 품어주시고, 그 모든 근본적인 질병까지도 근원적인 문제까지도 능히 고쳐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죽은 12살 된 회당장의 딸아이의 영혼도 살려내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상황 가운에서도 선으로 이루실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주님께 전적으로 맡길 수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내 모든 삶의 환경 속에서 근본적으로 도우시길 원하시고, 근원적인 문제를 회복시켜주시길 원하시는 그 분 앞에 간절히 간구하며 의탁하며 나아갈 수 있는 하루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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